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칼럼
Home >  칼럼  >  통일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통일칼럼 기사

  •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전격 폭파
    코로나 바이러스로 국내외 경제와 문명의 터전이 조롱 받고 있는 상황에서 4.27 판문점 선언과 9.19 군사 합의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우려스러운 남북 평화프로세스가 깨어지는 듯하다. 20년 전 6.15 선언이 원천무효화 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염려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역사는 예측할 수도 없지만 사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측 되어지는 일이었다. 북의 비핵화를 위한 북한의 경제번영을 위한 미국과 유엔의 지원과 지지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한 영변 핵시설 파괴와 이에 상응하는 지원이 뒷받침 되지 않고 하노이의 협상이 파괴되어 긴 시간을 기차 여행을 통해서 갔던 김정은 위원장은 빈손으로 돌아 왔다. 북한의 존엄은 북한 민중들에게 낯이 서지 않았고 자존심과 자존감은 심각하게 손해를 보았다. 다음 신년사를 통해서 남한의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 금강산 재개와 개성공단 재개를 제안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유엔제재와 미국의 압력의 눈치를 보며 반응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때의 신년사가 적기였다. 남북 철도의 재개 등을 내 세웠지만 여전히 미국의 압력과 유엔 제재라는 핑계를 대며 주제적이고 자주적인 행동을 머뭇거리고 이런 저런 애매모호함으로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신뢰 관계를 심화 확대 할 수 있는 모든 때를 놓쳐 버렸다. 이제나 저제나 우유부단한 문재인 리더쉽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워 버릴 수 없다. 세 번의 남북 정상들이 만나며 판문점과 평양, 백두산 정상에서의 기쁨을 나누며 한반도 평화협정을 이끌어 내며, 민간 교류를 활성화 시키며, 마침내 평화 통일로 가는 길을 열줄 알았는데 다시 오기 힘든 민족 분단 극복의 호기를 놓친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온 세계가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유엔과 미국의 경제 제재 속에서 북한 경제는 고난의 행군 이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국내외적인 어려움으로 존엄의 낯이 북한 인민들에게 서지 않는 현상이 빚어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착하고 겸손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나름대로 착하고 정직하며, 성실하고 진실성이 갖추어진 인간성이 풍부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 촛불혁명의 지지와 힘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의 정치적 역량의 발휘로 대통령의 자리에 선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지만, 하나씩 잘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남북문제를 20년 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현상이 된다면 문대통령의 치적이 많다하더라도 부질없는 하나의 대통령, 무능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 75년의 분단의 역사, 민족세계전쟁(6.25)의 민족상잔이 일어 난지 70년이 되었다. 남북의 문제가 이렇게 도자, 친일과 독재, 학살, 사기 농단, 분단 팔이 세력들은 일제히 남의 일처럼 공격을 해 댄다.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경제적 어려움도 쉽지가 않은데 업치고 덥친 격이다. 개인 간의 문제도 쉽게 풀 수 없다. 하물며 강대국들에 패권과 자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분단 75년의 세월이 쉽게 해결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어찌해서 분열과 이간질, 서로의 질투심과 시기심, 그리고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욕망의 존재들을 만들어 이토록 고통과 고난을 겪으며 존재하도록 하는가? 이러한 전쟁과 욕망의 도구를 통해서 무슨 문학과 예술, 문화와 과학을 예찬하도록 한단 말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독자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바치라고 명령한다. 창세기 22장의 이 이야기를 덴마크 코펜하겐의 실존 철학자 키엘케골은 신과 자식 사이에서 말 할 수 없는 고뇌를 하지만 결과는 이삭을 바치게 되고 신은 이러한 것의 믿음을 보고 여호와 이레라 준비한 양을 제물로 대신하고 이삭을 살린다. 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차원이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으니 인간이 만든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7-07
  • 문명의 대 전환과 한반도
    포스트 코로나로 사람들은 지쳐간다. 더구나 없는 자와 민중들의 삶은 초조와 불안과 생존의 싸움으로 맥이 풀려간다. 한반도의 시계는 다시금 평창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극도로 고조된 남북의 긴장 상태는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평화적 무드가 조성되고 남북정상이 짧은 시간에 세 차례나 만나며 통일은 아니더라도 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을 이끌어 내며 당국자들의 교류를 넘어서 민간교류 활성화를 기대했었다. 북미회담의 중개자로 사실상 당사자로서 남북의 문제를 여전히 외세에 의존해야 하는 흐름을 유지해 왔다. 대통령과 북한문제 담당 참모들이 뻔질나게 왕래하였다. 그러나 국제 장사꾼인 트럼프와 그 참모들은 사실상 북한과 남한 정부를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여전히 남북의 분단을 가로막고 지속 영구화 시키는 것은 미국의 세계적 패권과 그들의 자국 이익의 정책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악한 세력 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할 길이 없다. 북한을 비난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소위 탈북민에게 자금을 수혈하는 배후가 드러난 상태이다. 여기에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은 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자국의 이익을 먼저 계산한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등을 외세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 모든 소통 관계를 끊었다. 물론 단순하게 전단 살포만이 그 이유는 아닐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 문제는 코로나 훨씬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양극화의 문제가 인간들의 관계를 갈등과 적대적으로 심화 시키고 있다. 