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칼럼
Home >  칼럼  >  기독시선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독시선 기사

  • (경현수)길
    길 이 영 성 한 번 쯤은 발길이 닿는 대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떼가 있다 영嶺 넘는 저 구름의 한 떼 길 잃었다는소식 들어본 적 없으며울고 넘는 박달재에도 길은 있었다모세가 지팡이로 가르던 바닷길 행성이 도는 궤도의 하늘 길 낙엽이 떨어져 나뒤굴던 좁은 골목길숙성된 이야기가 숨 쉬는 둘레길 태풍도 길을 내면서 간다.한 번뿐인 생, 벼랑길이나 사막 같은 별의별 길 다 다닐지라도좁은 길로 가라는 말을 잊지 않음은 생명길이기 때문이리라 내 본향 가는 나그네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밤낮 없는 돌보심의표징表徵生은 길에서 시작된다. 오래전의 이탈리아의 명화 ‘길’(La strada)의 젤소미나를 떠올린다. 길 위의 광대와 백치소녀의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생은 누구나의 공통된 은유적 길이 되고 있다.해로, 육로, 항로 실핏줄같이 지상과 우주 공간에서 조차 길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로버트 푸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먼 훗날 나는 어디에선가 / 한 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 푸로스트의 시에서 삶의 내면적 깊이에 이르게 되며 자아를 성찰하기도 한다.유일하게 인간만은 길을 잃고 미로에서 헤매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구름은 길을 잃지 않는다고 노래하고 있다. 험준한 박달재에도 길이 있고 태풍도 길을 내면서 가고 있다고, 모세가 지팡이로 가르던 바닷길은 절대적 창조주의 섭리하시는 길이었음을 안다. 길을 잃을 때에는 기도하게 된다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된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되고 목적이 있는 삶의 길이 환하게 열리리라고... 한 번 쯤은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있어도.
    • 칼럼
    • 기독시선
    2019-01-04
  • (경현수)그 섬의 두 천사
    그 섬의 두 천사 맹 숙 영 그 섬의 생긴 모양 어린 사슴 같아 사람들 소록도라 이름하여 불렀네한 번 들어가면다시 나올 수 없는 혈육의 부모 형제도 돌보지 못하네 고통의 불치병천형의 지옥섬이네 그 곳에 날개 없는 두 천사 찾아 왔네 꽃다운 이십대에지구를 반 바퀴 돌아낯선 땅 낯선 언어 척박한 곳에서 보수 한 푼 받지 않았네본국 수녀회에서 보내오는생활비까지 보태었네 한센인도 못 만지게하는 환부를맨손으로 직접피고름 만지며치료와 돌봄으로청춘을 불살랐네43년 동안 그들은 살아 계신 천사였네그들의 이름은 마리아와 마가렛이네 숭고한 삶을 살아가며 국경을 너머 봉사와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시의 모티브가 바로 천사와 같은 두 분 수녀다. 시인은 시로서 말 할 뿐인데, 무슨 蛇足이 더 필요할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에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소록도에서 젊은날의 전 생애를 헌신한 碧眼의 여인, 세상은 냉랭하고 인심도 사나운, 그래서 흡사 복음의 황무지와 같은 이 곳에, 시인은 시 全文을 통해 삶의 궁극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답하고 있다.이 시는 바로 마리안느와 마리아에게 드리는 獻詩가 되지 않을까, 고귀한 신앙심과 사랑의 실천은 모든 난관과 고통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이역만리에서 땅도 설고 물도 설은 이국의 섬에 그 생애를 가두어 두고 헌신한 두 분 천사를 기리는 시인의 심성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43년간의 긴 세월을 한센 환자들과 함께하면서 되레 행복했노라고 고백하였던 두 분의 생애 아무도 그 은혜를 보답할 수는 없지만 하늘의 영광이 두 천사께 내내토록 함께 하시리라고...
