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임영천 목사.jpg

 

오래전 나는 영국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1477-1535)가 등장하는 영화 <천일의 앤>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 영화는 당시 영국 왕 헨리8세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영국식 종교개혁을 강행하려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영화 가운데서 나에게 강하게 인상지어져 있는 몇몇 인물들 가운데 그(모어)가 들어 있었다. 그의 어떤 면 때문이었을까. 대법관 신분이었던 그가 개신교도라고 할 신자들을 잡아다가 처형하는 일에 열광적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무려 여섯 명의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의 명저라고 알려진 <유토피아>(1516)에는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그가 실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마도 시청자(필자)를 놀라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놀라게 된 것이 꼭 그 저서실제가 다른 이중적인 처신을 보여주었다는 데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의 이중적 처신이 권장할 일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나약한 인간인지라,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넘어가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가톨릭교와 다른 프로테스탄트 신자라고 해서, 그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야 그의 판단에 속한 문제라고 봐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죄과(?)로 그가 그들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 특권마저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사실 앞에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리스도교 신자였다고 한다면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던가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찌 그렇게 잔인한 화형 판결을 다수 신자들에게 내렸을 수 있을까 물어야 할 판이다. 여기서 막말(?)을 하나 덧붙이기로 한다면, 헨리8세가 영국식 종교개혁이란 미명 하에 새로운 이단 종교를 만드는 것까지 확인된 이상 그(모어)는 이제 국왕을 이단자로 재판에 회부하고 그에게 화형 판결을 내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에겐 그럴 힘까지야 없었기 때문에 결국 반역죄로 그 자신이 국왕에 의해 처단당하고 만 것이었다.

 

요즘 필자는 다른 일로 서기원 작가의 장편소설 <조선백자 마리아 상>(1979)을 다시 읽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소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오래전에 읽어서 그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던 세부사항들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던 점이 하나의 큰 수확이었다. 특히 그 작품 속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 이가환에 대해서 재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또한 큰 소득이었다.

 

조선 정조 때 이가환(1742-1801)은 대단한 권력자였다. 형조판서 직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적들에 의해 쫓기다 보니 정조가 그를 보호하려고 중앙 정부 아닌 지방 외직으로 보냈다. 그는 광주(현 남양주) 목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공서파(攻西派) 정적들에게 몰리게 된 것은 그가 천주교신자라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광주에 부임하자마자 천주교신도들을 혹독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는 자체 모순이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해서 정적들의 공격을 둔화시켜 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권일신을 비롯한 다수 신도들을 너무도 잔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원망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선백자 마리아 상>에서는 이런 이가환의 가학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끝이 난다. 그 후의 이가환의 이야기는, 수난 형식의 것으로, 황인경 작가의 전5권 대하장편 <소설 목민심서’>(1992)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광주 목사 때 천주교도들을 혹독하게 고문한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이 혹독하게 고문을 당하고 있다. 이젠 정적들에 의해 그 자신이 천주교신자로 몰려 고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끝내 목숨마저 잃고야 만다.

 

나는 동·서양의 두 권력자들이 처음엔 신자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다가 뒤에 가서는 자기 자신들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큰 세력에 의해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사례를 살펴보았다. 토머스 모어와 이가환의 이야기는, 먼저는 종교적인 이유로 세도를 부리다가 후에는 또 그 종교적인 이유로 더 큰 권력에 의해 자기 목숨마저 잃게 된 종교인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상호 유사점이 보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토머스 모어나 이가환이 당대 약자들이었던 신도들을 다수 잔인하게 희생시키지만 않았더라면 그들(모어와 이가환)이 후에 헨리8세나 공서파 정적들에 의해 참혹하게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이었을까, 라고. 그러나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영화 관람자들이나 소설 독자들에게 결국은 심은 대로 거두고 말았구먼!” 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만 것이 아닌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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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토머스 모어와 이가환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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