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jpg
국어 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바리새파의 유력한 정치가. 예수에게 밤에 몰래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고 예수를 변호하는 데 노력하였다고 한다.”그는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 산헤드린은 행정기관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사법관청이었다. 유대인 중에서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하여 사법적 판결을 내리는 곳이었다. 그 사법적 판결은 오직 율법 해석의 권한을 가진 율법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한번 내려진 판결은 유대인을 영원히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절대적 판결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산헤드린에서의 율법학자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그 당시 평민으로서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었다. 그것은 율법학자가 되어 산헤드린에 진출하는 것이다. 이 신분은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평민으로서 율법학자가 되려면 랍비로부터 모든 전승 자료와 유대인들의 종교적 의무와 사회적 의무를 담고 있는 할라카(에스라 이후 유대 교사들이 전승한 유대교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생활방식)를 통달하게 해야 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종교법과 형법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율법학자가 되어, 이후 40세가 되면 서품을 받아 완전한 율법학자가 되었고, 또한 율법학자단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요아힘 예레미아스).
바리새인이며“유대인의 지도자(또는 산헤드린 공회원)”(『요한복음』3:1)인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 총독의 허락을 받아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을 때에 그 장례를 도왔던 사람이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한복음』19:39,40).
『요한복음』3:1-15에는 니고데모가 예수께 질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질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당시 바리새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이 다 있다고 믿고 있었다(『사도행전』23:8).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랍비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 근거로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들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3:3). 니고데모는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3:5-8).
이를 보면 니고데모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성령’이었던 것 같다. 곧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니. ‘성령’이나 ‘거듭남’의 의미를 이해하였을 리가 만무하다. 초기 기독교가 부흥하게 된 것은 이 성령이 신자들에게 임해서였다. 곧 주님이 성령이 되어 오셔서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로서의 능력을 행하게 하신 것이었다. 니고데모는 삼위일체가 되시는 주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그가 성령임을 몰랐던 데서 오는 무지였다.‘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이들에게 성령이 알게 하여 주는 것이지, 개인이 임의로 알고 싶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기도해야 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백성인가를 묻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하나님의 의대로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그 비밀을 알려 주실 때에 신자가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부귀와 권력보다 더 존귀한 것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되는 것이다. 신랑되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불치병과 불구된 자를 고치시고, 남자만 세어도 오천 명이 되는 무리에게 오병이어의 축복을 내리시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사나운 물결을 잠잠케 하시고, 주님이 몸소 부활하셔서 성령이 되어 오시는 것이 어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오늘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였다 하여도 이와 같은 능력을 발휘한 이는 없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성령이 임하셔서 나에게 주님이 어떻게 임하시는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기독교인의 행복론 - 102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