    • 칼럼
    • 기독시선
    2018-12-24
  • (경현수)언니
    언니 정 영 애캄보디아 관광지마다어린 동생들이 몰려다니며 조악한 물건들을 판다언니, 부채 1달러언니, 팔찌 1달러언니, 사랑해요처음 본 언니를 한 눈에 사랑해 버리는 캄보디아 동생들초롱초롱 계산 굴리며 나의 모국어까지 끼워서 판다우리들의 언니는박수근 그림의 아기 업은 소녀처럼동생을 업고동생 대신 야단도 맞으며가난과 바꾼 억척의 몸으로공장과 만원 버스, 눈물 같은 술잔에 제 몸 녹여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린 언니의 역사가 있다캄보디아 부채를 몽땅 사주어도 저 동생들이노을빛 기침 소리를 쿨룩거리던 해쓱하고도 빈혈 같은 언니라는 이름의 족보를 알까타국에서 고생하는-언니 1달러면 살 수 있는캄보디아 언니 여행지에서 굳이 눈여겨 보지않고 지나칠 일, 잠시 실소에 그칠 순간의 풍경에 눈길을 멈추고 놀라운 포에지를 포획하고 있다. 비감과 풍자를 병치하여 민첩과 기지가 예리하게 시 전문을 이끌어가고 있다. 시인은 언어의 鍊金術사 라고도 한다. 캄보디아의 언니와 우리들의 언니, 엉뚱한 이질성 앞에서 왠지 동질성의 悲感이 깔려든다. 언어는 시대성과 역사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삶의 몸짓이라고 한다.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 하거나 소멸되기도 하고 축약되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언니는 현대사의 흐름 가운데 숱한 질곡과 슬픔을 이겨내 왔다. 화도진 나루에서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끌려가 고난을 겪은 여인들, 가난했던 시절의 산업현장에, 만원 버스에 매달려 가족을 이끌어 간 그 언니는 나라와 가족을 지킨 위대한 언니이고 박수근의 명화 ‘아기 업은 언니’의 모성지향의 아름다운 서정의 고향이다. 1달러면 살 수 있는 캄보디아 언니, 아름다운 역설이다 경쾌한 웃음이 짠하기도 한...
    • 칼럼
    • 기독시선
    2018-12-14
  • (경현수)풀꽃으로 우리 흔들릴지라도
    풀꽃으로 우리 흔들릴지라도 김 현 숙 우리가 오늘 비탈에 서서바로 가누기 힘들지라도햇빛과 바람 이 세상 맛을 온몸에 듬뿍 묻히고 살기는저 거목과 마찬가지 아니랴 우리가 오늘 비탈에 서서낮은 몸끼리 어울릴지라도기쁨과 슬픔 이 세상 이치를온 가슴에 골고루 적시며 살기는저 우뚝한 산과 무엇이 다르랴 이 우주에 한 점지워질 듯 지워질듯 찍혀 있다 해도 세상 이치, 살아가는 일이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언제이든 간에 별로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무한한 시간과 만물이 존재하는 우주공간에는 크든지 작든지 모든 존재의 의미는 궁극적으로는 동일선상에 있지 않을까.창조주께서 지으신 우주만물 중 거대함이나 아주 작은 미물이나 미세한 원자나 분자까지도 생명이 부여되고 있다는 경이로움을 바라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은 삶의 존재론적 비감(悲感)을 바탕에 잔잔히 깔고 있다. 이미 주제에서 ‘풀꽃으로 우리 흔들릴지라도’ 라고 암시하고 있음은 짠한 감명을 이끌어 내고 있다. 작은 풀꽃이나 거목이나 우뚝 솟은 산이든지 무엇 다를 것이 있을까. 모든 만상(萬象)은 햇빛과 바람과 눈과 비를 맞으며 한결같이 그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자연은 생명체 어느 것에나 골고루 햇빛과 물과 바람까지도 배분하며 우주공간을 신비한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가 힘든 비탈에 서 있든지, 낮게 엎드린 민초의 삶일지라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주의 한 귀퉁이에 지워질 듯 찍혀있는 작은 점, 10억분의 1 나노의 입자나 거대한 산이거나 모두 흔들리며 살아가는 동질성의 숨결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 칼럼
    • 기독시선
    2018-12-03
  • (경현수)자화상
    자화상 박 정 현 내 귀는 팔랑개비 손 내미는 말마다 믿고의심도 거절도 모른다영글지 못해 내 것 주고달란 소리 한번 못하고 입 봉한 채 가슴앓이하며 미워도 못한 못난이다꿀 바른 뱀의 혀에 녹아쉬파리 입에 붉은 인주 찍고 집 날려 쉰밥 먹었다 말씀에 무릎 꿇어 배신과 후회의 가시 목에 넘기고쭈욱 발 뻗어 편한 잠잤다주님 향기로들꽃 꿈꾸며내 귀는 아침 나팔꽃 예술가들은 종종 그의 작품 속에 자화상을 그려 놓기도 하고 혹은 자전적 소설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시인의 자아 성찰과 내면의 세계를 형상화 시켜 암유적 자화상으로 감명을 선사 한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윤동주의 자화상을 대표적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본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다. 中略- 암울하던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고뇌와 시인의 아픔이 그려진 자화상이다. 박정현의 자화상은 현실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보편적 정서를 순수하게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짧은 시 한편에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가림 없이 표출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서를 묵상한다면 시인의 모습은 어리석음 조차 아름답게 다가 온다.“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 까지도 가지게 하며”“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고”“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첫 행에서 내 귀는 팔랑개비 라고 고백하지만 말씀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참 신앙인의 삶의 궤적을 엿보게 된다. 고뇌와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의인의 길은 멀기만 하지만 깊이 묵상하며 간교한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쉼 없이 간구하는 참 나약한 피조물이 아닐까? 창조주께서 섭리하신 그대로 시인의 形質이 빚어져 하늘의 것을 향하는 그 지향점에 자화상이 그려져 있음에- .
