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임영천 목사.jpg

 

윤모촌 수필가가 <서울 뻐꾸기>란 이름의 수필을 쓴 적이 있다. 이를 표제로 한 수필집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만큼 <서울 뻐꾸기>는 꽤나 이름난 수필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문점이 없지 않다. 왜 하필이면 서울 뻐꾸기일까? 한국인들 모두의 새라면 한국 뻐꾸기도 될 수 있고, 그의 고향 이름을 따서 연천 뻐꾸기라고 했더라면 훨씬 더 정감이 느껴지는 그런 이름이 되었을 법도 한데 왜 하필 서울 뻐꾸기란 말인가, 의문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무 근거 없는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광섭 시인이 자신의 시 한 편에다가 <성북동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한 적이 있다. 성북동이 서울의 한 동네이니까 만일 그 시에다 서울 비둘기란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도 되지만 왠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름인 것 같다. 역시 그 시는 <성북동 비둘기>여야 했다고, 역시 근거 없는 단안이 한 순간 내려진다. 마찬가지로 윤모촌의 수필에다가도 성북동 뻐꾸기’, 또는 그가 살았던 어떤 동네 이름을 붙여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번엔 예상 밖으로 신속하게 역시 <서울 뻐꾸기>여야 해’, 라는 근거 없는 확답이 따라 나오고야 만다. 결국은 기성 명칭이 지니는 기득권의 위력이 그만큼 크다는 결론 아닌 결론이 나오고야 만 셈이다.

 

윤모촌의 <서울 뻐꾸기>는 뻐꾸기란 새의 아주 어렸을 때의 배은망덕만행(?)에 대하여 리얼하게 묘파해 놓고 있다. (개개비)의 둥지 속에서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것이 어찌 못되게 구는가를 그는 이렇게 그려 놓은 것이다. “털도 나지 않은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필사적으로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천길 만길 아래로 밀어내뜨리는 것이다. 저를 품어 키우는 은인의 알을 하나도 남김없이 밀어내고, 그놈은 개개비의 품을 독점하는 것이다.” 실로 사람들의 심금을 휘어잡는 구슬픈 울음을 울어대는 뻐꾸기의, 선천적으로 못된 습벽(習癖)을 이 수필이 완전히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다고 보겠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습벽이란 말을 풀이해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행동, =버릇이라고 했는데, 이 말 풀이처럼 알에서 먼저 깨어난 어린 뻐꾸기가 주인(은인)인 개개비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의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버린 못된 행동(버릇)’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수필(‘서울 뻐꾸기’)의 작가인 윤모촌은 이해하기 힘든 이 동물을 가리켜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라고 하면서도, 이어서 또 이렇게도 반응하였다. “알 수 없는 것이 조물주의 그 조화라고 말이다. 또 비슷한 이런 표현, 배은망덕으로 생존을 잇게 한 신의 의지와 섭리가 알 수 없는 일이란 해석(표현)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제목에 의할 것 같으면 새들의 둥지에는 개개비 둥지만이 있는 게 아니라 뻐꾸기 둥지란 것도 있어서 다른 새(이를테면 개개비 같은 새)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게 한다. 나는 생물학자도, 조류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개개비 둥지아닌 뻐꾸기 둥지란 게 따로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켄 키지의 소설에 뻐꾸기 둥지란 말이 분명히 쓰인 것을 보면 그런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으로만 쓰이지 실제로 뻐꾸기 둥지같은 게 있을 리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뻐꾸기는 개개비 둥지에서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새이기 때문에 따로 무슨 뻐꾸기 둥지같은 것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켄 키지의 그 소설 속에서도 무슨 뻐꾸기 둥지라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단지 은유적 공간으로만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사례로써 분명한 실증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뻐꾸기 둥지는 하나의 은유적 공간일 뿐이다, 라고 말이다. 실제로 뻐꾸기 둥지는 그 소설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못된 뻐꾸기들이 득실거리는 권력집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 집단이 뻐꾸기 둥지로서의 성격을 지닌 이상, 그 구성원들이란, 개개비를 이유 없이 밀어내는 뻐꾸기와도 같이 무자비하고 잔인한 근성의 소유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이 될는지도 모르겠고, 또는 그들에게 배은망덕으로(라도) 생존을 잇게 한조물주()의 섭리마저 의심케 만들 그런 존재가 되고 말지, 우리는 오늘의 서울 뻐꾸기들의 앞으로의 행태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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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뻐꾸기 둥지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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