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1대 독립운동가 박영화, 2대 선교사 박상동, 3대 신학자 박대선, 4대 목회자 박태기 목사

독립운동가의 가문에서 4대 목사가 태어났다. 1대와 2대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옥고를 치루었고, 3대 목사는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한국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한 가정을 탐구한다.

독립운동가 박영화 목사
1대 박영화 목사는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상계교회 장로로 임직했다. 그 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헌신자의 길을 간다.
그가 50세 되던 191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경남 통영의 충무교회 목사로 헌신한다. 충무교회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손안로 선교사가 첫 목회자로 시무하였고, 그후 최상림 전도사 등 3명의 전도사가 시무하다가 박영화 목사가 5대 목회자, 즉 목사로서 처음 부임하여 담임목사가 성례식을 집례하는 감격을 누린다.
박 목사는 1년 시무하다가 신학교 동기인 박영숙 목사에게 교회를 넘기고 귀향하였다가 3·1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아름다운 믿음의 계보를 계승한다.

독립운동가, 선교사 박상동 목사
2대 박상동 목사는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에서 독립운동가였던 박영화(朴永和) 목사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출생지인 의성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이 시절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어린 나이에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고베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오늘의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재학 중 일본에 있는 여러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신학교 졸업 후 곧바로 경북 안동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다. 1925년 7월 전도사로 부임하여 당시 동사목사였던 권찬영 선교사의 협조를 받다가 1926년 9월에 목사안수를 받고 본격적인 목회활동이 시작되었다.
박 목사의 목회방침은 온 교인들에게 오직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강조하였고, 부단한 가정심방을 통해서 교인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교인들의 가정 형편과 이해해 힘쓰면서 신앙적인 성장을 위해 조언했으며, 모든 교인들을 공평하게 포용하여 교인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샀고, 성도들의 안정된 신앙의 기초구축에 크게 기여하였다.
안동교회에서 박 목사 시무 시점에 특기할 사항은 1929년 아동부를 거친 소년층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현재의 중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년회’를 창립하여 신앙활동을 조장하였고, 1928년 9월에는 현재의 본당건물 신축을 위한 기성회 모임을 열어 교회 건축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최초로 하였으며, 그동안 교회학교가 분명한 계선에 의한 지도없이 자치적인 활동을 해오던 것을 교회학교 전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묶어 교역자로서는 최초의 교장이 되었으며, 교회학교 각 부서장은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분담시킴으로써 교회학교 체제를 체계있게 정비하였다.
또 서부교회 전신이며 안동교회의 기도실이었던 ‘안동기도실’의 육성을 위해 전도 강연을 벌였고, 집사·장로들을 주일 및 수요일 밤에 예배인도차 파견하였다. 1926년 안동교회 권찰구역인 동부, 서부구역을 전도구역으로 설정하고 동부전도대장에 김익현 장로, 서부전도대장에 권점필 집사를 임명하여 대대적인 전도활동을 벌였다.

일본에 16개 교회 설립
그 후 조선장감연합회에서 일본의 전도사업을 위해 일본 오사카 중앙신학교 출신인 박 목사를 전도목사로 청빙함에 따라 1928년 8월 28일, 조선예수교연합회로부터 오사카 전도목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한국인 약 30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가 공장의 노동자나 기타 잡역에 종사하는 빈민들이었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를 설립하고 교민들의 가정을 심방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짧은 기간에 교인수는 급증하였고, 박 목사는 목회뿐 아니고 현지 한국인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경시청·노동청을 찾아다니며 한국인의 권익 보호운동에 힘썼다.
이런 활동이 일제당국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사카, 나고야 등지를 중심으로 17년간 선교활동을 성공적으로 벌여 16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박 목사는 1941년 12월 7일 ‘조선독립운동자행(自行)’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어 4년형의 선고를 받고 일본 야마구치(山口)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출옥 후 귀국하여 대구 남산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는데 지병인 직장암으로 1948년 6월 4일 별세하셨다.

번창하는 믿음의 후손들
박 목사는 강직한 성격에 책임감이 특히 강하며 약속한 일은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며, 진실을 생활신조로 목회활동과 자녀교육을 하였다. 그의 가족 관계를 보면 부인 김순이(金順伊)는 박 목사 사후에 서울 사현교회 권사로 시무하다 90세에 별세하였고, 슬하에 9남매를 두었는데 장남 대선(大善)은 신학, 법학, 문학, 인문학 등 4개 부문에 박사학위를 가진 한국교회 대표적 신학자로서 연세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또 차남 대인(大仁)은 경신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새문안교회 장로로 시무하다가 미국에 이민하여 LA 가나안장로교회 장로로 시무하였고, 3남 대위(大衛)는 미국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경제학 박사로서 서강대 경영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소망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또 4남 대걸(大傑)은 롯데상사 기획실장으로 갈보리교회 집사로 시무하였고, 딸 다섯은 모두 출가하여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9남매는 아름다운 신앙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유산으로 물려준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고인의 부부가 안장된 묘비에 이렇게 새겨두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유산을 남긴 것은 없다. 그러나 무엇에 비할수 없는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서 이 비석을 세우는 것이다.”

4대에 이어지는 헌신
신앙의 명문가는 헌신으로 그 역사를 나타낸다. 3대 박대선 목사에게 3남 1녀가 있었는데, 그중 차남 박태기가 목사의 아름다운 가문을 계승하여 4대 목사가 되었다.
박태기 목사는 공학박사로서 KIST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믿음의 후손들은 신앙의 향기를 만방에 퍼치는데 독립운동가의 가정으로 목양의 귀한 사역을 한 이 가정의 소중함을 기억한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9. 독립운동가 박영화 목사 가정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