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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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에 정의가 없고, 미래당에 미래가 없고, 민주당에 민주가 없으며, 한국당에 한국이 없다. 이것이 슬픈 한국 정치의 현실이고, 불안한 미래의 주소이다. 어쩌다가 우리 정치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찬찬히 뒤돌아보아도 국민은 속았다는 배신감과 어쩔 수 없다는 좌절감, 그래도 희망을 찾으려면 뭉쳐야 한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현실이다.
스스로 폐족이라 일컬었던 정치세력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를 통해 뼈저리게 반성하고 절치부심했어야 할 그들이 그런 신선한 노력과 외신상담의 자기 단련을 포기하고 이미 얻은 정치적 기반과 네트웍으로 그 어느 세대와 계층보다 깊고 넓게 그들만의 세계를 건설하고 이를 민주와 정의 그리고 인권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선전하며 국민을 속였다.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그들의 대척점에 있었던 안이한 보수세력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필두로 적폐 세력으로 몰려 사이비 좌파 진보 세력들이 만들어낸 촛불에 의해 처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진상이 최근 조국 사태를 통해 서서히 그 추한 내막의 윤곽이 드러내고 있다. 우리 정치가 절망적이라는 두려움은 특권층 카르텔의 제일 꼭대기를 이루고 있는 운동권 출신 귀족들의 호의호식과 편법, 탈법, 무법의 전횡을 발견하면서 부터이다. 이것은 좌우 이념의 문제도 아니며 더 나아가 미래적 가치의 문제도 아니다. 그릇된 운동권 세력의 타락상이며, 자신들의 투쟁 결과를 탐욕에 물든 계급과 신분의 상승과 독점 그리고 부와 권력의 대물림, 그리고 그들만의 불가침의 영역을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가장 치열한 반미투쟁가였으나 자녀들은 그곳에서 유학을 했고, 특목고 폐단에 치열했으나 자녀들은 그 학교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조국 장관의 정신세계를 의심하고 있다. 사태가 이럼에도 여전히 조국을 감싸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장관이 서로 껴안아야만 하는 어떠한 공동체 형성의 가능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무서운 가정이며 상상이다. 이 공동체가 깨어지면 정권의 내일을 가늠할 수 없다고 가정할 때, 민의를 무시하고 억압해야만 하는 정권의 비극적 결말을 역사 속에서 경험에 왔다. 불가능함에도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의식이 작동할 때 정권은 추락의 끝을 모르고 달리게 마련이다. 멈추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조폭이 자해를 하는 이유는 저항 불가능한 상태에서의 최후의 저항이다. 쿠데타 세력이 내부적 지지를 받지 못하면 국민을 위협하는 국제적 사태를 유발한다. 이 모두가 성공할 수 없지만 밀리는 끝이라는 인식이 이런 극단적인 대응을 불러온다. 불안하지만 지금 이 정권의 응전 방식이 너무도 이와 같아 아마추어적이고 조폭적인 극단적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정권이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윤석열 검찰이 이번 조국 일가의 범죄 수사와 이와 관련된 사건 수사를 돕는 일이다. 그래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일벌백계하고 국민에세 사죄하며 재기를 다짐하면 그래도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물타기에 우기기, 새로운 사건으로 세인의 이목을 돌리고, 나아가 윤석열 총장의 개인적 비리를 캐거나 다룸으로 그의 발목을 잡으려는 시도 등은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올 뿐이다. 윤석렬은 자신을 향한 한겨레 보도에 대하여 “건설업자 별장에 놀러 다닐 정도로 대충 살지 않았다"는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적어도 지금 국민은 그를 신뢰하고 있다.
작금의 정부 여당의 대응과 처신은 정말 초라하고 없어 보인다. 고작 10만명에 모자라는 인원을 모아놓고 200만명이라고 우기며 청와대부터 말단 당료에 이르기까지 흥분한 척하다가 그들의 숫자를 훨씬 능가하는 보수세력의 집회에는 애써 눈을 돌리는 모습이 안쓰러울 뿐이다. 그렇게도 자신이 없고, 무능하고 초라한가?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가슴시리도록 감격적이었던 그 출발이었기에 지금 이 정부가 그 만큼 싫고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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