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 중세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끼쳐



왈도파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분리파 중에는 카타리파와 함께 ‘왈도파’(Waldenses, 또는 발도파)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이단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교황은 이들에 대해 십자군을 일으켜 진압에 나섰다. 그것을 ‘알비 십자군’이라 한다. 기독교 세계가 사라센족을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십자군을 다른 기독교인을 박멸하기 위해 투입한 것이다. 이단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일이 없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황의 호소에 네 무리의 십자군이 결성되어 프랑스 남부의 이단집단을 향해 진격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전쟁은 30년간 계속되었다.
그 중 남부 프랑스에 널리 퍼져있던 왈도파는 가톨릭교회의 인준을 받기 위해 1179년 제3차 라테란 종교회의에 왈도가 직접 참가하여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3)에게 하나의 전도회로 인정해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그들이 무식하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평신도 전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당시 종교회의에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교황의 사절단이 왈도파에게 ‘성부 하나님을 너희들이 믿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또 ‘성자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네, 믿습니다’라고 했다. ‘성령 하나님을 믿느냐?’ 그들이 또 대답하기를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믿느냐?’ ‘네,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공판정에서는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중세 스콜라신학에서는 ‘믿는다’는 말을 성 삼위일체에만 적용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대화가 있은 후, 사절단은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복음전파를 허용받지 못했고, 이어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Lucius 3)는 그들을 이단으로 파문했다. 이후 왈도파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핍박의 대상이 되어 끔직한 학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왈도파는 이단으로 몰린 중세의 다른 분파들과 달리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하나의 개혁교회 일파로 남아있다.

1. 왈도파는 무엇인가?
왈도파의 창시자는 흔히 프랑스인 피에르 왈도(Pierre Waldo, 1140-1217)로 알려져 있다. 그는 리용에 살았던 부유한 장사꾼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어느날 파티에 참석하는 동안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재산의 관리권을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가난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가난을 실천하고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복음을 설교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리웠는데, 거친 신발을 신고 다녔으므로 신발파(Sandalati)라고도 불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사도들에게 두고 있다.
초기 왈도파는 교리와 신앙상에서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조금도 위반할 생각이 없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찬식과 같이 떡과 잔을 사제들이 축성하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었고, 유아 세례도 실시했다. 그리고 오직 일심으로 성경에서 가르친대로 사도적 삶을 실천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대의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배포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의를 변개할려는 의도도 없었고 분리된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도 없었다. 오로지 복음을 전파하는데 주된 목적을 삼았다. 그리하여 1260년에는 벌써 42개의 교구로 성장했다.
그러나 1380년 대립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s 7)가 종교재판관으로 임명한 수도사를 보내 “이단자들을 척결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왈도파가 누려왔던 평화가 깨어졌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화형을 당하였다. 1400년 겨울에 이르러 핍박이 점점 강도가 높아지자 왈도파의 가족들은 알프스 산맥의 깊은 계곡과 군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피신해 수백년 간을 대대로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았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 사보이 왕가의 통치적인 피에몬테(Piedmont) 산지를 근거지로 삼고 유럽 전역에 핍박을 피해 가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2. 왈도파와 교회 개혁
왈도파는 세 지역에 따라 분류된다. 그것은 프랑스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 이태리 롬바르디의 가난한 사람들, 오스트리아의 왈도파이다. 그리고 이 지역 뿐 아니라 독일과 보헤미아, 스페인 등에도 흩어져 살았다. 그들의 예배는 개인의 가정에서 드리고, ‘바르비’(barbi)라는 순회 설교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로인해 왈도파는 16세기 독일과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제네바 종교개혁파와 접촉해 1532년부터는 가톨릭의 미사를 배제하고 종교개혁 교회와 그 목회형식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그들의 예배는 공개되고 체계가 잡혔으며, 정규 제네바 신앙고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박해를 받는 동안 스스로를 단지 종교개혁 교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운명을 지닌 선민 곧 ‘알프스의 이스라엘’로 자처했다.
이들이 스스로를 부를 때 사용한 이름은 ‘그리스도의 형제들’ 혹은 ‘가난한 이들’이라고 했다.

3. 왈도파의 주장
그러면 왈도파는 무엇을 주장해 그처럼 모진 박해를 받았는가? 그들은 세 가지 원리를 따랐다.
첫째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말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19, 20)는 말로 요약된다. 로마 가톨릭 당국자들은 이것을 교황과 고위성직자들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둘째는 성경말씀을 그들의 지식의 근본으로 삼고, 성경의 권위와 민중을 향한 성경교육에 열중했다. 그 시대 아직까지는 평신도가 성경 읽는 것이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로마 가톨릭은 라틴어로 된 성경만을 인정하고 자국어 번역성경은 부정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게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율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들은 처음부터 성경에만 절대적 권위를 두고, 믿음, 윤리, 예배, 교리에 대한 문제에서 오로지 성경만을 따랐다.
셋째는 복음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가톨릭측은 왈도파가 극악한 이단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음에도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짓 설교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더구나 왈도파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전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여성들은 교회에서 아무런 직분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왈도파에서 중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 평신도들의 권리며 임무로 여겼다.그들은 또 로마교회의 연옥 교리,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면죄부, 성자 숭배, 성상 사용 등을 거부했다. 다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실천이었다.
중세 왈도파의 특징으로는 복음서 특히 산상수훈에 대한 순종, 엄격한 금욕주의, 천년왕국설에 대한 신앙, 사회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이다. 후에 가톨릭교회에서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교회의 통일성만을 중요시한 로마 가톨릭은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모든 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왈도파의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통일성을 강조해온 로마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이단자들이었다. 중세 교회사는 페이지마다 왈도파와 같이 억울한 이단들이 흘린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4. 현대의 왈도파
왈도파는 1848년 사보이 가문의 알베르 왕이 공포한 해방법령에 의해 자유를 얻기까지 300년동안 박해, 추방, 귀환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왈도파의 신앙과 사상은 앵글로색슨 복음주의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수백년 견지해온 프랑스 방언을 포기하고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다. 1855년에는 피렌체에 최초의 신학교를 세우고, 그 후 로마에도 신학교를 세웠다. 이 신학교에서 이탈리아어 성경을 번역해 이탈리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제공했다. 이탈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왈도파 정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 고아원, 양로원, 병원, 출판사 등을 운영하며 사회적 활동에 나서고 있다.
왈도파는 1848년 마침내 활동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오늘날 왈도파는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
현재 왈도파 교회는 제네바 에큐메니칼협의회(ECG)와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회원이기도 하다. WARC는 장로교 정치체제를 가진 세계교회의 연합체이다. 참고로 한국교회는 예장통합측과 기장이 WARC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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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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