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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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지난 2월말 미얀마를 선교 연구차 다녀왔다. 평소에 TV화면으로만 쳐다보다가 직접 방문하면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미얀마에 대한 포털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미얀마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해 산 곳은 약 1만 1,000년 전 이라와디 강 중류유역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략 BC 100〜AD 800년경 피우족으로 알려진 일단의 티베트미얀마어계 민족이 이라와디 강 상류유역에 나타났다. 남쪽에는 몬족으로 알려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 민족이 시탕 강 유역에 정착해 타톤에 항구 수도를 세웠다.
수도를 프롬(피에)에 정하고 번영을 누렸던 피우국과 마찬가지로 몬족이 세운 나라도 번영을 누렸다. 9세기 피우의 수도는 중국 남조의 타이산에게로 넘어갔다. 피우에게 지배를 받던 미얀마인들은 티베트미얀마어계 여러 민족들을 장악하고 파간을 그들의 수도로 정했다. 1044년 파간에서 아나우라타가 왕좌에 올라 몇 년 동안에 미얀마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고 최초의 미얀마 제국을 수립했으나 1287년 몽골족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16세기 퉁구 왕조 치하에서 최초로 재통일이 이루어져 1752년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으나 곧이어 다시 몬족의 미얀마 지배가 시작되었다. 미얀마의 저항세력은 민중지도자 알라웅파야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며, 1759년에는 마침내 미얀마 전역을 확보하고 미얀마 최후의 왕조를 건설했다. 알라웅파야 왕국은 인접 국가들을 놀라게 할 만한 팽창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특히 아삼 지방에 대한 미얀마의 야심은 영국과 충돌한 계기가 되었다.
미얀마는 아삼 지방을 점령했으나 2번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1824〜26, 1852)으로 아삼 지방뿐만 아니라 마니푸르·아라칸·테나세림과 페구까지 잃고 말았다. 이어 미얀마의 나머지 지역은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끝나면서 1885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미얀마는 인도의 일개 주(州)로 전락했다. 영국은 불교를 국교로 계속 인정할 것을 거부하여 미얀마인을 분개시켰으며 더욱이 영국의 자유방임 경제정책들은 미얀마 국민 대부분을 소외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일들로 1931년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1937년 영국은 미얀마를 인도에서 분리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일본에 점령당했으며 1948년초까지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62년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사회주의 미얀마를 건설할 목적으로 혁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군 지도자들은 미얀마의 주요기업들을 국영화했으며 미얀마를 외부세계와의 접촉으로부터 고립시키면서 급속한 공업화 정책에 착수했으나 실패했다. 1980년대말까지 정부의 부패와 잘못된 관리정책으로 자원이 풍부한 미얀마는 세계에서 매우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대중의 불만이 1987〜88년 광범위한 반정부 폭동으로 터져나왔으나 군의 폭력 진압으로 실패했다. 그후 미얀마사회주의계획당(MSPP)의 1당독재는 폐지되었고, 여러 정당이 속속 등장했다.
1990년 5월 헌법 개정을 위한 총선에 약 90개의 정당이 참여해 야당인 민주국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새 의회의 의석을 대부분 차지했지만, 1988년부터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부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당선자의 상당수를 투옥시켰다. SLORC가 장악한 국회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NLD의 지도자이며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와 야당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이후 수지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로힝야족과 정부군의 충돌로 최소 96명이 사망했으며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을 향한 정부군의 발포가 이뤄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러한 미얀마에서 2년 동안의 선교에서 엄청난 선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목도하였다. 필자의 제자인 정상진 선교사님은 짧은 기간에 두 개의 교회를 헌당하였고, 하나의 복지관을 설립하여 공사를 하고 있었다. 교회의 장소는 한국의 난지도를 연상하게 만드는 열악한 지역이었다. 하수구와 오물이 섞인 웅덩이 위에 나무를 세워 원두막 같은 집을 짓고 있었다. 필자와 일행들은 그곳을 지나면서 악취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정말 힘든 장소에서 젊음을 불태우고 있는 선교사의 거칠어진 얼굴을 보면서 선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부디 건강을 잃지 말라는 당부 밖에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공항에서 포응을 하면서 해어질 때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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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선교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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