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이천영 목사(1910-1994)
2021/07/12 10:4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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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사’ 저술 성결교 역사 정리

성결교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성결교 역사기술 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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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영(李泉泳) 목사는 1910127일 동만주 도문고에서 부친 이백운과 모친 김성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강원도 철원군 김화면에 살다가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동만주로 이주해 갔다. 그의 외조부는 한학(漢學)에 밝은 선비였다. 그는 어릴 때 외조부 슬하에서 성장하며 한학을 익혔고, 자연스럽게 일반 상식과 한문전적에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아울러 외조부가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는 도문고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50리 가량 떨어진 명월구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명월구교회와 목단강교회를 개척하는데 참여하였다. 1932년 김인석 목사가 주축이 되어 개척한 교회에 동참하던 때 장윤숙을 만나 가정을 이루어 함께 교회에 헌신 봉사하였다.

 

성결교 경성신학교 졸업, 1943년 목사안수

1939년 경성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해 1941년 졸업하고, 간도에 있는 용정교회와 회령교회를 섬기었다. 1943년 목사안수를 받고 평남 진남포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43년은 성결교회의 재림교리가 일본 정치체제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일제 당국에 의해 성결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체포 구금되던 때였다. 이천영 목사도 이때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황해도 사라원교회로 부임해 사역했으나 공산당의 방해와 핍박으로 19475월 월남해 개성성결교회에서 목회했다. 그곳에서 서부성결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때 교회 2층에 반공이념을 지닌 서북청년단이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0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의 잔학상을 체험한 청년들과 교인 다수가 서울로 내려와 피난지에서 삼각지교회(현 강변교회)를 개척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에 그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화물차를 타고 대구와 울산을 거쳐 거제도까지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중, 19515월 전쟁의 와중에 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부산온천성결교회에서 개교한 서울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성결교인물전 제10). 그의 교수 생활 중 특이한 한 가지는 지금까지 교내외 행사시에 늘 찬송가로만 대체했던 공식행사에 부를 수 있는 서울신학교 교가를 작사한 것이다. 그가 쓴 서울신학교 교가는 간략하면서도 복음선포의 사명이 신학도들의 양 어깨에 메워져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1: 하늘의 태양처럼 역사 찬란한 진리의 상아탑 예솟았다 시대의 예언자들 몸드려 닦은 성화의 요람 서울신학교

2: 하늘의 성좌처럼 빛나는 전통 누리의 봉화대 예솟았다 새시대 기수들이 배우고 닦는 성화의 요람 서울신학교

후렴: 온세계로 뻗어나라 빛나는 전통 새역사를 창조하자 복음의 전당.

이는 선지학교 학생들에게 긍지와 사명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교가라 하겠다. 이 교가를 작곡한 사람은 국내 여러 신학교를 비롯 당시 서울신학교에 오랫동안 종교음악을 강의하던 한국교회음악의 대가요 서울영락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던 박재훈 박사였다.

 

한국성결교회사 저술 간행

이천영 목사는 1970년에 <한국성결교회사>를 간행했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이유를 성결교회가 6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한국성결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저술이 없어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에는 이명직 목사가 1929년까지만 쓴 성결교회 역사를 약술한 책이 있을 뿐 제대로 갖추어진 저술이 없었다. 이에 성결교회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야겠다는 사명을 깨닫고, 1907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무교정에서 천막을 치고, 나팔을 불며 북을 치고 노방전도로 시작한 김상준과 정빈에 의해 시작된 초기 역사로부터 1970년 반세기를 넘긴 교단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처음으로 정리해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성결교회 역사를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하였는데, 첫째는 복음전도관 시대, 둘째는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시대, 셋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시대로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그는 성결교회사를 한 마디로 사랑할 점도 많았지만, 더 쓴 잔을 마실 때가 많았다고 시대의 아픔을 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성결교회 목사였지만 결코 성결교회에만 치우친 학자가 아닌 객관적인 성결교회사를 기술했다고 하였다. 그는 성결교회의 모체가 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신조는 세계복음주의의 신조를 발췌하였다고 했다. 동양선교회(O.M.S)가 주창하는 신조는 근본주의적인 극단과 칼빈주의 신조도 아니고, 당시에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조도 아니요, 순수한 성경적 신조를 중심으로 하여 복음주의 신앙노선을 따라 영혼 구원에 근본 목적을 두고 확립된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불붙은 성령의 불길이 1908년 서울 무교동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 때를 이천영 목사는 성결교회 오순절이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연동장로교회 조사로 있던 이명현 등의 적은 무리가 성결교회로 적을 옮기는 일이 생겼고, 그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초기 성결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기록하엿다.

그는 초기 성결교회가 성경을 강조하므로 타교단으로부터 바리새 파라는 악평을 들었고, 한편 신유(神癒)를 외친다고 하여 비과학적인 미신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지에 성결교회가 세워지고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와 기도처가 산재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명직 목사를 성결교단의 사부(師父)요 교부(敎父)라고 하였다. 그는 이명직 목사를 평하기를 성품은 양같이 온순하며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참으로 성결의 사람이며 어떠한 난관에 부딛쳐도 끝까지 인내와 무저항으로 극복해 나가는 참 신앙인이라고 하였다.

한편 최석모 목사에 대하여서도 그는 외모로는 쌀쌀하고 냉냉한 인상이지만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여 그의 품성은 다정다감하여 신학생들을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러한 리더십으로 아현교회가 일제 말엽에 경성에서 가장 큰 성결교회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최석모 목사의 인품 덕이었다고 하엿다.

이천영 목사가 쓴 이 <성결교회사>1970년대 이후 그의 후학들이 성결교회 역사를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성결교회 역사 기술의 표준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저술이 되었다.

필자는 그의 생시에 서대문구 아현동 서울신학교 강의실에서 그의 강의를 직접 청강하는 제자의 한 사람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강의실에 들어오면 딱딱한 의자 위에 곧은 자세로 앉아 때로는 다리를 엇박자로 바꾸어 가면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차근차근 학생들을 아들처럼 생각하는 듯, 옛날 서당에서나 볼 수 있는 선비 스타일의 제자들을 아끼는 참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두번째 저술은 성지 기행문으로 <이스라엘 견문기>가 있고,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活泉)<우리의 신학>이란 논단을 오래도록 발표했다. 거기에는 성결교회가 지향하는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에 입각한 복음주의 신학이란 글을 남기었다. 이천영 목사의 중요한 업적은 무엇보다 <성결교회사>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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