이것은 구조악을 만들어 온 자본과 권력의 결탁의 결과이다. 삼성 이재용의 재벌 세습을 위한 합병의 문제는 자본과 권력의 비열한 야합의 대표적 예이다. 코로나를 해결하려는 대통령과 정부의 다가적인 움직임은 당연한 직무의 처사이기도 하다. 인간의 복잡한 문제들을 대통령이 다 풀어줄 수는 없다. 닥쳐오는 재난과 재앙들을 한 사람이 풀어줄 수는 없다. 이러한 현실들을 운명이라 치부하고 어떤 이들은 신의 뜻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자들도 있다. 개인 각자가 당하는 실존적 문제들을 혼자서는 풀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국가나 공동체가 함께 해야만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지구상 어디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로 괴로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실존 뿐 아니라 국가나 나라의 문제, 양극화와 절대적 빈곤과 굶주림의 문제들도 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이 문제를 대처하지 못하는 민중들의 아우성과 외침들이 들려온다. 이럴 때에 종교적 아편 주사를 들고 이단과 사이비 사교들의 교주와 집단들이 춤을 춘다. 의학의 발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코로나에 떨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후의 인간들의 문명사는 새로운 시작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인간들은 핵무기 뿐 아니라 각종 화학적 무기와 세균 전쟁을 준비해 왔다. 지구촌의 기후와 함께 당과 바다의 오염 들돠 썩어 가는 문제들, 그리고 에너지의 고갈과 새로운 에너지의 개발문제, 식량의 위기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우리가 살아 온 문명사의 대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생각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들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는 진리는 버려서는 안 된다. 인간들이 소유하고 소유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먼지와 티끌로 돌아가 썩어 없어질 것들이다. 물질에 대한 욕구를 위해서 신의 이름을 앞 세원 거짓을 일삼는 악마들의 춤이 멈추지 않는다. 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악한 세력들이 우글거린다. 문명을 만들어 오고 그러한 전환의 주체는 결국 인간 자체이다. 무기를 만든 자도 전쟁을 하는 자들도 인간이다. 탐욕의 바벨탑을 쌓아 가는 자도 결국 인간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혈족과 학연 지연들의 관계를 넘기 어렵다. 특히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정서 안에서 이러한 3대 관계적 기반을 흔들기는 어려운 것이다. 어디나 끼리끼리의 집단과 패거리 집단 문화를 넘어서 가기는 힘이 든다. 그러나 조선의 진정한 선비는 적어도 公과 私의 문제는 넘어서야 하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의 길을 가는 자라야 만이 선비로 등록 되는 것이다. 하물며 창조주를 말하고 그것을 매일 강단에서 설교 하는 목사라면 당연한 처사가 아닌가? 코로나를 통해서 문명의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에도 교회는 여전히 화석화 되어 그 자리에 멈춰 있기를 바라고 있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6-12
  • 포스트 코로나와 삶의 근거
    가열차게 세계화를 선언하고 지구촌을 1일 생활권으로 추진해 오던 삶의 근거가 코로나 바이러스 진행 과정에서 터가 흔들리고 있다. 여기에는 단순히 종교적 부분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 온 모든 영역이 혼돈의 상황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인간들의 역사는 그 이전과 마찬 가지로 서로의 지배 영역을 확장 하려는 정복과 전쟁을 그치지 않았다. 서구 중세 천년을 지나면서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는 교권 즉 교황 권과 세속 권력의 갈등과 긴장 혹은 타협과 공존을 살아오면서 서로의 유익을 추구해 왔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 오는 동안 기독교는 선교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들의 지평을 세계 곳곳으로 확대해 가는 식민지를 다져나갔다. 중동 지역에서 탄생한 기독교는 수도원 운동의 문화 전달자를 통해서 유럽 즉 서구 세계의 르네상(문예부흥)의 길을 열어 놓았다. 고대 문헌들을 파피루스(갈대 조각)나 양피지에 복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접하게 하고 이러한 것은 근대 대학, 옥스퍼드나 소브리노 등을 세우게 되는 학문적 토대와 문학 등 예술 분야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단지 서구 사회 문화와 역사를 통해서만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발전 된 것은 아니다. 동양 문화는 이러한 서구 문화 이상으로 세계사를 형성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일에 토양과 영양분을 넘치도록 제공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사적 과정은 이성과 학문의 발전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들의 모순 덩어리들을 해결한다는 낭만적 사고와 이성의 신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몸부림치며 자신감을 굳혀 오는 동안 인간의 교만과 오만, 자만이 폭주하고 흘러넘치는 현상을 빚어왔다. 종교, 특히 성서를 믿고 그 삶의 방향과 터를 삼고 온 기독교, 교회들은 사이비 이단 사교들뿐 아니라 정통을 주장하고 나름대로 건전한 성서적 이해를 해 온 모든 존재 자체들까지 나름의 처절한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으면 더 독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올 것이 분명하다. 아직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과학, 학문과 기술들의 삶을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극복해 온 것처럼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들을 표출하고는 있다. 대구 신천지 31번 확진자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는 잠잠해 지는듯하였으나 이태원 클럽에 참여 했던 청년과 전국 클럽들에 갔던 자들의 전염들이 다시 전국을 긴장 속에 빠지게 한다. 이제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 혹은 생활 속의 거리두기 등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의 대면은 거리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항공사업과 관광사업 등 국가의 기간사업들의 터전이 흔들리고 실업은 말할 수 없는 정도로 확장되고 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될 때는 지금의 상태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악화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삶은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세계화와 지구촌의 일치는 무너지고 다시 예전의 삶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국 위주의 보호무역주의가 왕성해 지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강화될 수도 있다. 