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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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5:1).

 

마태복음 5-7장을 산상보훈이라고도 하고 산상수훈이라고도 합니다. 산 위에서 베푸신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이전 산 아래서 교훈 하실 때 허다한 무리가 따랐던 것(4:24-25)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시자 제자들만 따라왔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예외도 있겠지만 무리 앞에 서기를 원할 것입니다. 12명 보다 70명 앞에 서기를 원하고, 70명 보다는 100, 1000, 10000명 앞에 서기를 원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많을수록 듣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 오르면 몇 명의 제자들만 따라올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택하십니다.

 

만일 군중들의 환호와 영광을 좋아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가파른 산에 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병을 고치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들, 곧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에 머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예 영광이나 사람들의 환호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가파른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여긴 너무 힘들어” “땀 흘리긴 싫어” “편하자고 믿는데 고난 받을 필요가 어디 있어?” 하며 떠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제자로 택함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생하며 믿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는 좋아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은혜 주신 목적 중에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게 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위로는 주님을 위한 고난과 비례합니다(고후1:5). 주님이 베풀어주신 떡만 먹을 것이 아니라 거기서 받은 힘으로 산에도 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들에게 산상보훈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른 제자들에게 비로소 전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산 아래 무리들에게는 그러한 귀중한 말씀을 전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전했습니까?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6). 여기 있는 제자들은 열 두 제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열심히 따라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푹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라고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적인 것인데 예수님은 육은 무익하다고 하십니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육신적으로 복 받는 일을 좋아하는데 육은 무익하다고 하니 비전이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상보훈에서도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은 부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5:3). 세상은 연락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4). 세상은 강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5).

 

세상은 환영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10-11). 이런 말씀을 어떻게 육신적인 사람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산상보훈을 하시기 전에 미리 말씀을 받을 수 없는 자를 걸러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전하시고 내려오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8:1).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시니, 다시 허다한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산 위에 오를 때 흩어졌던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산상보훈은 아무나 듣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신앙에서 한 걸음 나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각오하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43:12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라고 나옵니다. 산은 거룩한 곳을 의미합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성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산에서 주셨습니다.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은 시작입니다. 자녀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더욱 자라가는 일이 남은 것처럼, 신앙인들도 허다한 무리에서 나아가 거룩함에 소망을 두고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성도가 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보배로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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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산 위에 오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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