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회/‘독일 개신교회의 날’에 대해 1
2015/05/27 11:0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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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시대적 물음에 대답하려는 평신도들의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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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교회의 날의 유래
사회적 빈곤에는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써, 불신앙에는 전도로서, 그리고 무신론에는 학술토론을 통해서 대응해야 한다.- 요한 힌리히 비헤른(Johann Hinrich Wichem)

2년에 한번 개최되는 ‘독일 개신교회의 날’(Deutscher Evangelischer Kirchentag) 행사는 그 참석 인원이 평균 10만명이 넘는 대규모 행사이다. 보통 수요일에 시작하여 주일까지 약 닷새 동안 이어지는 이 행사는 예배와 성경공부, 세미나와 학술대회, 강연회, 그리고 음악, 연극, 미술 등 약 2500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독일 ‘개신교회의 날’행사는 단순히 교회의 세(勢)를 과시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다. 교회의 날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독일의 정치와 여론을 이끌었고, 독일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교회에 길을 물을 때, 그 길을 제시해 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특히 독일의 ‘교회의 날’을 말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이 행사의 주체가 주교회(Landeskirche)나 독일개신교회(EKD,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가 아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는 행사라는 점이다.
독일 ‘개신교회의 날’은 짧게는 1949년 하노버(Hannvor) 대회를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따진다면 1848년 9월 위텐버그(Wittenberg)에서 열린 '복음주의 남성들'(Evangelischer Manner) 행사까지 올라가야 한다. 1848년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체는 혁명에 불타올랐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다시금 왕정 체제로 복귀하고자 하는 빈 체제에 반대하여 근대사상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전유럽에서 들고 일어났다.
혁명의 불길은 그 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하여 3월에는 독일 전역을 들끓게 했다. 신진 산업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1848년 독일혁명은 잠시나마 왕정과 귀족들의 양보를 얻어냈고,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는 듯 보였다. 이와 함께 독일사회의 맨 아래 계층에서는 또 다른 급진주의의 불길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앞세워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 해 2월 21일,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디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공산혁명을 시작했다. 사회 체제는 아래로부터 급격히 흔들렸고, 혁명의 불길 속에서 개신교인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 지  교회에 그 길을 물었다. 그러나 왕정과 귀족들의 지배아래 있었던 독일 루터교회는 교파분열로 산업화와 노동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 해 9월 독일의 기독교인들이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루터의 도시 위텐버그에 모여 ‘복음주의 남성들’ 대회를 가졌다. 바로 이 복음주의 남성들 행사가 곧 독일 ‘교회의 날’(Kirchentag) 뿐만 아니라 ‘디아코니’(Diakonie)의 기원이 된다.
당시 행사를 주관했던 요한 힌리히 비헤른은 “사회적 빈곤에는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써, 불신앙에는 전도로서, 그리고 무신론에는 학술토론을 통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유명한 연설을 함으로써 독일 내방선교(Inneren Mission)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사회적 빈곤계층을 파고드는 무신론의 도전에 나눔과 봉사 그리고 신앙과 신학으로 맞서고자 했다.
이후 1872년까지 15번의 ‘교회의 날’(Kirchentag)이 열렸다. 이들은 교파나 교단의 위탁없이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모인 것이다. 교단 혹은 목회자 중심의 모임이 아니었다는 것은 ‘교회의 날’의 성격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런 특성 아래서 ‘교회의 날’의 주제는 국가와 교회, 주일성수, 기독교인과 정부, 분파와 기독교학교 등 사회 속에서 평신도들이 함께 느끼고, 해결해야 하는 여러 주제들을 다룰 수 있었다.
그후 1872년까지 ‘교회의 날’이 개최되었으나, 1872년 루터교회와 프러시아 기독교연맹과의 격렬한 갈등의 후폭풍으로 19세기 ‘교회의 날 운동’은 교회연합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중지되고 말앗다.

