• 최종편집 2024-03-27(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아타나시우스)와
‘본질이 비슷하다’(아리우스)는 주장이 맞서



아리우스주의
로마 시대에 탄생한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박해 아래 있었다. 그 박해는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어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선포될 때까지 간간히 지속되었다. 그래도 복음은 계속 확장되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서방 전 로마사회로 퍼져갔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리스도교 전체가 모여 ‘정통신앙’이라고 하는 교리를 확립하는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많은 이설(異說)이 난무했다. 즉 기독론 논쟁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이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교구 출신들이다. 이 논쟁으로 그리스도교의 정통신앙이 확립되었다.

1. 아리우스는 누구인가?
아리우스(Arius)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장로(당시의 목회자)를 지낸 인물로서, 학식이 높고 빈틈없고 엄격한 사람으로 당시 교회에 널리 인기가 있었다. 그는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기독론을 놓고 논쟁을 벌여 심각하게 대립했다.
알렉산더 감독은 오리게네스의 성자의 영원한 발생 교리를 받아들여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호모우시아)을 주장했지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창조주이긴 하지만,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닌 ‘유사본질’(호모이우시아)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결국 겉으로 분출하여,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321년, 100명의 이집트와 리비아 감독들이 모인 이집트 시노드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한 죄로 면직 출교 당했다. 그럼에도 아리우스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며 가르치고 다녔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그를 추방하자, 그는 팔레스타인과 니고메디아로 가서 자신의 교리를 퍼뜨렸다. 그리고 ‘연회’(Thalia)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에 신학교 동문이었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와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그를 변호했다. 그러자 알렉산더 감독은 모든 감독들을 대상으로 여러 편의 회람용 서신을 보내 이들을 단죄했다. 이에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이 대거 일어나 알렉산더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논쟁은 온 교회를 신학적 전쟁터로 만들었다.

2.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신앙’
이 논쟁은 끝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입하여 325년 소아시아 니케아(지금의 이즈닉)에서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때까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 문제에 최초로 개입한 사건이다.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감독들에게 소집공문을 보내 각 지역 관공서에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탈 것을 마련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 니케아에서의 체류 비용의 일체는 국고에서 지원했다.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로서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 318명의 감독들이 모여 두 달동안 진행되었다. 어떤 이는 국가의 우편 마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말이나 노새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더러는 걸어서 왔다. 참석한 감독은 318명이었지만, 장로들과 집사들과 수행원들의 수를 합하면 참석자 수는 1500명 내지 2000여명 가량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회의는 양 진영의 지도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예비 변론이 있은 뒤에 정식 회기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고히 주장한 아타시우스를 대표로 하는 정통신앙 진영은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영원히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나신 아들이니 아들도 본질상 아버지와 동일하여 창조함을 받은 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아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유사본질파는 “아들은 만물과 같이 창조함을 받은 장자임으로 영원치 못하며, 그 아들은 시작이 있고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니 본질과 영원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같은 신(神)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한 사람이 당시 27세의 대부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의 성육신(Incarnation)을 논하며 “신과 인간을 결합할 수 있는 자는 피조자가 아니고 신이라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그리스도는 창조자와 똑같은 신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예수는 그리스도로써 “신과 본질이 같다”(homo ousios, 호모우시오스)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신앙이 되고, “신과 본질이 비슷하다”(homo iousios, 호모이우시오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설이 되었다.

3. 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주의 분파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교회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가운데 예루살렘의 사도 공의회(행 15장)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회의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회의를 가리켜 “모든 이단에 대해 승리를 거둔 진정한 기념비”라고 했다.
사실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할 때만 해도 아라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가 발표된 이후 많은 감독들이 정통신앙편으로 돌아섰다.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옹호하는 자들이 그때부터 이단의 공세에 맞서서 방어전을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감독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호모우시온’ 문서에 마지 못해 서명했으므로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328년 4월에 감독 알렉산더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감독이 된 뒤에 이단 죄로 면직된 성직자를 복직시키기를 거부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후, 336년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서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로 지목돼 갈리아 트레브로 유배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339년 두번째로 면직된 후 로마 감독 율리우스에게로 망명했다. 반면에 아리우스는 335년에 이미 사면을 받아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상태였으나, 그 다음 해에 80세 나이로 죽었다.
이런 혼란을 거듭하면서 동방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우세했다. 338년에 니케아 이전부타 아리우스를 두둔해온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이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로서 아타나시우스의 정통신앙을 채택한 서방 교회를 적대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대립관계에 들어가자 343년에 동방 황제 콘스탄티우스와 서방 황제 콘스탄스가 샤르디카에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346년 그의 형제 콘스탄스의 강권에 못이겨 아타나시우스를 복권했다. 그러나 350년 콘스탄스가 죽자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감독들을 폐위하고, 아타나시우스도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서 쫓아냈다. 아리우스파의 배후에 콘스탄티우스의 아내 유세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리우스주의가 로마 교구를 제외한 제국 전역에서 교권을 잡았다.

4. 정통신앙의 승리
그러다가 361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죽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은 율리아누스 황제가 모든 그리스도교 진영에 관용을 베풀어 유배당한 감독들을 불러들였다. 그 조치로 아타나시우스도 돌아올 수 있었다. 서방에서는 로마와 밀라노, 갈리아에서 모인 교회회의(지방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집트와 동방에서 열린 교회회의들에서도 아타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카파도키아의 세 명의 감독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활동이 큰 힘이 되었다.
373년 아타나시우스가 죽은 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감독이 되어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수도의 모든 교회에서 쫓아냈다. 이러한 강압적 조치들에 아리우스파가 반발하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381년 5월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 삼위일체 ‘위격’을 논쟁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령론이 중심이었다.
여기에서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성령의 위격이 결정되었다.
황제는 그 해 7월에 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믿는 신앙에 의무적으로 복종하도록 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정통교리가 승리를 거두었고,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몰려 영구히 뿌리가 뽑혔다. 그러나 아리우스파가 득세하던 기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는 200년 이상 아리우스파가 존속했다. 또 고트족은 587년까지, 스페인의 수에비족은 560년까지, 반달족은 530년까지, 부르군트족은 534년까지, 롱고바르드족은 6세기 말까지 아리우스주의를 견지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와 정통교리 사이의 차이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381년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통 교회들이 사실상 채택하고 있는 신조가 수립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백년에 걸친 삼위일체 논쟁에서 정통신앙의 확립은 성령의 역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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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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