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그리스도교 분파 이야기/강 춘 오 목사(발행인) -18
2019/10/17 14:3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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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대의제<代議制>로 운영되는 개혁교회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바탕한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신학 체계



장로교
(Presbyterian)

장로교는 중세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개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과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 1519-1605)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 1513-1572)가 이루어낸 개혁교회이다. 그 중심사상은 요한 칼빈의 신학사상이다.

제네바의 요한 칼빈
칼빈은 프랑스 피카디주 노용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소송대리인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귀족사회에서 양육받아 귀족계급의 예의범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부친의 소원을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사제가 되지는 못했다. 이유는 그의 부친이 노용의 주교와 다툰 일로 칼빈의 신학수업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신학수업을 중단한 칼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인 1528년부터 그의 부친이 죽은 1531년까지 다시 법학을 공부해 오르레앙 대학에서 1533년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부친이 죽고 난 후 프랑스 대학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등을 공부하고, 1532년 세네카 주석서를 출판했다. 그 이후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했는데, 그 때부터 그의 관심은 종교문제로 집중되었다.

개혁파 운동에 가담한 칼빈
칼빈이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은, 첫째는 1533년 11월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 대학의 학장에  취임하며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문이 개혁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어서 로마교회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연설문의 작성자가 칼빈으로 알려진 것이다.
로마교회는 콥을 최고법원에 제소하고 소환하여 이단으로 판결을 내렸다. 그로인해 칼빈 역시 콥과 함께 추방 선고를 받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혁활동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수백명의 개혁파인 위그노 교도들이 투옥되었고, 이 중 35명은 화형당했다. 그 중에 칼빈의 동생도 한명 포함되어 있었다.
둘째는 1535년 1월 칼빈은 친구 두 틸레(Du Tillet)와 함께 스트라스부르그를 거쳐 스위스 바젤까지 도주한 일이다. 그는 바젤에서 콥을 다시 만나 우정을 나누며, 조국에 남아 있는 개혁파 교도들을 변호할 목적으로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다. 1535년 8월 그의 나이 26세 때에 탈고되어 이듬해 3월에 출간된 기독교강요는 칼빈을 개혁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시켰다.

칼빈의 제네바 방문
얼마 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조용히 집필활동을 하며 지내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1536년 6월경) 마침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었다. 이에 칼빈은 남쪽으로 우회하여 가는 길에 제네바를 들렀다.  
당시 가톨릭 도시였던 제네바는 1532년 10월 파렐이 한 교회 강단을 얻어 설교함으로서 종교개혁을 찬성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하여 1536년 7월 국민회의는 투표로서 개혁을 지지했고, 그해 8월8일 독립시로 완전한 탈바꿈하였다.
그럴때에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파렐이 칼빈을 개혁운동에 동참시켰다.
칼빈은 파렐과 함께 개혁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해 제네바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등을 만들고 불성실한 회원들을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금지시키고,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칼빈의 강경한 태도를 못마땅히 여겨온 시의회의 리버럴파(반성직자파)의 공격으로 칼빈 자신이 파렐과 함께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가 1538년 5월이었다.
개혁자들을 축출한 제네바는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도덕성을 잃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다. 개혁자들을 추방한 4명의 장관은 2년이 채 가기도 전에 모두 재난을 당했다. 이로인한 제네바의 혼란은 이 작은 공화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리하여 제네바는 1541년 칼빈을 다시 불러들여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개혁자들을 비방하는 그들 리버럴들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대표적 신학은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이다. 이는 인간은 영적으로 무능력하고 전적으로 타락해 죄인이 되어 사망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절대주권으로 조건없이 부르신다는 것이다. 셋째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이다. 하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넷째는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 은혜로 선택된 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다. 이는 한번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는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이다.

장로교회의 행정조직을 만든 존 낙스
오늘날과 같은 장로교회의 행정조직을 만든 개혁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존 낙스이다. 스코틀랜드에는 1527년 패트릭 하밀톤(Patric Hamilton)이 루터의 종교개혁지 독일의 비텐베르그를 방문하고 마르부르크에서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대감독 비튼(Beaton)은 그를 회의에 초대한 후 이단 혐의를 씌어 1528년 화형시켰다. 하밀톤의 죽음은 나라 전역에 걸쳐 변화를 촉진시켰다.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하밀톤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여 개혁운동이 서서히 확대되어 갔다. 사태는 점차 심각해져 1534년과 1540년에도 이단 처형이 이루어졌다.
하밀톤이 죽은 후 스코틀랜드는 조지 워셔트(George Wishart)의 설교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쯔빙글리를 지지한 조지 워셔트도 1546년 비튼 추기경의 음모에 걸려 이단으로 몰려 하밀톤이 죽은 그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이 뻔뻔스러운 살인행위에 국민들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두어달 후에 비튼 추기경은 친불정책(親佛政策)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비튼의 시체는 성 앤드류성 창밖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비튼의 살해자들은 성 앤드류성을 점령하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을 위한 설교자 중에 가톨릭 사제 출신 존 낙스가 있었다. 낙스는 워셔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이다.

낙스는 프랑스 함대에 포로로 잡혀 갤리선의 노예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친불파로 구성되어 가톨릭을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정부는 비튼 추기경을 죽인 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성 앤드류성을 탈환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군대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1547년 프랑스 함대에 의해 성 앤드류성이 함락되고 붙잡힌 사람들은 갤리선의 노예로 끌려갔다. 거기에 그 성에서 설교하던 존 낙스도 있었다.
낙스는 19개월 후 영국왕 에드워드 6세의 요청에 의해 포로교환 형식으로 갤리선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났다. 1549년 4월 노예생활에서 풀려난 낙스가 가톨릭 일색으로 변해버린 스코틀랜드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향후 5년동안 영국에서 살았다. 영국은 그때 종교개혁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낙스는 지방의 변경요새에서 개혁신앙을 설교했다. 그후 그는 1551년 대주교 크랜머에 의해 왕실 전속목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왕 앞에서 설교할 뿐만 아니라, 정규 성직자가 부족한 지방으로 다니며 종교개혁의 원리와 목적을 전파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메리 투터가 왕위에 취임하자 영국은 다시 가톨릭으로 몰아갔다. 낙스는 영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낙스는 프랑크푸르트와 제네바 등지를 떠돌며 종교개혁 동지들을 만나 제네바에서 칼빈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다.

최초의 장로교회 탄생
스코틀랜드 교회는 1560년 12월에 제1차 총회를 소집하고 이듬해 1월에는 제1차 교회헌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각 교회에는  목사와 장로들이 회중의 동의를 얻어 직책을 수행하고, 목사와 장로들이 한 치리기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후에 ‘당회’(session)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역별로는 ‘노회’(presbyteries)가 있고, 노회들 위에는 ‘대회들’(synods)이 있었고, 그리고 그 위에 ‘총회’(general assembly)가 있었다. 오늘날의 장로교의 정치체제 그대로이다.
만국 장로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한 웨스트민스터 대·소 요리문답과 33개 조로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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