체르노빌과 후쿠마의 사건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인간들의 무기경쟁과 탐욕의 욕망은 그치지 않고 있다. 창세기는 인간의 원죄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폭력적 자연에 대한 개발도 중단하자 못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상호적인 멸시와 천대, 무시들이 존재하고 여전히 인종과 성차별 등이 존재한다. 인간들이 만들어 온 역사는 시궁창과도 같다. 비관적인 관점애서 보면 인간들의 삶은 차라리 모든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상 싶기도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들의 문명사를 새롭게 성찰하게 할 뿐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잘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화석화 되고 굳어진 바벨탑 문화의 거짓되고 추악한 것들이 새롭게 되겠는가? 인간들 상호 간에 얽히고 얽힌 분노와 증오들의 살인의 영들이 충만하다. 여전히 자기 욕망을 위한 악마의 거짓으로 서로를 속이고 속이며 페르조나와 야누스적 삶을 지속하고 있다. 서로가 자기의 기독교의 하나님을 말하며 정통을 주장하고 비난한다. 이러한 정통들의 교리를 고수하면서 허점을 들러내는 것들을 파고들며, 잠든 민중들을 영육 간에 착취하고 사기 치는 이단 사이비 사교들이 독버섯처럼 둘러싸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왕성하게 진행 중인데 미국의 트럼프와 중국의 통치자 시진핑은 패권의 전략적 대결과 싸움을 하고 있다. 코로나의 우기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진 갈라지고 찢어진 남북 이상으로 동서로 나뉘어져 있다. 심지어 이단 사이비들과 사교들이 야합하는 더러운 세력들이 널려 있다. 신천지 통일교 하나님의 교회 과거의 신앙촌의 전도관 등 이러한 종교 사이비 사교들도 바이러스와 함께 역사와 공존할 것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5-28
  • 코로나와 미래
    코로나와 함께 사는 동안 거짓이 드러났다. 그것은 사이비 이단 사교 신천지의 정체이다. 성서를 왜곡하고 잠든 민중들을 속여서 그들의 영혼을 갈취하고 재물들을 착취하는 일들이 하나의 사회적 폭로이다. 박쥐로부터 우한의 연구소( 혹은 독감 걸린 중국 주둔 미군?) 그리고 국경을 넘어 온 코로나가 대구 신천지 교회 집회 장소와 이만희 형의 장례식 병원 등으로부터 대구와 경북을 강타하여 한국 전역에 충격을 준 것이다. 31번은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잠간 나타난 악아 교주와 그 일당들의 쇼는 국민적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게 할 만한 충분한 상황으로 전개 된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세계화 지구촌 마을, 그리고 비행기 등 생활권이 하나가 된 오늘의 결과들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하나로 만들어 바벨탑을 쌓아 온 인간들의 탐욕과 교만, 오만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유럽과 세계의 미식가들이 아프리카에 있는 동물들을 그들의 입맛으로 치부한 결과들과 자연의 폭력적 개발로 인하여 바이러스를 건드린 결과로 바이러스는 동물의 기생으로부터 인간으로 강을 건너 온 것이다. 탐욕적 자본과 정복자들은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 그래서 타인과 자연에 대한 생명 파괴 등은 아랑 곳 하지 않는다. 지구의 인구 반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욕망과 욕구를 채우고자 한다. 종교(기독교) 역시 이러한 인간의 탐욕을 절제하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욕망을 정당화, 합리화 시키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인간의 욕망을 신의 이름으로 부추기며 자연을 정복하며 개발의 이름으로 폭력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호기심은 탐용을 불러일으키며 악마 성으로 둔갑하고 파괴자와 살인자가 되어 잘못 된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다. 공산주위 사회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팟쇼정권, 나치 등을 거쳐 오는 동안 인간의 타락과 악마성은 극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 미처 자신들이 서 있는 근거가 파괴 되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러한 인간의 오만함과 교만함, 거짓된 문명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인간들이 잘난 체 하는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내면 속에 악마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영혼에 선한 영이 자리 잡게 되면 생명을 살리는 심부름꾼 역할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의 풍경 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인간이 대면하는 문화가 이제는 맞대면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어야 하는 문화로 바꾸어지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이면 악을 꾀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죄 짓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 코로나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들끼리만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거리두기도 시행된다. 올바른 관계는 상대를 존중하고 함께 행복을 구가 하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간들이 만들어 온 역사는 자신들의 탐욕과 욕구를 채우는 역사로 흘러 왔다. 가부장적 남성문화에 대하여 그동안 당해 온 여성들의 분노로 인간해방을 부르짖고 있다. 폭력의 시작은 거의가 강자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대하여 약자는 생존의 저항으로 맞선다. 강자들은 이러한 약자들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서 억압과 살인을 자행한다. 경쟁문화, 카지노와 같은 도박 문화 거의 모든 광고들은 폭력물이나 성의 상품화, 혹은 악마적인 소비문화를 조장한다.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고 반성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면 거리두기가 의미 없는 더 독한 코로나 바이러스 들이 모든 문명과 역사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이제라도 파괴적 문화를 그쳐야 한다. 인간의 이성과 학문, 기슬 등으로 본래의 생명 터전을 회복한다는 오만을 버리고 철저한 자기반성과 회개를 결행해야 한다. 생명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중단하고 겸허한 자세로 공존의 길을 시작해야 한다. 