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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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3:13-14).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지난 27일 한국 쇼트트랙 대표 황대헌 선수, 이준서 선수가 1000미터 경기에서 무난히 결승에 진출한 듯싶었으나 비디오 판독 결과 이해하기 어려운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준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로 개최국인 중국 선수가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에 한국 선수단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CAS에 제소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판정의 부당함을 공식화해 다시는 국제 빙상계와 스포츠계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억울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황대헌 선수는 이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인스타 스토리에 글을 올렸습니다. “장애물이 반드시 너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벽을 만나면 돌아가거나 포기하지 마라. 어떻게 그 벽을 오를지 해결책을 찾고 그 벽을 이겨내라.” 이 글은 미국 농구 황제라 불리는 마이클 조던의 책에서 인용한 글이라고 합니다. 정작 자신은 편파 판정의 벽에 흔들리지 않고 뛰어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는 이틀 뒤 1,500m에서 극적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판정시비의 실마리를 없애고 세 번째 바퀴부터 선두를 유지하였습니다.

 

그가 1,000m 경기에서 상처를 받고 낙심했더라면 더 나아가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전 것은 잃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소원이었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편파 판정이라는 벽을 보고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벽을 넘었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벽을 만날 것입니다. 그 벽은 이기고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돌아서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탐을 다녀왔던 12명의 족장 중 10명은 가나안 땅의 벽을 보았습니다. 장대한 아낙의 후손을 보았습니다(13:32).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벽을 본 것이 아니라, 벽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결과, 아낙 자손은 벽이 아니라 밥이었습니다(14:6-10).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벽으로 느꼈던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들을 무시하여도 싸울 생각도, 한 마디 대꾸할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인 골리앗이 벽이 아니라, 오히려 물매를 정조준할 범위가 넓은 표적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답답한 일을 만나도, 벽과 같은 일을 만나도, 쌓이지 않는 이유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 죽인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지면 답답한 일을 이길 수 있고 넘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죽이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여러 가지 일들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임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땅에 곡식을 사러 갔습니다. 그곳에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형님들에게 자신을 숨긴 채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므온만 옥에 남겨둔 채 형님들의 각각의 자루에 곡식과 돈을 넣고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생각에는 요셉은 죽었고, 시므온은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베냐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을 보내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하며 보냈습니다. “잃으면 잃으리라하는 자세, 그것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자세입니다. 그가 잃고자 하였을 때 그는 베냐민은 물론, 죽은 줄 알았던 요셉도 베냐민도 시므온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 역시 하만이 페르시아 지방의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할 때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아하수에르 왕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유대인 모두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4:16). 이처럼 십자가는 벽을 넘고, 벽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부르심의 상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푯대가 있습니다. 달려갈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시는 존귀와 영광과 칭찬입니다(벧전1:7).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때, 벽이 있을지라도 십자가를 몸에 진다면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그 벽을 이기고 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 대신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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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벽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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