제2차 교회의 날 운동
우리의 일상이 일어나는 곳,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곳, 좁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곳, 그 모든 곳에서 교회는 자신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 라인홀트 폰 타텐- 트리글라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잠시나마 다시금 ‘교회의 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모든 독일 개신교 지역교회의 직능협회와 총회들이 1919년 드레스덴(Dresden)에서 ‘교회의 날’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교회의 날’을 계속 하기로 하고 교회연맹(Kirchenbund)를 창설하였다. 28개의 독일 개신교 주(州)교회들이 이들을 후원했다. 또한 독일 개신교의 총체적 자의식 고양과 신앙 안에서 완전한 자립이라는 대전제 아래 그들의 제도와 관리위원회를 통합했다.
이러한 연합의 경험은 향후 독일 개신교회(EKD)의 선구적인 모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시기 ‘교회의 날’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변하는 독일 개신교의 정체성과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교회의 깊은 불신이 이면에 존재했다. 더욱이 평신도가 아닌 주교회(州敎會)가 중심이었기에 교회의 정치적 흐름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이후 1932년 현재 폴란드에 속하는 스테틴(Stettin, 당시 독일 영토)에서 “포메른 지방의 교회의 날”(Pommerscher Kirchentag)이 개최되었다. 그것은 포메른 지방의 교회들이 모인 소박한 ‘교회의 날’ 행사였다. 이 행사의 주체자는 이후 1949년 ‘교회의 날’의 주창자인 라인홀트 폰 타덴-트리글라프 (Reinhold von Thadden-Trieglaff)였다. 포메른 지방의 교회의 날은 이후 오늘날의 ‘교회의 날’의 실질적인 모태가 된 것이다.
타덴이 주창한 ‘개신교인 주간’(Evangelische Woche)은 19세기 ‘교회의 날 운동’을 잇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1936년부터 나치정부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1937년 독일기독학생협회 (DCSV)와 함께 더 이상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타덴이 중심이 되어 회복한 ‘교회의 날’은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참여의 연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타덴은 이 점을 교회의 날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는다. “우리의 일상이 일어나는 곳,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곳, 좁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곳, 그 모든 곳에서 교회는 자신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타덴의 관점은 만인이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믿음과 각자 자신의 직업에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이후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는 ‘교회의 날 운동’을 나치에 반대하는 교회 공동체의 연합을 위해 활용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 타덴은 고백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다. 1934년 5월 7일 타덴은 스테틴 지역에 속한 야당성향을 가진 고백교회 지역총회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이와 함께 5월 29-30일 열린 고백교회 총회에서 발표된 바르멘 신학선언의 주요 서명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 1935년 하노버에서 첫 번째 ‘개신교인 주간’이 개최되었다. 당시 개신교인 주간에는 나치 시대에 어용화된 교회에 대해 반대하는 교회들이 주축을 이뤘다. 다시 말해 어용화된 ‘독일 기독교인들’에 반대하여 신뢰할 수 있는 신앙의 증거를 회복하려는 투쟁이 1949년 ‘교회의 날’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난 이후 독일 사회 안에는 더 이상 독일을 대변할 수 있는 그 어떤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점령군의 위세 아래 그 어떤 정치적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직 나치에 대항해 투쟁했던 고백교회만이  어느 정도의 인적자원과 조직력을 가지고 독일을 변호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84년 전후 첫 번째 ‘기독교인 주간’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다. 이 기독교인 주간이 발전하여 두 번째부턴 “독일 개신교회의 날”(Deutscher Evangelischer Kirchentag, 약칭 DEKT)로 불리게 된다. 당시 EKD 총회의 회장이었고 이후 독일의 대통령이 되는 구스타브 하이네만(Gustav Heinemann)은 1949년 7월 31일 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7월 28일부터 8월 1일까지 하노버에 모였던 독일 개신교인들은 매년 열리는 독일 교회의 날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교회의 날은 개신교 평신도들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 그들의 사명을 준비하는 일을 도울 것이다. 또한 세계교회협의회 안에 있는 평신도와 공동체들 간의 교류를 후원할 것이다.”
이러한 결의는 박수로 받아들여졌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독일 개신교의 날’이 하노버에서 만들어졌다.
<독일 튀빙엔에서 강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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