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강성률 목사.jpg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8).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며, 심판의 날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입니다. 그 날을 위하여 신앙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본문에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된다는 의미는 지금은 책망할 것이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9:12) 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우리 허물을 알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망하십니다. 먼저 양심을 통하여 책망하십니다. 양심의 책망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양심 쓰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항상 양심의 책망을 듣고 살았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쓰노라.”(24:16). 양심의 소리는 강력하지 아니하고 세미하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육신의 충동이 강하여 무시한다면 일을 행한 후에 강한 책망이 옵니다. 반면에 양심의 소리를 듣고 양심을 써 나가면 양심의 담대함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책망은 양심으로 오는 책망입니다. 양심으로 오는 책망을 듣고 회개한다면 환경의 책망이나 사람의 책망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서 잘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가 된 것은 그 집에서 일을 할 때 양심을 써서 하였기 때문입니다. 눈가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과, 자신을 신뢰하여 가정총무로 삼아준 보디발에 대하여 양심을 썼기 때문입니다(39:7~9). 성령은 양심을 통하여 책망하십니다. 성령이 양심을 통하여 깨닫게 해주시면 비록 책망일지라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소성함을 얻습니다.

 

두 번째 책망은 환경의 책망입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환경으로 오는 책망을, 고통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신다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양심을 쓰지 않아 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따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뱀의 유혹을 받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3:6). 그 양심에서는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따먹고 싶은 육신의 욕구가 너무 강하여 제어하지 못한 것입니다. 양심의 음성을 듣지 않자 결국 에덴 낙원을 잃어버리는 환경을 만났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와는 잉태하는 수고를, 아담은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이 임한 것입니다(3:16~17).

 

야곱 역시 양심을 쓰지 않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속이다가 자신보다 꾀가 많은 라반의 압제에서 20여 년 동안 품삯을 열 번이나 속임 당하고 도망 나오다시피 나옵니다(31). 발람은 부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발락의 청함을 받아 가다가 말 못하는 나귀의 책망을 받습니다(22:21~35). 나귀는 환경의 책망입니다. 솔로몬은 왕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신전을 만들어 준 후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만(왕상11:9), 듣지 않다가 사방의 대적을 만나는 환경의 책망을 받습니다(왕상11:14).

 

환경의 책망도 받지 않으면 그 때는 사람의 책망을 받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벌어진 일을 가지고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책망을 받아도 듣지 않으면 최후 몸으로 옵니다. 몸의 책망도 받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시거나 아예 세상을 떠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병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약해서 오는 병도 있고, 관리하지 않아서 오는 병도 있고,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서 오는 병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책망은 내버려 두는 책망입니다(1:28). 이 책망은 불신자처럼 심판 때 한꺼번에 오기 때문입니다.

 

구스왕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왔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아사왕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한고로 하나니라는 선지자의 책망을 받습니다(대하16:9). 그러나 하나니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둡니다. 그러자 발에 병이 납니다. 발에 병이 났을 때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자 그로 인하여 죽고 맙니다(대하16:12~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신앙인들을 책망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선지자 대신에 주일 말씀을 통하여 책망을 받습니다. 책망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모르는 것을 전하는 사람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다고 생각하고 회개하면 빛을 받게 되지만(5:13), 그것을 누가 고자질했다고 생각한다면 점점 어두워지고 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부지런히 책망을 받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책망이든 기쁨으로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책망할 것이 없는 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