상대를 정복한다는 악마적 생각과 행동들을 버리고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를 흔들고 있다. 지금까지 지탱해 온 문명의 터전을 흔들어 댄다. 종교(교회)도 성서의 본질을 상실하고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며 정복을 정당화 시키며 밥벌이를 해 온 것이다. 성서에서의 예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잔인성은 세속의 권력이나 자본가들의 횡포 그 이상이다. 이제 그러한 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종말을 고하고 진실로 예수의 마음과 성서의 정신이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살지 않으면 공멸할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이제 양의 가죽을 쓰고 이리의 노략질을 하던 것을 멈추고 예수의 삶을 본 받아 그 삶을 이 세상에 증거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억울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악하고 거짓된 사탄의 세력들을 추방하며, 병든 자들을 고치고 상처 받은 자들을 치유하는 생명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의 영광을 빼앗아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려오던 거짓되고 껍데기들을 벗어 던지고 온전한 생명들이 춤을 추는 살아 숨 쉬는 에덴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5-15
  • 포스트 코로나의 세상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한 지 몇 달이 지나간다. 미국은 박쥐에 있던 이 바이러스가 우한으로 옮겨와서 연구를 하는 동안에 펜데믹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에 반해 중국은 중구 거주 미군의 독감에 의해서 신종 바이러스로 변종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본래 바이러스는 인류와 공존하였고 이러한 바이러스를 통한 전염병은 항시 존재해 왔다. 바이러스는 인간과 공존한다. 결핵균은 우리 몸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영양이 부실하거나 면역 체계가 무너지면 결핵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세계사는 전쟁사이기도 하지만 질병의 역사이기도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 선포와 사탄(악의 세력, 귀신 마귀) 추방과 각종 질병을 치유하며, 제자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을 뒤 흔드는 변화와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적 사건이다. 인간들이 옳은 질서라고 고집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고 오만한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뒤집는다. 거룩하고 고상하며 지성소가 있는 성전 체제를 업어버리고 상을 뒤집으며 채찍을 들어 후려친다. 독사의 새끼들아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느냐고 호통 치며 꾸짖는다. 인간들이 이루어 온 역사와 문화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역천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인간들이 말하는 지배의 이데올로기 가치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때가 이르면 회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회개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모든 삶의 기준과 원칙들이 잘못 됨을 깨닫고 돌이키며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다. 숱한 공약들을 내세우고 어떤 일들을 할 것이다. 라고 말하며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내미는 면면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예수 사후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의 시기가 4세기 초까지 있었다. 전통적인 유대교와 로마제국의 권력과 그와 아부 아첨 하는 매국 세력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은 것이다. 비옥한 토지가 있는 갈릴리 호숫가의 이방인들, 흑암의 땅의 민중들은 로마의 총독과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지배자들에게 모든 것을 착취당하며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다.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이나 로마나 지금의 강대국들의 정복은 그 지배 이데올로기가 세계화이다. 지구촌을 표방한 역사는 질병도 세계적이다. 이제 어느 한 곳에 문제는 한 지역에만 한정될 수 없다. 항공이나 선박 등을 통해서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었다. 우리는 바이러스도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을 통한 질병도 예외가 아니다. 신체적으로 약자들이 면역성이 없어서 사망에 이른다. 어떤 이는 코로나 세상에서 종교가 사람 살리는 일 있냐고 말한다. 기독교가 특별한 종교라고 말하지만 역시 사람들은 종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공평하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침투하며 공생한다.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과 권력의 봉우리에 있는 자들은 우리 같은 민중들보다는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소수의 거부들은 인구를 반으로 줄이는 계회도 갖고 있다고들 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은 몇 사람들의 생명은 파리 목숨처럼 안다. 예수처럼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교회는 부흥이라는 목표를 두고 경쟁하듯 교회 성장을 꾀해 왔다. 정통은 정통대로 이단 사이비 사교들은 그들대로 몸집을 키우는 것이 그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왔다. 어느 대형 교회 목사들은 부동산의 귀재들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세워질려면 일단은 땅을 매수해야 된다. 라는 가치들은 부동산 투기를 통하여 부자들이 된 머리 빈 존재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포스트 코로나에 교회는 여전히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다국적 기업들과 초국적 기업들이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백신을 개발하게 되면 병든 민중들의 마지막 호주머니들을 털어갈 것이다.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것. 잘 산다는 것이 어디까지인가? 무엇이 부자이고 잘 사는 것인가? 목사들이 교회규모가 있으면 사족을 못 쓰고 그 교회에 가려고 한다. 그 부자들이 나오는 큰 교회에 부임하려고 발버둥 치는 자들이 목사인가? 먹사인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적그리스도 거짓 그리스도인이 양의 탈을 쓰고 활보하는 한국교회와 세계의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것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한 아마도 더 무시무시한 코로나가 세계를 덮을지도 모른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4-24
