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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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일과 그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 준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나타나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은 축복 받아야 사는 양, 십자가는 단순한 저주 행위로 인지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십자가 지는 고난에 대한 바른 인식의 차원을 교회가 예배로 의식을 집행 할 때 십자가를 상징하며 신앙고백을 하며 기도. 봉헌. 축복을 위한 행사에 십자가를 기리며 행사를 주관함에 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바르게 믿음의 생활을 가져야 함에 이른다. ‘십자가 지는 신앙’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수세기동안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신앙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에 믿음의 강조를 나타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실제적인 면들을 십자가로 강조하는 그 의미로 신앙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사용해 오다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십자가를 장식용과 의식용으로 계속해서 사용해 왔고 영국 교회는 세례식 때 십자가의 성호를 긋는 관습을 계속해 오고 있음을 보며 또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교회는 모두 교회 상징으로 교회 지붕위해 십자가를 세워 교회의 일면을 보게 함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볼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오늘날의 교회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두고 있지만 옛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자리에 십자가를 지고 그 삶으로 믿음의 생활을 함에 주목한다.
여기서 바울 선생은 당시 그의 신앙 고백하는 십자가 (고전1:22-24)신앙에 대한 그의 믿음의 고백에 주목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이니라”는 바울 선생의 신앙고백에 순결하게 따라가는 살의 이 믿음에 오늘의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지는 삶의 자리로 돌아온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몸으로 오셔서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하늘을 향한 구원의 삶을 위한 스스로의 길을 열어 만인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 삶을 넌지시 보여 주심에 감동한 바울선생의 신앙의 삶의 고백을 오늘에 우리는 터득해야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보여 주심에 대한 큰 사랑이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대 사건이다. 하느님의 속성에는 공의와 사랑이 있는데 하느님은 언제나 공의와 사랑을 같이 취급하시고 동시에 공의와 사랑을 함께 나타내 보이신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가 죄 지은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죄를 치를 분은 오직 한분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뿐이시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모든 사람의 아버지 하느님만이 죄 지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신 자이심을 아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랑의 대 사건은 공의와 사랑이 있는 사람의 아버지 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이 친히 사람의 죄를 담당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버지로서 사랑을 보여 주심에 그 사랑을 나타내 친히 십자가를 지심에 모든 죄 지은 자녀 된 인류는 그 아버지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엿보이게 하심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을 십자가로 열어 보이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고개 숙이고 ‘십자가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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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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