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이영은 목사 인터넷.jpg
 
본문은 요셉이 바로의 신하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비참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이 비참한 스토리와 연결이 안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요셉은 형통한자가 되어상식적으로 어떻게 노예가 형통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노예 요셉이 형통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예가 형통 할 수 있는 것은 주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살면서 가장 무너진 곳 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습니다, 상처가 가족 입니다. 요셉은 열 일곱 살 때 형들이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서 애굽 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가해자가 가족입니다. 살다 보면 내 잘못도, 내 선택도 아닌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남에 의해서 내 삶이 처절하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겨야 하나요? 생각하고 분석해 봐도 억울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자고 하면서 음식을 먹고 있는 형들의 소리를 듣고 있던 우물 속, 노예로 거래가 되어 집을 떠나 멀리 이집트로 끌려가는 길, 애굽에 도착해서 보디발 저택의 대문을 처음으로 본 그날,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일생일대 위기가 정신없이 착착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계속해서 여호와를 붙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와 함께 계셔 주세요, 나를 놓지 마세요, 내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50:15)” 하나님은 말씀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들어갈 때 이미 형통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였던 요셉에게 이미 총리대신의 자리를 주셨고 요셉은 자기가 받은 복을 일생을 통하여 취하여 마침내 총리대신으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노예소년 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노예소년 요셉 안에 총리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간보다 크신 하나님은 시간의 밖에서 보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 모습이 구원의 기준에 미달 되는 형편 없는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미래에 구원받은 완전한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십니다. 형통한 요셉은 마침내 우여곡절을 다 겪어내고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저는 요셉이 하나님을 믿고 성공하고 잘되었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소명을 이룬 것입니다. 그 소명을 위하여 총리대신 이라는 자리를 주셨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고, 자기가 받은 것을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쓴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주신 축복을 받아서 취하였고, 그 자리에서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망은 환경이 아닙니다. 소명을 잃어버린 것이 절망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처참하게 불행한 요셉의 가족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면 얼마나 불완전하고 비뚤어진 인생인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고 소망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집니다. 흑암 같은 요셉의 잔혹한 가정사에도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있으면 빛나는 영광으로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손’(창 39: 1~6)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