  • 질병과 인간의 공존
    인간의 역사가 장수하고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을 해 오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싸움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인간이 지구에 출현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상황이다. 세균과의 싸움에서 진 자는 죽고 살아 난 자들에 의하여 산자는 남은 자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의학과 의술을 통해서 병이 고쳐지거나 생명이 연장되는 사례는 있을지라도 세균이 완전 박멸되지는 않는다. 감기약이 있는 곳은 미주와 한국 등이 대표적이다. 감기는 면역성이 없기에 균에게 싸움에서 패배한 결과의 상태인 것이다. 우리 몸의 항체가 병원균을 이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소위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병에 걸리는 상태는 의학전문가들이 설명할 일이고 그것을 고치고 하는 여부도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성서는 맘이 약해지거나 믿음이 없거나 절망의 상태가 되는 자가 병에 걸리기 쉽고 병에 걸렸을 때 이길 수도 없는 것이다. 병과 친구가 되든지 아니면 병을 이기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을 치유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단지 기도만이 아니라 의학이나 의술도 하나님의 치유의 방편이고 선물이라고 믿는다. 아기로 태어난 인간의 수명은 평균이 칠팔십이요 길어야 90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120세에도 눈이 흐리지 않고 총명이 유지되었다. 어떤 생명은 태어나자마자 죽기도 하고 어리거나 젊은 상태에서 죽기도 한다. 기아와 굶주림의 상태에서 죽기도하고 전쟁이나 질병을 죽기도 하며 잘못된 공권력에 의해서 죽기도 하며 크고 작은 폭력에 의해서 죽기도 한다. 교통사고나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죽기도 하며 복잡하고 허술한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죽기도 한다. 태어남과 죽음의 자리에 오기까지는 숱한 사연과 이야기 역사적 상황이 존재한다. 마음이 병들면 뼈가 병든다.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가고 혼이 나가면 살아 있으나 생명의 온전함은 분열되고 깨어진다. 정신이 나간 육신은 정신병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온전한 상태는 없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성서는 병이 죄의 결과라고도 말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의 이야기는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 것은 말한다. 죄(하마르티아)는 금지된 것을 넘어 가는 상황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언약과 약속 그이 계명을 지키지 않고 어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죄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으며 용서를 얻어야 한다고 선포한다.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다. 살과 역사의 한 복판에서 정의를 이루고 이 정의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귀의 일을 멸하고 거짓과 살인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사는 것이 진정한 정의와 사랑의 양면을 이루는 일이다. 세상을 사는 동안 가장 나쁜 인간은 은혜를 배신으로 아는 배은망덕한 존재이다. 하나님과 부모에 대한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살아가면서 받은 많은 사랑을 배역하는 것이 그것이다. 역천하는 자는 망하고 순천하는 자는 흥한다. 잠재적 코로나는 많다. 아직도 새로운 코로나와 바이러스는 엄청나다. 인류는 이러한 질병과 세균과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이러한 세균과 질병을 통해서 주어 간 존재들이 많지만 이러한 질병의 원인보다 인간들의 전쟁 속에서 죽어 간 존재들이 더 많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병들면 세균보다 더 무서운 삶과 역사적 질병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들은 서로가 더 무서운 무기들을 만들고 있다. 핵무기 뿐 아니라 화학무기 여기에는 무서운 죽음의 세균들을 만들어 인간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무기를 만들기에 경쟁을 하고 있다. 쥐벼룩에 기생한 바이러스: 페스트 균과 박쥐로부터 나타난 지금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낙타로부터 발생한 메르스, 싸스 등 수많은 바이러스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인간이다. 거짓되고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삶의 한복판 황금과 돈을 우상으로 삼고 이기적인 탐욕을 사는 인간들, 마귀이 자식이고 거짓 된 인간들처럼 무서운 존재는 없다. 어둠과 악한 사탄의 세력에 붙잡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마저 상품화 시켜 장사치가 된 거짓 그리스도인들, 종교인들, 타인을 비판하며 자신의 욕심과 왕국을 만들어 가는 간교한 자들이 무서운 것이다. 세계의 지하 시장을 움직이는 종류가 의학과 관련된 상업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4-10
  • 이단과 평화
    헬라어 하이레시스(hairesis)는 이단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론 선택, 의견, 분파, 파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한문의 異端은 자기가 믿는 이외의 道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권위 자기개성을 강하게 주장하여 고립되어 있는 사람 등을 지칭한다. 정통 유대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분명이단이다. 초대교회에서 지금까지 기독교 교회사는 이단과의 싸움의 역사이다. 교회사에서 중심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Christology) 논쟁이 중심을 이룬다. 역사적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어느 한 쪽의 부정이거나 강조점을 둔다면 그것은 이단의 정죄에 해당된다.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게 되면 성육신 사건을 부인하게 된다. 동시에 예수의 신성(그리스도)을 부인하게 된면 구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예수는 참 인간이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 될 때에만 진정한 주님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구세주가 되신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죄악과 허물로 죽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낮고 천한 땅에 종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분이다.