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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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기념 주간이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31일 비텐버그 교회의 담벼락에 면죄부의 타당성에 대한 95개항의 신학적 토론을 제의하는 대자보를 붙인 날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교회 개혁의 물결이 온 세상을 덮치게 되었고, 개신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한국처럼 개혁을 외치는 나라는 없을 것이고, 또한 아무리 외쳐도 개혁이 안 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어느 부분에도 개혁이 요구되지 않는 분야가 없는, 총체적인 개혁이 요구되는 사회이다. 그러나 요사이는 종교개혁이라는 말처럼 부담스러운 말이 없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개혁을 외치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개혁이라는 말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의 양심이다. 따라서 사회가 개혁되려면 먼저 종교, 특히 기독교부터 개혁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썩으면 사회가 썩는다. 전 세계의 문화 문명은 기독교의 사상과 철학, 윤리와 도덕의 기초와 틀 위에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 구실을 못하면 기독교가 오히려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게 되며, 기독교가 무너지고, 그 틀이 깨어지면 세계는 붕궤되고 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 본질상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며 인류의 갈 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주장이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The Church must always be reformed). 이 주장은 1674년, 네델란드, 암스텔담의 야곱 반 로덴스타인이 처음 주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는 개혁된 상태로만 항상 있어도 안 되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가 개혁이라는 말을 마치 이미 완성된 개혁을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시초부터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완의 종교개혁”을 마치 “완성된 종교개혁”처럼 생각하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만인 제사장”론을 주창하였다. 카톨릭의 제사제도가 성경적이 아님을 밝혀내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고 가르치고 주장했다. 위대한 발견이요, 교회를 개혁하는 핵심적 기치가 되었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가졌던 제사장직은 아담의 타락으로 그 본래적 기능을 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대신한 언약적 연대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그와 함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간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제사장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나라이다”라고 가르치며(벧전 1:9), 요한도 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곧 그분의 아버지를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고 가르친다(1:6; 5:10).
그러나 에던 동산의 아담은 제사장직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왕직도 있었고 선지자직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사람을 그를 대신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그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왕으로서의 사명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지자적 직분도 주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그 말씀을 해석해 주고, 그 말씀을 적용하여 순종하며 살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이다.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는 것이 왕으로서의 하는 일이라면, 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바르게 대언하고,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것이 선지자로서의 일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고, 바로 해석하지도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그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왕이요, 새로운 선지자로 오시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언약적 연대성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한 왕,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한 선지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주중의 주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가르치셨다. 세상나라의 왕들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착취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들은 낮아져서 백성을 섬기는 왕이 되라는 것이었다(막 10:45).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버리고, 세상 나라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양떼들을 짓밟고, 핍박하고, 착취하는 세상이 되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속의 권세를 탐하며,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류를 따라가기에 바쁘신 몸이 되어, 종교개혁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여전히 미완의 개혁이고 계속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로서 직분은 종교 개혁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을 입으로 잠간 언급했을 뿐 별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만인 제사장”이라는 직분과 더불어 “만인 선지자”라는 직분도 있어야 하는 데 만인 선지자라는 말은 낯설기만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아담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다스려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한 선지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아담의 실패를 바로잡는 대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노아의 후손, 아브라함을 불러 그를 선택하신 목적을 밝히시며 그의 후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라는 선지자적 사명을 맡기신다(창 18:18-19). 그리고 그를 성경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선지자”로 부르신다(창 19:7).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70인의 장로들을 선택하여 이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영을 주어 예언하게 하신 것도 400년 동안 바로의 노예로 살면서 몸에 배인 노예근성을 뽑아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는 선지자로 부르신 것이며, 이때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민 11:29)는 원대한 세계적인 뜻을 밝히신다.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종말의 뜻이다. 만인이 선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하나님을 알라고 전도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시겠다는 새 언약을 주신다(렘 31: 31-34). 요엘에게도 종말에 모든 백성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시어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요엘 2:28-29). 결국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대선지자로 오신 예수께서는 직접 말씀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다 (막 1:38).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처럼 그의 영을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성령세례를 통하여 선지자로 인치시고, 전 세계의 선지자로 내 보내셨다(마 28:16-20).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선지자 예수님처럼 선지자로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나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온 우주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적고 있다(막16:15). 만인을 선지자로 세워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전쟁이 없고, 원수 맺는 것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사 11:1-9). 그래서 종교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인 제사장” 뿐만 아니라 “만인 선지자”가 되게 하여 만인의 가슴 속에 말씀 새기는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500년 동안 교회는 이신칭의, 만인 구원, 만인 제사장 등의 구호에 매달려 정작 만인 선지자의 하나님의 비전은 강조하지 못하였다. 미완의 종교개혁을 붙들고 교회 개혁만 부르짖은 셈이다. 물론 칼빈이나 투터, 쯔잉글리 같은 분들은 당대에 선지자로서의 성경해석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종교개혁의 이론을 정립시킨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또한 이들의 선지자적 활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했다. 그러나 성도들의 “만인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 사명을 교회에 정착하게 하지는 못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평신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해왔다. 그러나 누구든지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선지자로서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대선지자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명령이다.
물세례는 제자들을 선지자로 세우는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의식이다. 물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 들어가 대선지자 그리스도와 함께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대언하고,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말씀을 바로 적용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선지자적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 세례를 받고, 선지자로서 인치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다. 기독교의 종교개혁은 이제 “만인 선지자”의 기치를 들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치는 곳에 성령은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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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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