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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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를 보면 교권과 국권, 또는 속권과 교권 간의 긴장과 갈등에 관한 이야깃거리들이 꽤나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중세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 사이에 벌어졌던 일화를 함께 살펴보면서 거기서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없는지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북이탈리아 태생의 그레고리우스7(1020-1085)는 교황권 확립과 중세교회 개혁 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교황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을 로마 교황이 관여하고, 세속의 권력자들은 그 정책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기본 원칙을 고수하려고 했다. 교황의 견해에 의하면, 속인(국왕)이 성직 임명을 하는 전래의 관행은 성직매매를 불러오기 쉬워 결국 교회를 타락시키며, 또한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는 결과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정책에 반기를 든 세속 권력자, 곧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1050-1106)가 우리의 관심의 표적이 된다. 선황(先皇) 하인리히3세 때까지도 엄연히 관행으로 지켜져 오고 있던, 제왕의 성직자 서임권을 교황이 불허하는 것에 순응할 수 없었던 하인리히 황제는 끝내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뜻을 무시하고 결국 자기 계획대로 성직자를 임명했으며, 이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판단한 교황은 그 황제를 파문(破門)에 처해버리고 말았다. 실로 두 거대한 바위들이 서로 거세게 부딪치며 굉음을 내는 현상이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앞서 젊은 하인리히 황제는 다소 엉뚱하게도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는 법령(1076)을 제정해 보기도 했으며, 후엔 한동안 어디 해보자라고 버텨 보기도 했지만 끝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1077)을 당하고야 만 것이다. 당시 민심은 교황 편이었으므로 황제는 사죄만이 자기가 살 길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젊은 황제는 자기가 거주하던 독일에서 교황이 체재 중이던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문으로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황제는 사죄하는 모양새로 얇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서, 유난히도 추웠던 1월의 눈발을 맞으며 교황의 반응이 있을 때까지 그렇게 맨발로 사흘 동안이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용서를 빌었다. 소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란 지위를 감안한다면 이 굴욕적인 자세는 아마도 참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는 교황에게서 사면(赦免) 조치를 끌어내고야 말았다. 어느 면 굴욕 속의 승리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참다운 승리자는 역시 그레고리우스 교황이었다. 왜냐면 젊고 혈기가 드센 황제로부터 제멋대로의 고집을 꺾는 결과를 이루어냈으니, 이후부터는 더욱 소신껏 교회개혁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직매매를 금하고, 사제의 결혼을 금지시켰으며, 속인의 성직 임명권을 엄금하는 등 소위 그레고리우스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른바 교황절대주의마저 희미하게나마 그 틀을 갖추기까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굴욕 사건 이후로 하인리히 황제는 표현컨대 와신상담(臥薪嘗膽) 투의 자세로 결전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8년여 동안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계속해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제부터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식이었다. 카노사에서의 굴욕을 설욕이라도 해 보겠다는 듯 황제는 군사력으로 로마를 점령해 교황을 추방했는가 하면, 한편에선 교회 내부를 분열시키는 작전을 펴서 마침내 별도의 대립교황클레멘스3세를 선출해 내도록 유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 끝에 하인리히 황제는 그만큼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행동반경을 위축시켜 버렸고, 그의 영향력을 반감시켜 버렸으며, 또 로마 교황이 지닌 권위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말았다. 이처럼 혹독하게 보복을 당한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생의 말년을 쫓겨 다니듯 전전하다가 교황의 공저(公邸)인 로마의 라테라노 궁전이 아닌, 이탈리아의 남부 도시, 일종의 도피처이기도 했던 살레르노란 곳에서 운명을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의 생애 마지막이 어떠했던가를 비교해본다면 신은 역시 교황 편을 들어주었지 않았나 싶다. 말년이 비록 쓸쓸하기는 했지만 교황은 죽어서 로마 교회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지만, 잔인무도했던 황제는 생의 말년에 황후와 장남 콘라트에게 배신을 당하는가 하면, 제후들과 결탁한 차남 하인리히5세로부터는 죽기 직전까지 갇혀 지내는, 카노사의 굴욕 못지않은 굴욕을 또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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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임영천 목사의 ‘교권과 국권 상호간의 끈질긴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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