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을 따라 남산 타워 쪽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왼쪽에 작은 갈대밭이 있었습니다. 지형적으로 보면 갈대밭은 더 이상 확장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심한 바람을 맞았는지 벌써부터 대부분의 갈대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아, 사람만 고달픈 삶을 사는 것이 아니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상처 받으며 겨울을 맞고 있구나. 그리고 겨울이 오면 모두가 앙상한 공허만을 남기고 말 거야.”
제 인생도 돌이켜보니 꽤 오랜 시간을 걸어왔던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걸어갈 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짧음을 느꼈습니다. 남산의 가을 길을 걷는 것이 이렇게 좋은데, ”나는 내년에도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남산 정상에 도착하자 벌써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계속 걷고 싶었습니다. 정말 배가 고파서 못 걸을 때까지 밤이 맞도록 걷고 또 걷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그런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더 이상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 없을 만큼 끝없이 걷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정진홍님은 47일 동안 900킬로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 환상적인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말입니다. 그러나 저 같은 형편에서 어떻게 47일 동안이나 걷는 여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단 하루라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깊은 산길을 걷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 식사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산을 내려오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남산 길을 걷는 것과는 다른 길,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까지도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남들이 걷지 않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온 것입니다. 정진홍님도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길, 사명의 길은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함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혼자 걸어가는 것이죠.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믿음과 사명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도 결국 혼자 걸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 뒷산을 갈 때도 혼자 가는 길을 연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