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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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골로새에 가 본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의 글은 비교적 수준 높은 성경지식과 신학적 이해가 요구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당대에 풍미했던 영지주의 이단 사설이나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골로새 성도들에게 확실한 복음진리를 알려주고 심어주기 위한 변증적인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인 글을 썼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너희를 위하여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아마도 1:19에 언급한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이 아들 안에 있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목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1:19).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신 것은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화평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랏소”(ἀποκαλλάσσω), 화목이라는 말은 에이레노포이에오”(είπηνοποιέω)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아포칼라쏘”(화평)이라는 말은 사실 서로 화해한다(reconcile)는 의미이고, “에이레노포이에오는 평화를 만든다, 곧 화목한다는 의미이다. 13절과 2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향하여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 “전에 악한 행위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던 너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반역과 죄 안에 있던 자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어둠과 죄 아래 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값으로 내주고 이 죄인들과 화해하고 화목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화해와 화목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경륜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 경륜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주신 것이 바로 계시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ESV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알려지게 하기 위하여” (to make the word of God fully known)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경륜이라는 말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마치 연극의 연출자처럼 역사의 무대 위에 시대와 세대에 따라 그가 계획하신 사건과 그 사건의 주인공을 배분하고 배치하여 역사의 흐름을 인도하고, 관리하며, 감독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ίκονομία) 라는 말은 분배”(distribution)라는 말로도 번역한다. 역사에서 역할을 분배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두신 경륜은 무엇인가?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고 복음을 증거한 예루살렘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였다.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빵을 같이 떼고, 함께 기도하였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되고 평화로운 교회, 결코 떠나고 싶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잊은 것 같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킨다. 사울은 젊었으나 정통 유대인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당대의 저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성경과 신학에 뛰어난 학식을 가진 종교 지도자였다. 그의 언행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으며, 열열한 유대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는 나사렛 예수와 그를 쫓는 자들은 반 유대주의자로 간주하고 이들을 소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으로 아는 자였다. 결국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인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고, 그 사건에 이은 그의 교회에 대한 핍박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난 온 제자들은 피난처에서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스데반의 순교가 제자들의 복음사역을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로 확장시켰다.

 

그런데 사울은 제자들에 대한 핍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제자들이 피신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이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망나니 짓을 중지시키고, 그의 눈을 멀게한 가운데, 그를 그의 일꾼으로 부르셨다. 아나니아의 입을 빌어 “(가라) 이 사람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파하도록 내가 택한 그릇이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을 고난을 겪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9:15-16).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이 살인자를 그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으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 고난의 종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기의 제자를 죽이고, 자기의 교회를 파괴하고, 핍박하던 이 원수를 오히려 자기의 이름을 전파하는 그릇으로 택하시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어 고향을 떠나 전 세계의 나그네로 내 몰았던 이 폭력배의 우두머리를 이제는 반대로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고난의 종으로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 이름을 붙들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결국 변하여 새 사람되고,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할 때에, 이제 그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1:24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위하여 당하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 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오히려 괴로움을 기쁘게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입장이 예전과 완전히 바뀐 상황이 되었다. 헬라어 원문은 파데마”(παθημα)라는 말은 괴로움이라는 의미보다는 고난(suffering)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바울은 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인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그의) 육체에 체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를 그분의 몸이라고 말한다. 앞에 18절에서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으로서 충분하지 못하여 그것을 바울이 대신 채운다는 말인가? 그것은 말이 안 되는 해석이다.

 

바울이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모진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시며, 심지어 그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당한 그 고난이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마치 바울이 예수님의 부족한 것을 자기가 당하는 고난으로 계속 채우는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3:22-24)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예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하실 일이 없다. 또한 히브리서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하여 더 이상의 예수님의 고난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는 단번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을 통하여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 제물을 드리지만 그것들은 결코 죄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한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오른 쪽에 앉으셔서 이후로는 자신들의 원수들이 자신의 발 받침대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분은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다.”(10:10-14. 참조 히 9:11-12, 24-26). 그리스도의 속죄는 흠없고 점없은 그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해서 고난을 당해야 필요가 없고, 예수님 이외의 다른 어느 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덧붙일 것도 없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하여 한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섬김에 관한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하여 하실 일을 다 하셨다. 이제 남은 일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몫이다.

 

예수께서는 바울을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르실 때에, 땅에 엎드린 사울을 향하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9:4)고 물으시고, 그의 정체를 묻는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이 자기를 핍박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울이 핍박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지, 예수님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울이 예수님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바울은 앞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하며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일뿐만 아니라 또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1:18)고 말하고,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교회는 그분은 교회의 머리리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이라고 가르친다(1:22-23). 따라서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가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셨다(28:16-20). 선지자적 사명을 주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대언한 말씀을 해석해주고, 해석한 말씀을 적용하여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이다. 오순절이 되어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선지자로 세운 제자들의 입에 성령으로 인치심으로 그들을 선지자로서 인증하시고, 선지자의 직분을 위임하셨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를 세우는 위임식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새 아담을 통하여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새 백성을 모으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사단의 사주를 받은 아담의 후예들은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새나라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에 뒷짐찌고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최후에 백기를 들 때까지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대적할 것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의 행진에 바울을 부르신 것이고, 우리 성도들을 부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9:34).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한 부르심은 꽃방석을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고난을 향한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한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 전염병을 구실 삼은 그리스도에 대한 핍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바울의 심정으로 이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 교회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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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 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61]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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