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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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상성공을 목적으로 하던 저는 부자의 대문 앞에 늘어지게 누워서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사는 거지 나사로가 한심했습니다. ‘왜 한번 사는 인생을 나사로는 저렇게 살까?’ 그런데 반전입니다. 둘 다 죽었는데 한심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고 매력 있는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때 더 충격적인 말씀이 또 있었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 보다 나으니라(18:8)” 영생에 못 들어가는 것 보다는 불구가 되는 게 더 낫다니...

도대체 영생이 무엇이고 영원한 불이 무엇이길래 불구와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는가? 저는 고민하다가 본문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성공을 좇던 길에서 돌아서 목회의 길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본문에서 첫째,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고 그곳은 영원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영원한 곳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영원하지 않은 곳이며 둘은 함께 이어져 있었습니다. 영원한 그곳, 천국과 지옥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16:24)”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둘 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기준은 무엇인가? “너는 살았을 때 너의 좋은 것을 받았고 거지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 (16:25)”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육체의 좋은 것을 받아 누리면서 육체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육체가 다 무너져 버리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거지 나사로는 고난 받으면서 살다가 자기의 영혼을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육체에서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었으니 눈을 돌려 영혼을 위해 살았겠지요,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 지는 기준은 이 땅 에서 살면서 육체를 위한 삶인가, ‘영혼을 위한 삶인가로 나누어집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8)”

예수님 믿고도 계속해서 나의 육체를 위하여 사는 삶은 이렇게 말이 안되는 불일치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 믿는 것은 그 삶이 무엇을 위해 사는 가로 증명됩니다. 부자는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잘 살아서 육체의 좋은 것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영원한 세상과 이어지지 않으면 결국 다 헛된 것들이었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인생의 시간들은 하나님 앞에 서니 아무것도 남길 게 없는 삶이었습니다.(고전 3:12~15) 헛된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헛된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게 됩니다.(25:30)

 

우리가 이 땅 에서 살아온 시간들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증명된 시간들로 심판 받게 됩니다. 진리는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퍼즐을 맞추듯이 들어맞아서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한 논리로 주장 합니다. 이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것은 죽음을 생각하고 영생의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를 향하여 사는 시간 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답이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 저는 그렇게도 동의하기 어려웠던 말씀이 진리로 강력하게 드러나니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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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영생과 영원한 불’(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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