    • 칼럼
    • 기독시선
    2018-11-16
  • (경현수)야베스의 기도
    야베스의 기도 김 경 수 지경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옥빛으로 그윽한 마음의 창문을 살포시 열어 주십시오그 언젠가 우물 속에 일렁이던 사랑의 그리움당신의 품속까지 들어 갈 수 있는비단 길 그 길 위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구름과 바람의 근심을 막을 수 있는좁은 문을 열어 주십시오.그 가슴에 뺨 부비는나날이고 싶습니다.복은 한자의 의미를 빌린다면 빌 (祝)과 복(福)이 합일된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시인은 ‘야베스의 기도’를 새로운 시의 형질로 그의 기도문으로 이끌어내고 있음을 엿보게 된다. 성경에서 야베스란 인물은 그의 ‘형제 중에 존귀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일까?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기도를 허락하셨다.“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의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 하셨더라”(역대상 4: 9-10).하나님께서 이런 직설적인 기도를 허락하셨다니, 인간의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도가 아닌가? 복에 복을 더하게 하시고, 지경을 넓히고, 주의 손으로 직접 나를 도우시고, 물질과 마음과 현실의 모든 현상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달라고 구하였음은 참으로 廉恥없는 노릇이 아닌지, 하늘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땅의 것들을 구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욕망까지도 허락 하셨음에, 시인의 기도는 되레 하늘의 것만을 구하는 가장 성경적인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겸손한 야베스의 기도가 아닐까, 옥빛으로 그윽한 마음의 창을 열어 주시길 원했고, 당신의 품 속까지 그윽하게 들어 갈 실크로드가 펼쳐질, 홍해를 갈라 놓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간구 한다. 신실한 시인의 기도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기도가 아닌가, 나라와 민족의 지경을 넓혀 주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야베스의 새 기도는 올려지고 시인의 기도를 허락하게 되시리라고...
    • 칼럼
    • 기독시선
    2018-11-09
  • (경현수)시로 그린 그림
    시로 그린 그림 -호안 미로 <지평선 맞은편의 새들> 김 철 교 그림자가 없다 청정한 하늘너머 살아서 볼 수 없는 세상에는 지금 여기는스모그가 가득하고너무나 에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이마고 데이 지평선 맞은편에 있는 나라의 새들은 우리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손짓을 하고 있다당신의 원본은 아직도오염되지 않았다고 지평선 맞은편에 있는 새들이 사는 곳, 그 곳이 곧 에덴일까? 인간의 에덴동산으로의 回歸는 가능한 것일까, 성경에서 이미 그 해답을 명징하게 밝히고 있음에도 시인은 여전히 꿈을 놓지 않고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한 편의 시, 한 폭의 명화를 同一한 포커스에 맞추어 놓고 있다. 큐레이터의 진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몽환적이고 시적인 환상의 세계를 창조한 스페인 거장의 소박한 명화 한 폭이 기어히 한 편의 시적 모티브가 되었다. 호안 미로는 시로 그림을 그렸고 시인은 그림으로 시를 빚었다. 새들이 사는 나라는 에덴동산이고 소박한 기쁨의 정원이 아닐까, 그러나 너무 멀리 와 있다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원본이었노라고 고백 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지상에는 그 거룩한 모습의 원본이 없다. 이마고 데이... 아담과 하와가 몰래 선악과를 따먹기 전 까지는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였음을, 인간의 괘도 이탈 후 하나님의 계획은 수정되었음을, 지평선 너머의 새들의 손짓은 새로운 피조물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롭게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는 모습이 새로운 미래이기를 시인은 갈망하고 있지 않는가.