(빌립보서 1:1-11) 역사적 예수는 죄악과 허물로 죽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하여 말씀의 하나님께서 육신(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다.(요한복음 1:14) 예수는 베들레헴(떡집) 말구유에 오셨지만 우리를 구원 하시려고 로마의 권력과 그 권력에 기생하며 민중들을 착취해서 사는 불의한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죽음과 그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구주가 되신 것이다. 구원은 이 세상과 인간의 역사와 무관한 죽은 사후의 저 세상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공관 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예수는 그의 생전의 사역을 통해서 악의 세력(사탄, 마귀, 귀신)을 추방하며, 갖은 병으로부터 치유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선포하고 이러한 나라의 안성을 향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생명을 살리려 함이다.(요한 1서 4:8) 예수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요한 14:6) 사탄은 악한 세력의 통칭이다. 악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생명들을 착취하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일을 한다. 악의 세력은 그들 아버지가 마귀요 거짓말 장이이며 살인자이다.(요한 8:44) 악한 세력은 자신들이 구세주라 하거나 새 하나님이라고 하며,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만이 구원을 준다고 주장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약한 영혼들을 파고들어 속이고 거짓말하며 그들의 영혼을 파멸로 몰아가고 가정을 해체 시키며 민중들의 물질을 착취한다. 이러한 악으로 자신들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성서를 왜곡하고 곡해하며 이기적인 해석과 이해를 하며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인양 강요하고 가르치기를 열성적으로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고 성서가 말하는 진리의 실천에 있지 않다. 악한 세력들이 원하는 것은 민중들의 영혼을 속이고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 자신들은 그들의 물질과 삶을 빼앗아 자신들의 호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거나 하나님이 되는 교주로서의 황제나 군주로 등극하며 민중들에게는 절대 복종을 강요한다. 이것은 종의 모슴으로 죄인들을 섬기며 자신의 생명까지 버리며 죄악과 허물로 죽은 인간들(엡2.1-8)을 살리고 구원하려 섬기는 종으로 오신 모습과는 전적으로 배치된다. 교회가 민중들의 영혼을 속이고 거두어들인 물지로 화려한 예배당을 짓고 그 헌금으로 기업을 하가나 주식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며 부동산의 귀재 소리를 듣는 것은 분명히 반성서적 반 그리스도적 이단이다. 교회나 목사나 성직자들이 자본과 권력의 자리를 쟁취하고 그것이 곧 성공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교만과 악에 빠진 것은 분병이 반성서적 이단의 대표적 모습이다.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품화 하여 예수 장사를 하고 그리스도 팔이를 하는 것은 반성서적 이단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고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아 주었다고 설교와 거룩의 힘을 선포하면서 자신은 세속의 성공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중적 거짓말쟁이로 사는 것은 반성서적 이단이 아닐 수 없다. 말로는 민중을 앞세우면서도 그 민중을 팔아서 권력의 자리에 서 있으며 자본과 권력의 주위를 맴도는 행태는 반성적인 이단의 행태가 분명하다.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서 밥벌이 하고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이단들이 기성교회에서 극복되지 못한다면 자기의 이기적 유익을 위해서 타인의 생명을 헤치는 행위, 민중들을 속이고 착취하는 신천지나 통일교 등 이단들이 속출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을 더럽히는 이단들의 모습에서 단호히 돌아서야 한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3-12
  • 신종 코로나 앞에 선 교회
    중국 본토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코로나를 통해서 중국의 한 도시가 울타리에 갇히고 북한은 입출입을 막고 각 나라에서는 바이러스가 발생한 도시에 거주하는 자기 국민을 전세기들을 통해서 귀환을 서두르고 있다. 14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사분의 일 2500 만 명이 죽어 간 세계사에서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이러한 흑사병은 14세기 중반 킵차크 군대가 제노바 시를 향하여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제노바 시에 보냄으로써 전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전부터 동방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이 보석과 동방문화를 약탈해 오면서 부수입으로 한센씨병과 흑사병을 얻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라 전해온다. 더 정확한 것은 쥐벼룩 외에 인간을 통해서도 전염되어서 도시에 위협이 되었고 특히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원에서 가장 큰 희생을 냈다는 것이다. 페스트의 잠복기는 10일이고 40일 동안 외국 선박에 대하여 상륙허가를 내지 않았다. 일설에는 인구의 3분의 일, 혹은 4분의 일인 2500만에서 6000천만이 죽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후에도 1664년-65년 사이 런던 인구의 20%가 이 병으로 사망을 하였고 19세기 말에는 중국에서도 수많은 인명이 죽기도 하였다. 흑사병의 공포를 문학으로 서술한 책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다. 어쨌든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은 공포와 불안의 파도가 물결이 치고 사스와 메르스보다 더 바람과 풍랑이 요동치는 듯 하고 있다. 지구촌 시대, 세계화에서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질병도 세계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자본과 권력을 도모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정권을 회복하려는 투쟁과 싸움은 그치질 않고 있다. 무소불위의 검찰공화국은 최고의 권력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고 있고 총선의 목적을 위해서 질병 문제까지를 정쟁의 재료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전염병이 있게 되면 고통을 사는 사람들은 민중들이다. 