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강성률 목사.jpg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9:23).

 

어릴 때 동네에 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깊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종종 물놀이하기 일쑤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 년 때의 일인데 한 번은 저의 헤엄치는 모습을 보더니 한 친구가 너 수영 참 잘하는 구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고 그 때부터 저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땅을 짚고 헤엄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 때 저는 누구나 저처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한 번은 물을 가르며 전진하는 친구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애써 나아가는데 그만 키보다 깊은 곳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이미 수영할 줄 알았던 친구는 유유히 다녔지만, 키보다 깊은 곳에 땅 짚고 헤엄을 치려니 머리마저 물속에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그곳은 보 안에서도 웅덩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모두 제가 장난치는 줄 알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안 사촌 형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후 저는 수영은 땅 짚고 하는 것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강도 땅 짚고 헤엄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고, 바다도 깊은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믿음 또한 깊은 상태와 얕은 상태가 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이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사기 119절에는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라고 나옵니다. 참 이상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산지 거민 뿐 아니라 골짜기 거민들도 이겨야 하는데 그곳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어 못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철병거를 못 당한다는 말일까요?

 

누가복음 8(41-56)에는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죽어가는 그의 딸을 가셔서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병들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는 마다하시지 않고 가십니다. 그런데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사람들이 만류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까지는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까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병자는 간혹 의원들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의 정도에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은 자까지는 못하고 단지 살아있는 사람 정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사사시대 하나님의 능력 범위를 스스로 그어 놓고, '철병거는 도저히 하나님도 안 돼' 하고 포기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사람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계산으로 가능한 범위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믿고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철병거는 하나님께서도 안 돼' 하는 잠재적인 불신앙이야 말로 주님의 깊은 은혜 속을 헤엄치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서 맴도는 신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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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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