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선생님 같은 전문 시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삶이 너무 치열하고 바빠서 주로 비행기나 차에서 이동 중에 씁니다. 그러다 보니 시 쓰는 고통을 많이 느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본인이 느끼는 시 쓰는 고통에 대해서 토로를 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시의 스승은 자기 자신일 뿐이며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고통입니다. 시작을 위한 메모 과정부터 그것을 시로 옮기고 다시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도 이 시가 과연 얼마나 독자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저도 언제쯤 시 쓰기의 고통에서 해방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시집 한 권을 내기 위해서 1년을 품고 고치고 또 고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때 책을 냅니다. 목사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더 감동시키고 시의 꽃밭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통의 극지를 경험하셔야합니다.” 그러면서 시에 관한 이론적인 강의가 아닌 본인의 실제적인 시 창작 기법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뜻 깊은 강의였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강의였습니다.
강의를 듣고 와서 출간을 준비 중이던 시집 원고를 보니 고칠 것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정해 출판사에 최종 원고를 넘겼습니다. 탈고를 하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시를 쓰기 위해 그 정도의 고통을 겪진 않지만 매주 설교 한 편, 한 편을 준비하면서는 얼마나 온몸의 진액을 짜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그래서 정호승 시인을 다시 만나게 되면 이렇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만큼 시를 쓰기 위해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설교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정말 고통의 극지를 건너고 고독의 강을 건넙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삶과 인격을 통과해서 전달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설교라 해도 설교자의 인격과 영성, 삶의 모습이 묻어있지 않으면 그 설교는 소리만 나는 꽹과리요 허공의 메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매 번 똑같은 설교를 할 수도 없고 끊임없이 새로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교회 목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공적 사역도 하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와 현안에 대한 설교를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고통의 극지를 걷고 또 걸으며 설교를 준비합니다. 아마, 제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설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 수요저녁예배 때 서륜 목사님이 설교 중에 간증한 것처럼, 저는 미국을 가는 비행기나 호텔에서도 계속 설교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제 설교가 방송과 인터넷으로 나가기 때문에 무슨 흠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지 끊임없이 꼼꼼히 수정을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설교 준비를 마치고 나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다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고통의 극지가 기다리고 있고 고독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스럽고 고독한 설교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