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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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최초 연합기관이자, 교계 연합의 상징과도 같았던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이하 교회협)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70~80년대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불의한 군부독재에 맞서 맹렬히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했던 교회협이었지만, 지금은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사회 다수의 비난을 마주하고 있다. 진실과 정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NCCK(교회협)의 몰락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우려해야 할까? 단순한 연합기관을 넘어 한국교회의 역사와도 같은 교회협의 현 위기는 결코 교계 입장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한국교회를 굳이 보수와 진보로 양분하자면, 그 비율은 80:20, 혹은 그 이상일 것이다. 성경의 교리 자체가 현 사회에 비추어 다소 보수적이고, 한국에 들어온 신학 자체가 보수개혁 신학이 대부분이었기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 교회협이 진보의 아이콘이 되어, 대다수의 보수 교계와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 매우 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교회협 자체가 진보라는 설정은 엄밀히 옳다고 보기 어렵다. 보수신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한국교회에서 최초의 연합기관이 진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 순간 교회협은 한국교회의 진보가 됐다. 현재 교회협이 처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어째서 교회협이 진보가 됐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정의에서 진보

교회협이 곧 진보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것은 위에서 언급한 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0년대 초중반 조선의 왕조가 무너지고, 우리사회는 민주주의를 일으켰지만, 여전히 국민이 주인되는 평등한 세상은 경험하기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오랜 독재와 전두환 대통령의 군부 장악 등 불안의 연속이었고, 그릇된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우리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독재였고, 부정이었다.

 

70~80년대는 우리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전 국민이 몸을 내던진 시기다.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고, 더 이상 권력이 국민의 위에 설 수 없음을 증명하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기관이 바로 교회협이다. 교회협은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서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국민들을 대변했다.

 

당시 교회협은 불의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했다. 거대한 권력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고, 미래를 보장하는 솔깃한 회유를 과감히 뿌리쳤다. 그것이 교회협이었다. 하지만 주류 권력에 맞선 교회협에게는 진보라는 이미지가 생긴다. 당시 사회는 기존 권력을 보수로 그에 반하던 민주화 세력이 진보로 구분되던 시기였기에, 교회협은 자연스레 진보의 거대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는 80년대 말 한기총의 탄생과 함께 완전히 굳어진다. 한기총은 보수 기독교를, 교회협은 진보 기독교를 대변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이념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교회협이 권력에 맞섰던 이유다. 교회협은 진보이기에 보수 권력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수호하는 기독교로서의 부당한 권력에 맞서 정의를 실천한 것이다. ‘진보라는 이념은 교회협의 목적과 관계없고, 스스로 택한 적도 없다. 오히려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는 기독교 기관이 특정한 이념을 택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비난받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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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함몰된 교회협, 모순에 빠진 정의

하지만 교회협은 이후 스스로 진보에 함몰되는 오류를 범한다. 이는 위에서 말한 한기총의 탄생, 이후 대립 구도에서 더욱 극명해진다. 이러한 변화가 위험한 것은 세상을 불의와 정의로 구분했던 교회협의 시각에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이념이 덧씌워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생겨났고, 진보를 무조건 옳게 만들기 위한 무모한 합리화가 잇달았다. 교회협의 몰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와중에 열린 WCC 부산총회는 교회협과 한기총 구도의 진보-보수 충돌이 정점을 이룬 사건이다. WCC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당시 교회협의 대처는 매우 잘못됐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교회협은 당시 주요 보수교단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일어난 반WCC 운동을 사실상 무시했다. 보수 기독교와 제대로 된 대화도 한 적이 없으며, 그나마 요식적으로 열었던 몇 차례의 WCC 신학 토론은 그저 찬성측의 입장만을 대변했을 뿐이다. 엘리트주의가 가득찬 교회협은 WCC를 강렬히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를 무지의 소치로 깔봤던 것이다.

 

이 당시에 정점을 이룬 교회협의 엘리트주의는 매 사안마다 절대 다수의 보수 교계를 상대하면서도 스스로를 정당화 하는 기반이 된다. 역사교과서, 종교인 과세, 동성애 문제 등 기독교의 입장이 분명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을 놓고도, 교계와 반대의 길을 택했다.

 

오늘날 포괄적차별금지법은 이러한 오만의 연장선에 있는 사건이다. 교회협은 올 초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이후 한국교회 중 거의 유일하게 이를 찬성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대다수의 보수교계를 근본주의 집단으로 매도하는 우를 범했다.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성경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안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진보라는 스스로의 이념에 함몰되어 찬성을 택하고, 여기에 자신들만 옳다는 오만까지 겹치며, 그야말로 막장으로 치달은 것이다.

 

더 살펴봐야 할 것은 교회협을 구성하는 회원교단 중 절대 비율을 차지하는 예장통합과 감리교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갖는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전체적 여론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통합과 기감을 제외한다면, 결코 교회협이 가질 수 있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교회협의 대표성을 가능케 하는 두 교단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 정작 교회협이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이를 놓고 회원교단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결과라고 하지만,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예민한 주제를 단순히 다양성이라는 명목으로만 접근하다보면 보편성이라는 기본적 가치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민주화 투쟁 당시 교회협은 분명 국민의 편에 선 하나님의 정의였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교계 단체들이 그렇듯 진영논리에 갇힌 정치 집단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현 정권의 부당한 권력에는 절대 침묵

교회협이 정치 집단화 되어가며, 드러난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정의가 실종됐다는 것이다. 과거 국가의 부당한 권력에 거세게 맞섰던 꼿꼿했던 정의는 지금, 자신들이 택한 권력에 기생하려 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박근혜 정권 당시,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쏟아내고, 비난을 가했던 교회협이 이번 정권에는 유난히 침묵하고 있다. 현 문재인 정권을 비난하고, 국민들의 목소리가 광화문에 총집결했을 때도 교회협은 침묵했고, 코로나 방역통제 등 불평등한 기독교정책에 한국교회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는 지금도 교회협은 입을 닫고 있다. 애초 관변 성향으로 탄생한 한기총이 그러하다면, 차라리 그러려니 하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주도하고, 교회와 국민의 희망으로 자리했던 교회협은 적어도 그러면 안되지 않나?

 

주요 보수교계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고 있는 반교회협 운동이나 교회협 해체 요구는 분명 옳지 않다. 교회협이 잘못된게 아니다. 현재 교회협을 운영하는 이들이 잘못됐을 뿐, 교회협은 본래 그러한 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협은 앞으로도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체다. 교회협은 한기총이나 한교연, 한교총 등으로 대체할 수 없는 역사와 가치가 존재하는 곳이다. 교회협은 지금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이미지 추락의 원인을 극보수, 극우세력으로 치부하지만, 그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있음을 자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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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침묵하는 ‘NCCK’ 정체성 잃은 ‘빛바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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