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칼럼] 홍성표 목사의 ‘청년과 역사’
2021/06/25 09:1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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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표 목사(한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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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한창 성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특히 남자를 일컫고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년은 아직은 세상적으로 때가 덜 묻은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럴까 청년의 나이를 20대에서 30 대로 본다면 이는 벌써 모든 것을 갖춘 나이이고 왕성한 비젼을 가질 수 있는 나이이다. 물론 형편과 환경에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다를 수 있다. 요즘처럼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금수저가 흙 수저보다는 더 빨리 사회 각 분야의 정상에 오를 기회가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좋은 학원을 가서 점수를 올리고 좋은 가정환경에서 좋은 학교를 가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빨리 성장하는 자리에 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근자에 우리 사회에는 모든 분야가 썩은 냄새가 진동하다 그 중에서도 언론이 그렇다.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 단순하게 유튜브 뿐 아니라 기존의 기성 보도 미디어 매체들이 진실과 사실 보다는 조작된 언론 프레이를 하고 있다. 소문이 진실을 만들어 내고 가짜가 진짜처럼 위장되고 포장된다. 사람들은 어떤 소문과 보도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거나 그러한 사실을 따져볼 여유나 시간들이 없다. 그래서 표현되는 말이나 돌아가는 사실을 믿는 예가 거의 전부이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보안법을 통하여 수많은 가짜 간첩들을 만들어 내고 독재와 학살 사기 농단 정권들이 언론을 통제하고 압박하며 권력에 복종을 강요하는 현실이 오래 동안 지속되어 왔다.

 

세계적 혁명들의 주체들은 청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우선 신체적으로 젊고 기동력이나 순발력도 빠르기 때문이며 수순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거나 머뭇거림이 없이 자신을 역사의 변혁에 기투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경험의 부족을 말하지 않더라도 신중함이나 깊이 사색하고 결단하는 것보다는 경솔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불의와 타협하는 영악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체가 젊다고 해서 정신이나 생각이 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썩은 물에 쉽게 몸을 담그며, 삶의 가치나 존재의 의미를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실의 기회주의자가 되기도 쉽고 불의를 정의로 포장하기도 하며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된 현실주의에 타협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준비하기 보다는 쉽게 성공주의나 한탕주의에 빠지는 일도 많다.

 

전통적 가치나 의미를 인정하지 않고 불만과 원망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족의 분단과 함께 동서의 분열과 세대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간다. 먼저는 기존의 기성세대들의 잘못이 있기에 개혁이나 혁명적 저항의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최근 야당의 젊은 대표가 미국 사회의 현상인 동화(melting pot) 보다는 함께하는 가치의 셀러드볼(salad ball)을 이야기 하며 비빕밥 이야기로 사회적 현상을 말하고 있다. 우선은 이러한 소위 정치적 돌풍이 청년의 위치들을 정의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등장한 청년 대표는 국정논단으로 등장한 박근혜 키즈이다. 소위 미국의 유수한 대학으로 말해지는 하바드 출신이다. 세계적인 대하표적 대학을 말할 때는 단연 미국의 하바드나 예일 프리스톤 등을 말한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강국이다. 그러니 그 곳의 유수한 대학이라면 사람들의 귀는 솔깃하다. 한국에서는 과거의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스카이 대나 연세나 고대를 나와야 한국 사회의 상층부에 진입하기가 쉽다. 태어난 것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금수저이거나 라는 환경의 청년이면 사회적 상층부에 의치하기가 수월한 것은 상당히 사실적 현실이다. 자본의 위력이나 자본과 연결된 권력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청년들의 현실적 미래는 쉽게 열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자본과 권력의 환경이 독과 악이 되는 경우도 제법 많다.

 

청춘과 청년의 비유는 거의 맞아 떨어진다. 지금의 계절이 바로 청춘의 계절이고 청년의 시절이다. 자본이 존재를 결정하는 썩은 자본주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자본과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있는 역사와 삶의 주체인 민중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인가? 세상에 가장 불쌍한 난민들, 떠돌이들은 희망이 없는 절대 절망의 존재들인가? 코로나의 한복판에서도 가진 것이 없고 힘없는 민중들(난민. 떠돌이, 나그네. 고아. 과부)들은 무슨 존재인가? 그들의 태어남과 성장과 과정들은 어둠으로 일관하는 것이 운명이고 팔자인가? 그들에게서 종교란 무엇인가? 그들에게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그들에게서 기독교와 교회는 무엇인가? 종교들도 교회도 자본과 권력의 친구이다. 민중들은 자본과 권력에 속고 종교와 교회에게도 속고 속아주며 사는 어리석은 존재인가? 코로나의 재난은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와 남과 북과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경제적 삶의 양극화의 깊은 골을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년은 무엇인가? 청년들은 이 현실과 역사에 대한 대처와 준비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 존재로 서 있어야 하는가? 신체도 정신도 그리고 영적인 젊음을 유지 하고 역사의 정의와 사랑, 생명과 평화, 평등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주의에 함몰 되어서 자기 계산만 하는 썩은 청년으로 서 있다면 그것은 청년이기를 포기하는 이기적인 존재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청년이여! 진정한 청년이 되어 청년의 역사를 만들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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