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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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레 19:1)고 요구하신다. 성도들의 거룩함, 곧 성결은 신구약성경 윤리의 핵심이다. 성도들의 금식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의 성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 58:6은 한국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사랑하는 말씀이다. 일부의 설교자나 성경 선생들은 경건 생활이나 병 고침을 위하여 금식을 권하며,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암송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길을 찾고, 알기를 기뻐하며, 의로운 법도를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다. 아주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행하며, 하나님의 법도를 버리지 않는 자처럼 살았다. 그리고 이들은 변함없이 주기적으로 금식하였다. 금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주 일상적으로 하는 종교 활동의 일부였다. 금식을 함으로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여 보다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경건의 방법으로 금식을 한 것이다. 히브리어 “촘” 혹은 “춤” 이라는 말은 사람이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람이 금식할 때는 보통 삼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얹고, 울거나 애곡을 했다(더 4:16). 금식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금식이었다. 금식이야 말로 이스라앨 사람들이 자기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무랄 데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돌아보시지 않았다.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고, 이들을 알아주시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그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이다.
“우리가 금식하나 어찌하여 주께서 보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나 어    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시지 않으십니까?
이것을  8절과 연계해서 보면 아마도 병든 자가 금식하며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자 토해내는 불평 같기도 하다.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이들은 금식하면서도 자기의 쾌락을 구하며, 자기 일꾼들은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3). 금식을 한답시고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고 앉아 있으면서 다투고 싸우고 악한 주먹으로 치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행위는 위선이며, 금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여호와께서는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뻐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4). 이들은 신앙적이고, 경건한 체 하지만 그들은 무자비한 위선자요, 자기중심적인 형식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의 쾌락을 구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금식을 통하여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식을 통하여 자기의 쾌락을 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경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증스러운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금식이냐?”
그런데 이 성경 구절이 우리 한글 역본에서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냐?”(5)로 번역하고 있다. 6절에도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마소라 사본은 기뻐하다는 말이 아니라 “선택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하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모든 영역본은 "the fast that I choose"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 ESV. NIV. NASB. RSV. JPS 등 거의 모든 영역본은 마소라 사본에 따라 “내가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오로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번역한 TNK 만 “내가 바라는 금식”(the fast I desir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어 성경도 “선택한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글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최근에 번역된 거의 모든 성경이 한결같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금식을 장려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오역이다. 개역 성경 오역의 한 구절이 한국 성도들의 신학과 신앙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려 성경 번역자들에게까지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금식을 장려하는 자들의 주장은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하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하시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금식 기도원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인들처럼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고, 한국처럼 금식 기도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왜 금식을 선택사항으로 말씀하셨을까? 금식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성별된 경건생활 중의 하나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삶이란 금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4절에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금식이냐?”고 물으시는 질문은 “아닙니다”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고, 5절에는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와 같다”라고 참다운 금식이 어떤 것인 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5절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금식은...”이라고 말문을 여신다.
“불의의 사슬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스는 것이 아니겠느냐?” (6) 고 말씀하신다. “또 굶주린 자와 네 음식을 나누며,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을 집에 데려오고, 네가 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 그를 입혀주며, 네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7)
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는 참다운 경건 생활, 즉 진정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만족해하시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경건 생활은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먹는 것이다. 굶주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압제받고 핍박 받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자기는 금식한답시고 일꾼들은 부려먹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 함께 먹고, 헐벗은 자와 함께 나누고,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여 화평을 도모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이다. 안 먹고, 안 하고, 슬퍼하고, 자신을 학대하며 위선을 부리는 형식적인 생할과 행동이 경건이 아니다. 자기의 비뚤어진 의, 자기 과시성 위선과 형식적인 봉사 활동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 후반부 8-14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선택하신 참 금식, 곧 참 경건이 어떤 것인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상급이 어떤 것인가를 열거하고 있다.
8절에는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다”고 했다. 참 금식, 곧 사랑과 희생과 공의와 생명을 살리는 헌신의 빛이 마치 어둠 가운데 찬란하게 비추는 새벽별처럼 비칠 것이라는 것이다. 10절에는 이들의 “네 빛이 흑암 속에 나타나 네 어둠이 대낮같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뒤에서 호위해주신다고 했다.
9절에는 이러한 희생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네가 부르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겠고, 네가 부르짖으면 그때에 그분께서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금식기도를 해도 안 들어 준다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금식기도보다는 구체적인 의롭고 선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음성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네 치료가 신속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위선적인 금식을 배제하시는 말씀이다.
11절에는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마치 물댄 동산같이 되며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피패하고 메마른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는 행동하는 성도들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황폐한 곳을 재건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무너진 곳을 다시 쌓는자” 혹은 “길을 복구하는 자”라고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무지, 광야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되살리고 재건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13-14절은 특히 안식일에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지 않고, 여호와의 거룩한 날을 존귀하게 여기고 여호와를 즐기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히 대하시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금식이라는 자기를 들어내기 위한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경건 생활보다는 오히려 먹으며, 하나님의 도를 행하며,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배려하고, 살리며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금식, 경건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하기 위하여 경건생활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금식은 자기를 들어내고, 자랑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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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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