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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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27:21).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압송 당할 때였습니다. 미항이라는 곳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27:9~12).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나기에 불편하기 때문에 거기서 떠나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았습니다. 다수결이 민주주의에서는 최선의 방법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수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침 순풍까지 불자 득의한 줄 알고 행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최종 결정자인 백부장의 잘 못된 선택으로 배가 파선되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애초에 잘못된 선택을 한 백부장, 선장, 선주 또 그들의 말을 동의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미항에 머물자고 한 바울의 일행이나 바울의 말에 내심 동의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제 대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도자 선택의 결과는 한 나라의 앞날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선택이 자신만 아니라, 이웃과 후손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고, 기도하며 정해야 할 것입니다.

 

풍랑 앞에서는 고도의 전문지식이나 능수능란한 항해술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사공들은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배의 기구를 내어 버리고, 이리저리 쫓겨다녀야했습니다. ‘이렇게 모두 죽는가 보구나.’ 하며 체념하려 들 때 바울이 나서서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흑암도 그대로, 풍랑도 그대로, 파선된 배도 그대로인데 바울은 안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심해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며 말씀이 은혜입니다.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가 너희를 다 건지겠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과,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바울에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본 것입니다. 바울이 가이사 앞에 서려면 바울은 분명히 생존해야 할 것입니다. 또 바울을 제외한 거기 있는 사람 275명을 전도하려면 그들 또한 구출 되어야 합니다. 생존이 목적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가이사 앞에 서야 할 사명,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 그 사명이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모두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 사명이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 생존케 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강건케 하신 것은 그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 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4:17). 사명 때문에 강건케 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말했던 모세는(90:10) 대부분의 사람들이 80이 못 되어 죽는 시대에 120세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강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며, 여호수아 또한 110세까지 살 수 있었던 것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래 뱃속에서 요나를 살리신 것 역시 니느웨에 복음을 전할 사명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공통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명입니다(5:13~14). 빛과 소금은 행위와 관련 된 것입니다. 소금은 녹아져 맛을 내는 헌신이며 빛은 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자 위치에서 맡은 사명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드러낼 사명이 있습니다. 모두가 사명자로서의 역할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강건케 하시며 그것을 이루기까지 남겨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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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명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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