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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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2:3).

 

제가 시골에 살았을 때는 동네에 보일러를 설치해 놓은 집은커녕 연탄을 피우는 가정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마른 솔잎과 잔솔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을 지피기 마련인데 그런 나무들에는 구들이 쉽게 달궈지지 않았습니다. 도끼로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집어넣어야 달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들이 얇을수록 방은 쉽게 따뜻해졌지만 반면에 두꺼운 구들은 어지간한 장작에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벌써 몇 번은 일어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을 지피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반드시 달궈진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멈추지 않고 장작을 넣었던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친구가 당시 잘 나갔던 회사에서 사표를 쓰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니, 왜 그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왔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너무 쉽게 들어갔기 때문이랍니다. 쉽게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애착이 가지 않아 더 공부해서 자신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직장을 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거나 믿음에서 떠난 주변 사람을 위하여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배우자를 위하여, 혹은 가족이나 친척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는 무관하게 그들이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는 약속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구들에 불을 지피면 반드시 달구어지리라는 확신처럼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구원은 가족단위입니다. 노아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반항심이 많았던 함도 구원을 받았습니다(7:6-7).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부모 형제들이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6:25). 사도행전에 나오는 간수 또한 그의 온 집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16:33).

 

내가 믿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도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로 믿으면,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형제들에게도 생명이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시작한 지 1년 안에 결실을 거두지만 다른 사람은 10년 혹은 20년이 되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도한 사람이 고인이 되어서야 나타나기도 합니다.

 

더디거나 느리다 해도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달구어진 구들은 곧 식어버리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달구어지는 돌은 쉽게 식지 않듯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간 후에 응답 받은 기도는 그렇지 못한 내용들보다 감사와 기쁨이 더 크며 오래 지속됩니다.

 

본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2:3)는 말씀은 구원의 때만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모두 적용 됩니다.

 

육신은 조급한 특징이 있지만 영혼의 성장은 인내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사랑의 감정이 없을지라도 의지를 써서 사랑을 묵상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해 나가면 분명히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사랑의 감정까지 주실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와 간구의 불을 지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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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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