자영업, 특히 식당이나 음식물을 취급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하루를 벌어서 먹고 사는 일 일 노동자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힘든 기초수급자나 차상위 계층들이 더 고달픈 삶을 살게 된다. 소수의 재벌들과 돈을 쌓아 둔 상류층들이야 이 죽음의 골짜기를 잘도 지나가지만 가난한 민중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한 삶의 늪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세우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태어남이 있듯이 죽음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의 열풍을 통해서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거짓 된 언론을 통해서 정쟁을 부추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다 지나갈 현실일 뿐이다. 중국에서 귀환을 하게 되는 같은 국민들을 지역 주민들이 받지 못하겠다는 것을 보며 정말 우리가 같은 민족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애우 학교가 들어선다고 하면 땅값이나 부동산 값이 떨어진다 하여 그것을 방해하는 인심이 허다하다. 인간들의 이기심과 자신만의 울타리를 걷어치우지 못하는 졸렬함과 억울함을 보며 인간에 대한 씁쓸함과 비정함 들을 겪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질병도 계속되고 크고 작은 문제들 역시 끝은 없다. 살고 죽는 것이 하늘에 있고 우리가 노력하는 것에 따라서 피해의 정도가 결정될 수도 있다. 썩어질 물질들에 탐욕적이고 어리석은 삶의 푯대를 삼고 사는 것이 어디 과거의 일만 있었는가? 삶과 죽음은 한 장의 종이 양면과도 같다. 하나의 티끌과 먼지로 돌아 갈 존재들의 거짓과 살인적 행위들이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소수가 세계 다수의 부를 다 차지하고 대다수의 민중들은 하루하루가 고달픈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의 부의 양극화, 대한민국의 소수 재벌 중심의 양극화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쉽게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성서가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평등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정의란 누구나가 인간의 존귀함, 존엄을 대접받는 세상을 말한다. 가짜 소식과 거짓들의 불안과 공포의 확대 재생산에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양극화가 저출산을 이루고 그 양극화는 더 깊은 계곡을 이룬다. 성서는 정의가 강물처럼 이루는 나라를 외치고 있다. 정의는 양극화가 극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른다. 평등과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 진정한 구원과 사랑의 완성은 없다. 종교나 교회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민중들을 염두에 두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소수의 자본가들과 불의한 권력에 아부 아첨을 해 오며 정의와 사랑을 버린 교회는 이미 성서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페스트나 사스, 메르스와 지금의 코로나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의한 세력과 결탁하는 것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2-14
  • 봄이 오기 전에
    한반도의 기후는 사람이 살기에 매우 좋은 기후를 유지해 왔다. 숱한 역사의 기후들이 어렵기는 했지만 삶과 죽음의 계절 속에서도 봄, 가을, 여름, 겨울의 뚜렷한 4 계절을 통해서 삶과 농사의 정서들을 아름답게 유지해 왔다. 이름 하여 삼천리금수강산이라 아니 하였던가? 서로의 신분차이와 약육강식의 싸움과 침략 그리고 일제의 혹독한 역사의 살인적 삶을 살기도 하였고 지금은 허리 잘린 분단의 삶을 살고 있다.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자연은 여전히 폭력 아래 있고 자연이 파괴다고 오염되어 썩어 갈수록 인간의 삶도 그만큼 죽음을 향하여 갈 것이다. 사랑과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삶을 기도하지만, 막상 표출되고 쌓여 가는 것은 거짓과 불의의 산만 높아만 간다. 값없는 공기만큼은 마음대로 마실 수가 있었지만 인간들의 탐욕으로 만들어진 기술문명의 현실은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희망의 싹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겨울도 반절 이상이 가고 이제 곧 봄바람이 따듯한 남쪽으로부터 서서히 불어오고 있다. 봄은 희망과 생명의 계절이다. 북미 대화가 겉돌고 껍데기 빈 소리만 들리고 남북의 관계도 깊이 꾀인 상태이다. 여전히 남남 갈등과 발목 잡는 정치계와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함께 빈자의 대물림이 계속되는 양극화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 저출산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다. 결혼도 있는 자들이 하는 것으로, 자녀를 생산할 수도 있는 현실로 확대 생산되는 분위기가 커져만 가고 있다. 봄이 오기 전에 이러한 사회적인 불평등의 뿌리를 뽑는 시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굳어져버린 경제 구조악의 뿌리를 뽑아 가는 정치와 시민운동들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이러한 운도의 중심에 역사의 변혁을 이루 온 민중들이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교회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생명의 복음을 말한다. 그런데 정말 생명의 복음을 말하고 실천하고 있는가? 사회 구조악에 침묵하며 적당히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고 타자는 비판하면서 반사 이익을 누린다. 필요한 것은 자기 밥벌이의 수단과 방법으로 삼고자 하면서 타자의 존재를 끌어내리고자 한다.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예수의 혁명적 복음 선포는 없고 잔꾀만 발달해 있다. 여전히 가난하고 억울하며 힘없는 민중들과는 거리가 멀다. 민중들을 말하는 자들도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 민중을 말과 생각의 유희로 치부한다. 어느 시대나 그 사회의 삶의 중심에서 벼두리,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민중들이 우글거린다. 악착스럽지 못하고 꾀부리지 못하며 아부와 아첨할 수 있는 거짓도 행할 수 없어서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민중들이 허다하다. 최소한 그 사회 속에서 인간의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마지막 소리마저 짓밟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사의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역사의 봄은 민중의 살과 피를 먹고 꽃 피운다.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왕과 대통령, 임금과 통치자는 민중들이 만든다. 잠든 민중이든 깨어 있는 민중이든 그들이 원하는 상을 만든다. 