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채택 9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2022/09/27 09:4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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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 박사(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기독교의 사회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앞에 주어진 시대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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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1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공동개최한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제4차 학술심포지엄에서 강혁 박사가 발제한 "<사회신조>를 통해 본 197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 사회운동-그 의미와 과제" 중 주요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주.

 

본고는 19329,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朝鮮耶蘇敎聯合共議會) 9차 총회가 가결한 '사회신조(社會信條)'의 맥락 안에서 197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노정을 성찰하고자 한다.

 

1. 1970년대 개신교 사회운동

 

1)도시산업선교

 

산업선교는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가 공장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산업전도' 착수를 결의하여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활동한데서 시작한다.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5개 개신교 교단을 중심으로 계몽·홍보활동, 선교기구의 설립, 공장목회, 평신도 조직 육성, 실무자 양성, 근로현장에 대한 조사·연구활동 등을 주도했다.

 

초기 산업전도는 순수 복음전도에 그 초점이 맞춰졌다. 산업전도 실무자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노동윤리를 내면화 하여 열심히 일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1960년대 접어들면서 기존의 산업전도 방식은 한계에 달했고, 산업전도 실무자들은 고용주 편에 서 있는 세력으로 인식되어 노동자들에게 외면 당했다. 이후 1968년에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4차 총회에서 정리된 하나님 선교(Missio Dei)’신학의 영향 아래 산업 전도는 '도시산업선교'로 전환 되어 복음화와 사회정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선교정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도시산업선교가 노동자와 빈민 등 근대화에서 소외된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게 되자 저임금 정책 아래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추진하던 기업이나 정치권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한 직접적인 탄압과 함께 여론 및 교회지도자들을 동원하여 도시산업선교의 활동을 방해했다. 산업선교에 대한 정부의 공격과 용공활동으로의 매도에 대응하여 19789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산업선교 신학선언을 발표하여 산업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고,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선한 사마리인의 정신을 따라 시정하려는 선교활동임을 천명했다.

 

도시산업선교 활동은 자연스레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특히 19798YH무역사건은 박정희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정부는 도시산업선교를 YH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고 산업선교의 실무목사들이 근로자들을 선동하였다고 매도하였다.

 

2)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함께 1970/80년대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의 노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이다. 도시빈민선교는 19698월 미국 연합장로회 선교사 화이트(H.White)가 내한하여 연세대학교 내에도시문제연구소를 만들고, 노정현 박사가 소장이 되어 도시문제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실무자 훈련에 주력함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경제호황으로 이루어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 노동자들은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었다. 1967년 당시 서울에 무허가 건물은 233천 가구였고, 이 건물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은 127만 명에 달했다. 1970년 초가 되자 당시 서울 인구 600만 명 가운데 대략 30%가 무허가 판자촌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는 제대로 된 행정계획도 없이 대규모의 판자촌을 철거했고, 10만 명의 철거민들이 급조된 위성도시인 경기도 성남 등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과는 달리 그 어떤 주변시설도 없이 산 중턱에 천막만 들어찬 이주단지의 열약함에 분노한 이들은 1971810일 소위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719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서울의 빈민지역이었던 답십리에 센터가 설립되는 등 도시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는 빈민지역에 가서 일할 실무자를 파송하여 청계천 철거민 이주, 통일상가 세금문제, 지역사회조직과 훈련들을 실시했으며(1971), 이듬해에는 광주(성남)단지, 인천동구지역, 뚝방지역(송정동), 남대문 시장지구에 실무자를 각각 선정하여 본격적인 도시선교를 시작했다.

 

노동력의 도시 집중화와 더불어 수출품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정부가 시행한 저곡가 정책은 자연스레 농촌 경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에 먼저 관심을 가진 곳은 천주교였다. 천주교는 1966년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하여 지역별 활동을 개시하였고, 1972년에는 전국단위의 활동을 시작했다. 개신교는 1974년부터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농민교육을 실시하여 농민운동가들의 이론적 기반을 튼튼하게 했다. 19823월에는 전국적 조직을 갖춘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이 창설되어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나갔다.

 

3) 인권 및 민주화 운동

 

김상근은 한국개신교가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유신개헌 반대 투쟁에 나섬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19721017일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반헌법적 권력남용이었다. 서릿발 치는 유신체제에 맨 처음 저항한 것은 개신교 내의 젊은 진보적 저항세력들이었다. 422일 남산부활절연합예배 당시 수도권 도시선교위원장 박형규목사, 실무자 권호경, 김동완 전도사 등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학생 나상기, 황인성, 정명기, 이상윤, 서창석 등이 민주회복과 언론자유, 현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며,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했다.

 

