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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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학생들 사이에는 서열이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세면 유리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격투기 실력에다 용기가 있어 기선제압을 잘하면 높은 서열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녔던 저는 착각일수도 있지만, 유순한 편이었고 용기마저 없어 누가 싸움을 걸어오면 당하는 편이었습니다.

 

동네에 일 년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형은 키도 크고, 공부도 상급학년에서 제일 잘했을 뿐 아니라, 운동이면 운동, 음악이면 음악, 미술, 생활 또한 모범적이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면 그 형의 사례를 들어서 말 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그 형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말게 줄게.” ‘말게 준다.’는 말은 갑이 을을 해하려 하는 사람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의 지역사투리입니다. 이런 약속은 강자가 약자에게 어떤 유익을 전제로 흔히 했던 계약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정말 성실히 지켜졌습니다. 그가 보는데서 누가 시비를 걸거나, 제가 부를 때면 달려와서 절 지켜주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2년은 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형이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이제부터 널 말게 주는 것 없다. 이런 약속은 대부분 오래 못 가지만 난 2년 동안 이 약속을 지켰다.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널 지켜.”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약속들은 종종하지만 그 형의 말대로 대개 한 달도 못 되어 파괴되는 공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형의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갔기에 다시는 형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보호 약속은 길어야 몇 년이고 완전하지도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저주를 자처하는 길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17:5-6). 사람을 믿고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게 된다는 모순 같은 진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나운 환경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혈육은 타인도 해당되지만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뢰하고 살아가면 역시 저주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17:7-8). 이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은사를 부여받습니다.

 

43:2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물은 세상이 주는 유혹을 의미하고, 불은 정욕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신앙인들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예배시간이나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말씀을 만난다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면 주님 또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본문말씀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입니다(10:29). 버린다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5:7).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8:29). 기뻐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곳에 기쁨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것이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와 항상 함께 계시며 그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 욕먹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을 때,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 받으십니다. 고난은 빛을 받은 사람이 참예할 수 있고, 주님은 신자들이 환난을 당할 때, 시련 가운데 있을 때 분명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영원불변한 약속입니다. 이런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사귐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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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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