공권력에 의해서 죽어 간 여순 민중들 사건의 무죄는 이제라도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들이 그나마 추구해 온 가치와 삶의 온전한 의미의 추구는 삶에 대한 존재의 근거와 본질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인간들이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들은 거의가 미완성이거나 빗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봄이 오려면 겨울에 생명의 잉태를 하고 생명의 싹이 발아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봄은 분명히 우리 앞에 온다. 역사의 봄도 역시 반드시 오고 만다. 개인이든 역사이든 이 봄을 기다리며 탄식의 기도를 하며 울부짖는다. 이 한반도에 계절의 봄이 오기 전에 평화의 생명이 잉태되고 자랄 수 있는 남북한 모두의 준비 된 마음들이 필요하다. 미국도 이제는 세계 패권도 중요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도 필요하지만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의 봄기운과 환경을 도와주어야 한다. 저출산과 양극화는 하나의 문제이다. 탐욕적이 인간들이 사는 사회에서 물고 뜯으며 상호 전쟁을 하는 인간들의 삶은 평화보다는 경쟁과 갈등의 상태로 살게 된다. 히말라야의 높은 산봉우리를 등반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우리에게 도전의식을 주고 새로운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산에 묻히는 생명을 담보하기도 한다. 안나푸르나의 등반 과정에서 눈사태를 맞아 소식을 알 수 없는 교사들의 생사가 매우 안타깝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우리가 잊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생명의 문은 닫히게 된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1-31
  • 이란의 군 파병 반대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1-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서 전쟁은 평화를 위협하고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황을 영출해 오고 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은 세계는 UN을 탄생시켜서 국가 간의 갈등을 조절하고 상호 의견들을 조정하며 전쟁을 방지 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다. 전쟁은 국가 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의 갈등으로 내전도 쉬지 않고 있다. 한반도의 민족세계전쟁(6.25 민족상잔)은 또 하나의 세계전쟁이었다.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철저히 파괴하며 인간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린다.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의 참상을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전후 처리 문제로 분단된 한반도는 70여 년을 지나는 동안 끊임없는 전쟁의 위험에 직면해 왔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혁명을 바탕으로 들어서서 임기 후반까지 남북정상이 만나고 북미정상이 만나는 연출을 했지만 남북의 진정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요원하다. 비핵화 문제를 두고 미국의 강도 높은 북에 대한 제재와 생존을 몸부림하는 북의 대처로 인하여 접점을 찾아 가지 못하는 형국이다. 전쟁과 폭력의 유사점은 강자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전쟁 이데올로기의 생산은 대개의 경위 힘겨루기와 소유의 탐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의 마지막 싸움은 종교적인 교리에 근거한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는 그 역사적 뿌리가 하나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싸움은 그칠 날이 없다. 개인과 개인, 조직과 공동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생존과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갈등과 위기, 기장은 그칠 날이 없다. 죽고 죽이는 싸움과 전쟁은 불가피하다? 중동 지역의 기름 수입을 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현실적인 상황과 함께 미국의 파병 압박에 직면하여 고민이 커진다. 그러나 고민할 것 없다. 전쟁에 합류하는 파병은 있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이란 사령관의 제거는 이란과 미국의 문제일 뿐이다. 정상적인 한 나라의 국방 사령관을 제거하였다면 누구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가의 자존심도 그렇고 자존감도 그렇다. 만일 한국이 호르무즈 파병을 한다면 이란과 원수 관계가 되면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이란과의 일일 뿐이다. 종교와 역사, 문화가 다르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죽이는 살인적 행위를 한다면 전쟁을 막을 길은 없다. 전쟁은 이긴 자도 없고 진자도 없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비참한 상황만 남는다. 예수가 말하는 성서에서의 선언은 평화와 화해, 용서와 사랑이다. 끝없는 욕망과 소유의 악마에 붙잡혀 있는 인간들의 영혼은 악마적인 것을 탈출해야 하고 해방되어야 한다. 미국과의 동맹을 약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개입해서는 안 될 전쟁에 들어간다면 어리석을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비참하게 할 것이다. 이란은 미국과의 핵 협정을 사실상 포기하였고 우라늄 생산에 돌입할 것을 천명하였다. 중동이 전쟁의 분위기로 세계 경제마저 어두운 전망을 내 놓고 있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서 전쟁이 나면 무기상들은 돈을 벌지 모르지만 전쟁을 하는 나라, 특히 약소국은 파괴되며 이긴 자라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숨져간다.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이라는 점이 부담스럽고 압력을 받는다. 어떤 식이든 미국이 전쟁하게 되면 참여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이다. 특히 석유 교통지역인 호르무즈에 군사적인 협력 파병으로부터 여기에 준하는 어떤 식의 참여를 압박받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맹이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전쟁에 참여 하면 이란과 적이 될 수도 있다.이제 인류는 이제라도 진정한 평화의 길을 시작해야 한다. 팍스 아메리카의 평화나 자국의 이익을 내 세워 타자의 생명을 죽이는 전쟁은 모두의 파멸을 자초할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갈등을 평화적 방법으로 풀고 화해와 상호의 입장을 이해하는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출발을 해야 할 것이다.
    • 칼럼
    • 통일칼럼
    2020-01-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