520일에는 <한국그리스도인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기독교 민주화·인권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 선언에서 유신은 국민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국민의 요청임과 동시에 교회의 역사적 전통이라고 천명한다. 이후 6월 말이 되자 남산부활절연합예배 관련자 전원이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물론 가맹 교단들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구속자들의 조기석방을 위해 조사 및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기도회 등을 통해 민주화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각 신학대학 교수·학생 및 각 교회 청년들이 앞장서 구속자 석방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정부에 항의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인권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이에 대한 교회차원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31123일과 24일 신앙과 인권협의회를 열어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인권탄압의 해결에 기독교인들이 나설 것을 촉구한 이 선언은, 인권 확립을 위해 교회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이 무렵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정권은 19741월 새해 벽두에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에 의하면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모든 행위를 금하였다. 같은 해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중·민족·민주선언등을 발표하고 연합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을 가졌는데 이것이 사전에 당국에 알려져 관련자 1,024명이 점거되었고, 이중 8명이사형언도를 받고, 수십 명이 무기징역부터 15-20년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정부의 인권 탄압이 심해지고 기독교인 구속자가 늘어나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5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성서적 신앙에 의거하여 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수행할 인권위원회를 창설하였다. 구속자 석방과 유신정권에 대한 교회저항이 들불처럼 타오르자 각 교단들도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749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9회 총회가 선언서를 발표한 것을 비롯해서 장로교(통합) 59회 총회가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2회 총회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197412월엔 대한예수교장로교(통합) 총회장의 이름으로 시국과 관련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4개 항목의 요구사항이 담겨 있었다. 첫째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인사들에 대한 조속한 사면, 둘째는 강제 추방된 미국 감리회 선교동역자 죠지 오글 목사에 대한 추방령을 해제하고 그의 재입국 선교활동을 허용할 것, 셋째는 국론의 분열을 방지하고 국민의 능동적인 총화를 성취하기 위해 음성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정보기관의 종교사찰 행위와 공포분위기 조성 등을 즉각 중지할 것, 넷째는 창조적이고 양심적이며 건설적인 비판이 탄압 받지 않는 자유민주사회가 회복되어야 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교회의 인권운동 세력이 서릿발 날리는 독재정권의 탄압을 견딜 수 있었던 지원은 WCC와 독일교회 그리고 기타 해외교회들과 재외 한인동포 기독인들로부터의 지지였다.

 

2. 한국교회의 통일·화해운동

 

1980년대 후반은 국내외적으로 큰 변혁의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는 1985년부터 본격화된 소련의 개혁노선이 대내적 페레스트로이카와 대외적 평화 전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주의권의 해체와 탈냉전을 촉발했다. 내부적으로는 19876월 항쟁을 통한 직선제 개헌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에 자신감이 넘치고, 통일운동이 활성화된 시기였다.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1980년 이전까지 통일운동은 오직 정부의 몫이었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를 것 없이 국가안보라는 미명하에 통일에 대한 모든 정보는 국가가 독점했고, 독점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는 상대를 악마화 하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했다.

 

한국교회 역시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의 통일정책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고, 과거 전쟁의 기억 안에서 반공적인 성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그간 진행되었던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관점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반공의 첨병으로 그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북한교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국내에 소개했고, 통일에 대한 제한된 정보를 당국이 아닌 세계교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독일개신교회연합회(EKD)가 제4차 에큐메니컬협의회을 개최하여 한반도 통일 문제를 화두로 삼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1981년과 1982년 양국 정부의 통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해외동포 기독교인들 간에 만남이 주선되었다. 1차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2차는 헬싱키에서 만나 남북 화해와 통일 그리고 통일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자세에 대해서 나눔을 가졌다. 그러나 아직 국내의 사회 정치 상황에서 통일을 언급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세계교회는 계속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꾸준히 언급했다. 198410월 세계교회협의회는 동북아시아 정의·평화 협의회를 개최하여 한국기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남북 양 정부 역시 이에 호응하여 남북 이산가족찾기와 고향 방문 등을 추진했다. 198692일에서 5일까지 세계교회협의회는 스위스 글리온(Glion)에서 1차 남북기독자협의회를 주관했다. 남북의 교회 대표단은 글리온에서 함께 만나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1차 글리온 회의는 서로에 대해 어떤 특정 입장을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남을 통한 교류를 넓혀 가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남북 교회의 대표들이 함께 성만찬을 나누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보듬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약 2년의 시간을 준비하여 19881123일에서 25일까지 남북교회는 2차 글리온회의를 가졌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약 2년 동안 준비 기간을 가져 1988229일 제37차 총회에서 소위 '88선언'으로 명명되는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을 발표하여 채택했다. 이 선언서는 먼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전통을 밝히고, 이후 민족분단의 현실에 대해서 논한다. 또한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이후 민족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을 선언하며, 남북한 정부에 대한 한국교회의 건의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민족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에서 선언문은 그 원칙을 1972년 남북 간에 최초로 합의된 7·4공동성명에 나타나는 1)자주 2)평화 3)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의 3대 정신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2차 글리온회의1차와는 달리 서로에 대한 친밀도가 있는 상황에 있었고, 나눔 역시 화기애애했다2차 글리온회의를 통해 남북교회는 서로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글리온 선언을 발표했다.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팽팽히 맞서 선언문의 도출까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선언을 통하여 남북교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선언이었다.

 

본 선언문은 서론에서 1986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채택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1988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및 동년 4월 인천의 (조선)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 세계대회의 메시지 등에 나타난 정신과 합의사항 등에 대한 지지를 표한다. 이후 신앙의 결단으로 한(조선)민족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것을 다짐한다. 이후 8가지 건의를 통해 남북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꾸준히 노력 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가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을 발표하자 다수의 개신교 교단과 단체가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개중에는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만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만남을 무산시키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가 되자 한국 개신교의 보수성향의 교단들이 하나·둘 북한 선교를 시작했다.

 

짧은 기간 안에서 고도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지만,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출렁인다. 1932년에 그랬듯, 1970년대 이후와 21세기의 사반세기가 다가오는 현재까지 그 출렁임이 변함없다. 늘 인권의 사각자리에 놓인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억압되고, 절망한다. 19329월에 채택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조는 채택 이후 오늘날까지 무효화되지 않았다. ,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신조로서 그 법적 유효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는 한국교회에 있어 근대 인권과 노동에 있어서 기본규범이 될 뿐 아니라, 시대의 요구 안에서 재해석되어 지며, 그 정신을 발전시킬 한국교회의 거대한 실천적 믿음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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