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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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10:16).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제자들을 보내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양과 이리의 관계는 천적 관계입니다. 초식동물인 양이 육식동물인 이리에게 먹히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행위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아멘하는 바이겠지만 뱀을 지혜의 상징적인 동물로 비유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외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뱀을 좋아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뱀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최초 조상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서 뱀은 사탄으로 상징되고(12:9), 외식과 악독이 가득한 사람(23:33)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뱀에 대한 기본적인 이미지를 깨뜨립니다. 이리 앞에 있는 양과 같은 형편에 있는 신앙인들이 대처할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뱀들이 이 말씀을 안다면 자신들의 저주가 풀렸다고 환호할 것입니다. 딤전4:4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뱀마저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선한 동물입니다.

 

단지 그가 사탄에게 쓰임 받을 때는 악한 동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뱀의 어떤 모습이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지혜의 모습일까요? 성경학자에 따라서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보는 주석들에 의하면 신중한 분별력을 상징한다는 견해, ‘뱀이 자기 밖에 있는 마귀의 지혜를 받아서 사용한 것처럼, 성도도 자기 밖에 있는 신의 지혜 즉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사용하라는 뜻이라는 견해, ‘전도자가 어떤 위험한 일을 인하여 그 전하는 진리를 가리거나 구부러뜨리거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등이 있습니다. 모두 일리가 있고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시키기 위하여 여자가 태어나면 살리고 남자가 태어나면 나일 강 하수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석 달을 숨겼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바로의 전멸 작전이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전은 미리암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가슴 졸이며 길렀던 모세는 바로의 집에 들어가 그의 어머니 요게벳에 의하여 수고비를 받으면서 길러집니다. 미리암에게 위에서 언급한 뱀과 같은 지혜가 발동한 것입니다.

 

저를 지도했던 안병모 목사님은 뱀의 지혜에 대하여 미7:17을 근거로 하셨습니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뱀의 티끌을 핥는 모습,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다 비둘기처럼 순결함, 곧 순수함과 정결함이 더해져야 이리처럼 사나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각각 그릇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였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의 칼날에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요한은 살아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는 사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요한처럼 세상에 존재하면서 날마다 자기 몸을 쳐 복종함으로 매일 순교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언급한적 있지만, 김현봉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도록 통지서가 배달되면, 자신만 알고 교인들에게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 번은 일본 형사가 김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김목사님은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하여 양쪽에 변을 담은 지게를 진 채 걷고 있었습니다. “김현봉하고 부르니 하고는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형사의 독기 서린 눈을 바라보면 자신도 마귀가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형사는 그의 하고 있는 일과 누더기 차림의 모양새를 한참동안 살펴보더니 아무 말 없이 가버렸습니다.

 

또 한 번은 무슨 행사를 하였을 때였습니다. 200명의 목사님들이 조선 총독부에 모여 남산에 함께 신사 참배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한 사람과 김현봉 목사님을 지명하여 준비위원으로 남으라고 하기에 준비위원이 뭐야?’ 하시면서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정봉기 글에서 발췌).

 

2:3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바로 공의와 겸손은 지혜이며 또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받게 합니다. 우리는 한 세기의 재앙이라고 하는 코로나19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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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양이 이리 가운데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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