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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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21:42).

 

왕명에 의하여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리석을 골라 궁궐을 짓는 건축자가 있었습니다. 돕는 자가 끙끙거리며 돌 하나를 주워 왔습니다. 그러자 건축자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이봐. 지금 우리는 임금님의 전을 짓고 있는 거야. 여긴 아름답고 멋진 돌이어야 해. 이따위 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이야. 당장 버리도록 해그러자 돌을 지게에 지고 왔던 사람은 절벽이 보이는 곳에 그 돌을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절벽 위에 간신히 걸쳐 있는 한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 훌륭한 산 돌인걸. 이렇게 좋은 돌을 버리다니. 이 돌을 주춧돌로 삼아 언젠가 잠시 머무를지 모를 왕의 처소를 마련해야지라고 하며 여러 해에 걸쳐 사람들을 동원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몇 년 후, 왕은 자기의 궁궐을 짓도록 명했던 건축자를 찾아갔습니다. 건축자는 매우 화려하고 빛나는 궁전을 임금님께 보였습니다. “, 훌륭하군!” 임금님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미세하지만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 기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이 준엄하게 건축가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집은 궁전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구나.”

 

임금님은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궁내로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신하 한 사람과 함께 잠행하였습니다. 어떤 한적한 곳에 이르자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견고해 보였고, 주변 경관과 잘 조화된 운치 있는 집이었습니다. 주춧돌과 기둥을 보았는데 어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선비로 변장한 임금님은 건물주에게 그 집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건물주는 자기가 임금님을 사모하는데 언젠가는 자신의 집에 머물 거로 생각하여 직접 설계하고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감격하였지만, 이내 모르는 척하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동행하였던 신하를 보내어 건물주를 데려오게 한 후 큰 포상과 함께, 많은 돈을 들여 그 집을 샀습니다.

 

이 글은 본문과 연결 지어 만들어 본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나온 건축자들은 그토록 훌륭한 산 돌을 왜 버렸을까요? 성경에서는 건축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전3:10). 여기 지혜로운 건축자로 표현된 것처럼 본문에서 나오는 건축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19-20).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지혜로 예수님을 버렸고 자기 꾀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라고 말씀하시자 말씀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그들에게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67-68). 육신은 무익하다는 말씀에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 제자들은 거기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성공, 물질적인 복, 건강, 명예 영광 등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그런 것들이 차지 않았을 때 실망하여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 것은 혈육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6:17).

 

혈육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혈육이란 친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혈과 육, 곧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16:16).

 

이상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관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혈과 육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분별하게 됩니다(5:21).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것뿐입니다. 더욱 겸손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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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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