    • 칼럼
    • 기독시선
    2018-10-26
  • (경현수)에덴의 덫
    에덴의 덫 민 영 진 먹어서 안 된다면 먹음직해도 안 되지 만져도 안 된다면보암직해도 안 되지 먹어서 죽는다면탐스럽게 보여도 안 되지 피조물이 사는 에덴 사람 가까이 덫을 놓는 심술 아름다움 살피는여인의 심미안도 유죄다여인의 착한 몸짓 따라 열매 맛 탐한남자의 미각도 유죄다 위험한 물건 피조물 가까이 두고그들 시험하는 건창조주의 원죄 아닌가? 바람 찢어지는 소리에허공 우러르는 두 사람하늘이 무섭다최초의 이 공포 누가 창조한 거냐 에덴동산은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여 만드신 하나님의 동산이라고 한다(창 2: 8-15). 구약성경 헬라어 번역본에서는 에덴동산을 기쁨의 정원 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에덴은 인류 최초의 고향이지만 영원히 닫혀버린 고향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영원히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으니, 달랑 가죽 옷 한 벌 받아 입고 알몸을 가린 채 추방되고 말았다. 이 기막힌 사건 앞에서 인류의 역사는 새롭게 낯설고 험난한 길을 가게 되었다. 에덴에서 하나님의 금령이 되레 창조주의 원죄가 아니냐고 대드는 인간의 어처구니없는 항변을 시로 형상화 시켜놓고 있다.시인은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덫을 놓으셨다고 역설적으로 항변하고 있다. 덫은 원래 사람이 짐승을 잡으려고 설치해 놓는 기구를 일컫는다. 우주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신, 더군다나 아름다운 동산에 덫을 놓다니, 되레 하나님께 창조주의 원죄라고 대든다. 무슨 발칙한 버르장머리 인가? 시인의 철없고 무모한 궤변을 들으시고 빙그레 웃으실 듯하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어리석고 어린애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인간이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있을까..‘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 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 할 것이로다’ (롬11: 33) .
    • 칼럼
    • 기독시선
    2018-10-19
  • (경현수)파문
    파문 오 정 숙 골고다 언덕에서 흐르던 물과 피 어둠을 밝히는 빛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곧 기적이 되어 막힌 담이 헐리고, 길이 열리고죽은 나무에 움이 튼다우물가의 여인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파문은 사라지지 않고나라와 나라를 건너 이천년은 흐르고척박하고 마른땅을 적신다누구도 막을 수 없는 골고다의 파문으로시냇가의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고 흔적을 입은 증인들은 다시세상 끝까지 파문을 일으킨다 신앙시에서 경계해야 되는 독백이나 정서적 과잉 노출을 찾아 볼 수 없는 절제된 시 한편을 만나게 되었다. 제목에서 이미 은유적 상징성을 알게 된다. 퍽 유니크한 감동을 준다. 전문의 흐름은 고요한 깊이의 신앙심을 읽게 된다. 이 짧은 시 한편에서 역사적인 인류의 구원 사건을 시로 형상화 시켜놓고 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성경이야기가 군더더기 없이 정렬되어 있다.스토리 텔러의 이야기를 듣듯, 복음서를 주석 없이 읽어버린 듯 아픔과 비감에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잔잔한 파문의 물비늘이 흐르는 강물 위로 넘실거리며 끊임없이 흘러 오대양으로 흘러가듯 골고다의 십자가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복음의 나팔소리, 광야와 매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여호와의 영광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라 하신 약속, 참 놀라운 파문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8-09-21
  • (경현수)흔들리는 꽃들
    흔들리는 꽃들 김 장 순 등에는 붉은색 흰색 보자기 책가방을 메고학교로 가고 있다, 작은 꽃들이 빨간 손 호호 불며 달리기도 하고도란도란 어깨동무 하며 장난도 치고작은 발길을 한 발짝 한 발짝 옮기고 있다밭두렁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 흔들리고 있다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지만 작은 하늘을 멀리 달려가고 있다 꽃들이 움직이며 피어나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작은 꽃이다. 그 때 어려운 시절이 있었는가? 묻는 다면 아롱져 오는 시간의 회로를 되돌리며 잔잔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책보자기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녔던 그 시절의 사람들 가난해도 행복했었다고, 가장 소중한 시절이 시인의 이 시간을 지켜주고 있지 않을까, 완성된 경험이 그 기억의 축적이 더욱 심화되어 모두의 정서에 스며들어 함게 공감하게 된다. 시인은 늘 작은 꽃이다. 작은 발걸음이 한 발짝 한 발짝 삶을 강인하게 붙들고 있다. 빨간 손이 겨울을 견뎌왔다. 도란도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도 배워 왔다. 코스모스는 밭두렁에 묶여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지만, 느닷없이 꽃은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하늘은 광활하고 푸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무한대로 열린 우주 공간에 꽃들은 움직이며 피어난다.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꽃의 群舞가 가을을 더욱 찬란하게 치장하고 있다.보자기 책가방의 작은 소녀가 흔들리며 쉼없이 꽃을 피우고 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8-09-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