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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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품으로 데려갔습니다. 부자 역시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고개를 들어보았습니다. 먼 곳에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16:25).

 

여기서 우리는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가 지옥에 들어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가난한 거지여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 역시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는 살았을 때 자기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갔고, 거지는 살았을 때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사로는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느라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요?”

 

, 맞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참 신앙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찾아 살아갑니다. 자신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찾아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기도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나타나심을 체험할 것입니다(딤전6:15).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들이 가난할 때는 다툼이 없었지만 소유가 많아지자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자는 좌하리라.”(13:8~9). 그러나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소알까지 땅이 넉넉하였습니다. 목축하기가 좋았습니다. 에덴동산 같았고 인상 깊었던 애굽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단 들 곧 자기 보기에 좋은 곳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스스로 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4:4).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머물 곳을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좋은 곳을 찾아 간 롯의 결말은 동굴에 갇혀 술로 여생을 보내는 삶이었습니다. 반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 아브라함의 결말은 이방인들도 인정한 하나님의 방백과 같은 생활이었습니다(23:6).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좋은 것을 찾아 살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삼상15:23).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습니다(13:36). 그리하여 다윗은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들어가 그물을 내려라하셨을 때 밤새 수색하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헛수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을 택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면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려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고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습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습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하니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술을 애초부터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고난이 아닙니다.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노름을 끊으려 하니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노름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아닙니다. 이처럼 고난은 자신의 습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고 살았는지,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고 살았는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고 살았다면 매사에 부딪히는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입니다. 마음에 갈등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 사이에 갈등, 하나님의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 생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는 육체의 고난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도 옵니다(고후1:5).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될 때까지 육체의 고난, 정신적인 고난이 따라온다는 것을 깨닫고 자원하여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생활 원리 가운데 하나이며 죄를 그치게 합니다(벧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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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살았을 때 고난을 받은 나사로’(눅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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