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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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에게 고난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4장을 통하여 고난의 종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5절). 신앙인이든 아니든 이러한 죄로 인한 고난은 형벌에 해당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담과 하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 영이 죽게 되었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게다가 아담은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게 되고 하와는 잉태의 고통을 더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죄의 결과입니다(창3:16-19).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지만 죄의 값은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죄를 그치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1절).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갑옷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 고난을 갑옷으로 삼으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알코올에 중독되지도 않고 처음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금주는 고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난이 특별한 고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내게 익숙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고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우리는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을 따라 육신대로 살아가는데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육신대로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니까 고난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니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갑옷으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의 시련을 위한 고난입니다(12절). 우리 하나님은 자녀 된 신앙인들을 그냥 두지 않고 자라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하십니다. 요셉처럼, 욥처럼, 다윗처럼 시련하십니다. 욥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넷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14절).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입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은 많은 성도들,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이 이에 해당되는 분들입니다.
신앙인들이 고난을 받을 때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받는지 알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잘 못 때문에 받는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생각한다면 회개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믿음의 시련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위에 소개한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신자들에게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시119:71). 죄 값으로 받는 고난은 회개하기에 유익하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받는 고난이나,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이거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며 또 위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고후1:5).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받는 형벌을 제외한 위 세 가지 고난들을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겨주십니다(벧전4:12-13).
신촌예배당은 안병모 목사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세상을 떠난 안 목사의 뒤를 이어 강성률 목사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청교도 정신과 말씀 중심,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온 성도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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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인에게 고난이란?’(벧전 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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