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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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5:13-15).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인 여리고성 앞에 섰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인지, 이스라엘의 대적을 위하는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도 대적을 위하는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좌편이냐 우편이냐, 보수냐 진보냐 등으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같은 소속감을 가지고 생각을 공유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합심해서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일이 발생하면 사건에 대한 객관성보다는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어느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윤리 기준도 달라집니다. 그가 속한 집단이 권력을 가진 단체라면, 현저히 드러나는 잘못된 사건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중간지점은 더욱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말처럼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의 대적도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을 옳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옳지 않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조차도 정치 이념에 빠져 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만일 그 사람이 자기들을 위한다면 그를 시험하여 역할을 분담하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맞는 활동을 지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 그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지시를 받을 위치가 아니라 여호수아를 지시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신은 발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신은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적 몸을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뜻합니다(2:11).

 

또한 당시 종들은 신을 벗고 살았습니다. 자유인과 종을 분간하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곧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는 말은 임의로 행동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님편이 아니면 사탄편입니다. 15:19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거듭났다고 하지만 그 사람이 세상을 추구하고, 육신을 추구하고, 부귀를 추구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마귀 지배 하에서 심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세상 편에 서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알 수 있습니다. 2:14이하에는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 그러자 천하 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이렇게 반응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그들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라는 말에 아멘한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빌라도만 아니라 자신들 역시 동조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어찌할꼬하는 탄식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양심이 찔렸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집사의 설교가 나옵니다. 스데반도 마지막에 강하게 책망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하니라.”(7:51-53).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똑 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사도행전 2 장에서 마음이 찔렸을 때는 어찌할꼬하는 회개가 나온 반면, 7장에서는 이를 갈았다고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선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양심을 쓰면서 하나님 편에 서 있었지만 사도행전 7장에서 이를 갈았던 사람들은 양심 편이 아니라 육신 편, 사탄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양심 편에 서 있으면 말씀을 들을 때, 또 전달자가 우리에게 합당한 말을 전할 때 형제들아 어찌할꼬하며 회개하게 되지만 육신편이나, 세상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말씀 들을 때 아무개가 일렀구나.’ ‘목사님이 나 들어보라고 하는 구나.’ 하며 시험에 들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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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 편에 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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