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부활, 악에 대한 선의 승리(고전 15:21-22)

2020년 부활절을 맞는다. 올해의 부활절은 다른 어느 때보다 부활의 의미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전염병이 하늘과 땅과 바다의 길을 막고, 사람들의 목을 죄고 있다. 가정집 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학교, 병원, 공공건물, 심지어 교회의 문도 닫혀있는 상태이다. 죽음의 권세 아래 갇혀있다. 이태리의 한 화장장 앞에 시신을 화장하기 위하여 즐비하게 늘어놓은 관들을 보니 소름이 끼친다. 마침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위로와 힘과 소망을 얻으면 좋겠다.
부활의 전제는 죽음이다. 바울은 고전 15:22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살게 된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는 말은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를 그가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다(시 8:5-6). 이로써 하나님은 대왕이 되시고, 사람은 왕이 되고, 만물은 그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가 이루어지고, 사람과 만물은 이 틀 안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질서 있는 세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그러나 만물의 왕,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여 죽음을 초래함으로 아담과의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고 아담과 함께 죽음의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이고 벌이다. 값을 치러야 할 범죄이고, 죽어야 값을 치룰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여기서 “좋았다”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토브”()라는 “좋았다”(good)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즐겁다, 선하다는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선하다”는 의미로 쓰여진 경우가 많은 데, 이때는 악하다는 말과 대치되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이다. 악이란 생명을 죽이고 멸하는 것이나 선은 생명을 불어 넣고 살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물으신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목숨을 구하는 것을 선으로, 목숨을 죽이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생명이 약동하는 세상을 바로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시기에 선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어넣은 아름답고 선한 이 동산에 사탄이 들어와 뱀을 사주하여 죽이는 일을 한 것이다. 악의 씨를 뿌리고,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온 세상과 그 세상을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빠져들어 가버린 것이다. 악의 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던 이 세상을 계속 사단의 세력에 방치해 놓을 수는 없어 이들을 구원하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문제는 아담이었다. 모든 만물의 왕으로 세움 받은 왕, 아담의 대왕에 대한 불복종의 범죄가 문제였다. 그래서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이다. 그 새로운 왕이 아담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고, 그 새로운 왕을 통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세상을 해방시키고, 새 아담, 새로운 왕의 통치권 아래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대하여 바울은 롬 5:14에서 “아담을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언약적 연대성의 우두머리,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죽게 되는 이 원리가 모형(type)이고, 새언약의 우두머리 새 아담,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원리가 실형(antitype)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왕을 창 3:15에 언급하신다. “여자의 후손”이다. 여자의 후손은 누가 될 것인가? 그는 뱀을 사주한 사단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영적 존재이자, 여자에게서 낳은 사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신성과 인성을 겸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담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죽고, 부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부활이 바로 그가 죄 값을 온전히 치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부활을 해야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켜, 그와의 새로운 연대성 가운데 새 생명을 얻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천지를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지, 사탄과 악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악은 망하고,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새 아담으로서의 모든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왕으로, 새 언약의 우두머리로, 새 생명의 창조주로, 새 역사의 창시자로 오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새로운 왕이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만 하면,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그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그와의 연대성 안에 들어가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 생명을 가진 자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우리에게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새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이 생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100세 인생을 설계해서는 안 되고, 영원을 향한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둘째는 부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생명을 살리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그러나 사단 마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단을 반드시 벌하시고 멸하시는 분이시다. 그의 아들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으셨다거나 살리시지 못하셨다면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퍼부으셨다(창 3:14). 그리고 그의 아들을 살리시고, 이 세상은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비록 오늘 선한 일을 하다가 멸시 당하고  환난과 핍박을 받으며, 심지어 억울한 죽음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인생을 비루하게 살지 않는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부활신앙은 오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내가 승리할 것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이다. 이 세상은 불의와 부정과 불공평한 악이 절대로 승리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자로서, 역사를 주관하시며(control), 선하신 분(good) 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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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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