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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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15:23).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담은 내용에 포함 된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하며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큰 소리란 절실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단지 목소리만 크게 한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십니다. 정말 대답이 없었을까요? 미국의 사회학자 앨버트 메리비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상대와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눌 때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말의 내용으로 7%, 두 번째는 목소리38%, 세 번째는 보디랭귀지55%입니다. 즉 소통시 언어적인 요소는 7%이고 93%는 비언어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의사 결정에 있어서 표정과 태도 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평소 사람의 의사 표시는 언어적인 요소보다 훨씬 더 비언어적인 요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의 말만 듣고 그 사람을 알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센스 없고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센스 있는 사람, 눈치 빠른 사람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대하시는 것처럼 기도해도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신앙인들은 주님께서 잠잠하신다고 해서 말씀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침묵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침묵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침묵하셨던 때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삼상28:6b). 꿈은 사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우림은 제사장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뜻이며, 선지자는 글자 그대로 선지자를 통하여도 계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의 응답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왜 침묵하셨습니까? 그것은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15:23b).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씀을 버린 것을 회개하고 돌이켰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고 사울은 계속 말씀과 상반되는 행동을 합니다. 충신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일생을 허비합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께서는 응답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회개를 독촉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8:4~5). 간교한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라하시면 로마의 통치하에 피지배 국가들은 사형을 집행할 수 없기에 로마법에 저촉이 될 것이며, “돌로 치지 마라.” 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무엇인가 땅에 쓰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침묵을 깨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 이 말씀은 침묵의 말씀이 밖으로 표출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잠잠하고 계실 때 이 여인을 정죄 할 만큼 떳떳한 사람이 있느냐?’ 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은밀히 짓는 죄가 이 여인이 했던 것보다 더 많거나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는 위의 두 사례와 같은 경우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인내를 요구하시거나,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무고히 옥에 갇혀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었습니다(40:9~15). 그리고 그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이 석방된다면, 자신의 무고함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은 옥에서 풀려나자 요셉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고 다른 신하들이 해석을 못할 때, 비로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이 자신에게 베푼 꿈 해석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요셉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간수로부터 소식이 전해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은 인내하라는 말씀이거나 더 좋은 것을 위하여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환경은 하나님의 표정입니다. 사람의 말만 듣고 상대를 파악하려 한다면 자칫 오해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표정을 잘 읽어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침묵 중일지라도 환경에 나타나는 주님의 표정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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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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