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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다시 생명나무로 하나 되는 교회
    지난 수요일 저녁에 교구를 담당하시는 김범준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김범준 목사님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텍사스에 위치한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에서 성경적 상담 박사과정 코스웍을 마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 교회 출신인 박형욱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잘 알고 또 제가 쓴 ‘생명나무’라는 책을 읽고 정말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위한 생명나무 신학과 성경적 상담 운동"이라는 소논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하나 되는 교회’라는 설교를 하는데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설교는 전교인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도록 주문을 하거나 설명을 한 적도 없는데 본인이 알아서 생명나무 신학과 신앙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구약학자인 벤게메렌의 글까지 인용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사실 어떤 분이 제 생명나무에 대한 설교를 듣고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벤게메렌의 글과 설명을 듣고 “아, 이렇게 통시적으로 성경을 풀어낼 수 있고 통전적 신학을 세울 수가 있구나”하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벤게메렌이 직접 한국에 와서 생명나무 심포지엄을 할 때 “생명나무: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성경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소강석 목사님의 생명나무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과 성도의 교회론적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그의 연구와 특별히 목회 사역에서의 적용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생명나무 주제에 대한 신본주의적 접근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아주 적절합니다. 소강석 목사님은 우리 앞에 있는 생명과 사망의 길에 대한 선택의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이 선택의 결단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선택은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국가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범준 목사님이 아주 노련미가 넘치고 성숙함이 배어나는 설교를 한 것은 아닙니다. 좀 앳되고 순수하고 청순하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가 설교 후에 언급한 대로 본 바탕이 선하고 품성이 아주 착하신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설교도 그렇게 순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 신학을 구원사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일괄 정리를 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나무를 통해 서로 감사하며 복음의 사역에 동참하고, 성령 충만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주의 종과 한마음, 한 뜻이 되어야 생명나무로 하나 될 수 있다고 강조를 하였습니다. 제가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 제가 임직대상자들에게는 무조건 생명나무에 대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게 하려고 합니다. 신정주의 책에 대해서도 읽고 독후감을 내도록 할 작정인데요. 물론 제가 생명나무와 신정주의에 대해서 직강을 할 것입니다. 아무튼 김범준 목사님의 설교는 발꿈치 화상과 싸우고 있는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고무를 시켜 주었습니다. 실은 김 목사님이 베테랑이 아니라 우리 교회 사역을 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세상말로 초짜 되는 분이 어떻게 꼭 제가 설교하는 것처럼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을 간파하고 제가 세운 생명나무 신앙과 신학을 통시적이고 통전적으로 정리해서 현장에 맞게 적용을 잘할 수 있나, 설교 들으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이런 동역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저와 함께하는 모든 동역자들이 다 하나하나가 귀하고 또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이지만 우리 김범준 목사님의 수요일 저녁설교는 참 빼어나고도 독특한 온리 원의 설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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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2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은 왜 멈추게 하시는가?”
    지난 수요일 낮 예배는 우리 교단 전국장로회 임원 신년하례회 예배로 드렸습니다. 당연히 제가 설교를 하기로 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입원하는 바람에 고영기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중에 저의 공적 사역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셨습니다. 제가 한교총 대표회장과 연합기관 통합위원장을 할 때 했던 사역 얘기를 하신 것이죠. 그분은 제 옆에서 함께 사역을 했기 때문에 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제가 했던 연합기관 통합 사역이 9부 능선을 넘었다고 하셨습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한기총과 한교총이 통합을 하기로 상세 합의서까지 작성했고 사인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다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이견으로 인해서 지연이 된 것입니다. 그 지연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내놓고 보니까 이견을 가졌던 분들은 지연작전을 썼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이해와 자기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런 이견은 분명히 좁은 안목과 소아적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오직 공적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교총을 섬기면서 대사회적, 대정부적 성명서를 낼 때도 한기총과 함께 냈습니다. 사실상 정서적 연합, 내면적 연합은 다 이루어졌던 것이죠. 제가 일찍이 공적 사역을 해보니까 한국교회는 원 메시지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게 안 되니까 언제부터인가 교계 안에서도 이념적, 정치적 영향력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념적,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다 보면 한국교회의 위상이나 이미지 제고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전체적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도 배후에서 연합기관 통합을 위해 힘써 노력했지만 또 안되었습니다.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돼서 올해는 제가 한기총 회장으로 출마를 해볼까도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유력한 지도자들과 논의를 하였고, 현 한교총 대표회장님과도 상의 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한기총 대표회장으로 가면 바로 올 봄에 연합기관을 통합하는 걸로 이야기가 됐습니다. 정말 절호의 찬스요, 라스트 찬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새해가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발뒤꿈치 화상으로 인하여 연초에 입원을 해야 했고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사실은 지난 12월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 제안을 받았는데 그 일도 다 포기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부시 대통령 취임식을 할 때는 취임식뿐만 아니라 만찬과 무도회도 다 참석을 했습니다. 아니 저는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에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런천 프레이어에서 스피치를 한 사람입니다. 참 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입원한 상태에서 볼 때 잠정적으로 연합기관 통합은 물 건너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 제가 아무런 활동을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안을 삼으려고 해도 너무나 허전하고 아쉬웠습니다. 여기에는 연합을 반대하는 악한 마귀의 시험도 있었다고 봅니다. 이 대마(大魔)를 잡는 일이 참 힘들다는 생각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더 넓게 볼 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그렇게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 동안을 넘게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어수선한 때입니다. 이 어수선한 때에 하나님께서 저를 뜻밖의 장소로 옮겨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멈추게 하시는가?”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이 너무나 많이 거침없이 달려오셨으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쉼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정 권사님과 이재훈 목사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만 더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 더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지내놓고 보면 항상 그것이 더 좋고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이죠. 여러분도 이따금씩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쉼표를 찍고 멈추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거기서 조용히 속삭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왜 저를 멈추게 하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더 좋은 길로, 더 선한 길로 인도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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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1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쉽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제가 지난 12월 2일 저녁에 잠을 자다 오른쪽 발뒤꿈치가 전기장판에 저온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날 저는 저온화상인지도 모르고 주일 낮 예배와 5부 예배 성찬식까지 다 인도했습니다. 전기장판에 화상을 입을 줄이야 저도 몰랐고 주변 사람들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화상인 줄 알고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와 소염제를 먹었습니다. 약간의 차도가 있는 듯했지만, 저는 계속해서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 시간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이후로 교역자 연말정책수련회와 루체비스타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고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CBS 설립 70주년 및 여러 교계 행사 모임에도 다 참석을 했습니다. 집사람은 빨리 화상 전문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지만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서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만약 화상 전문병원에서 입원을 하라고 했더라면 교역자수련회나 루체비스타 성탄절을 이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탄절예배와 송구영신예배도 이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신년축복성회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중간중간 그 사이에도 나름 드레싱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약도 처방하여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집회가 끝난 후 1월 5일, 첫 주일저녁예배를 마치고 이재훈 목사님을 오시게 해서 화상을 입은 뒤꿈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화상 전문시스템을 잘 갖춘 대학병원에 연락을 했고, 저는 다음 날 오전 11시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강제 입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화상 전문 성형외과 선생님은 저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환자분님, 큰 교회를 섬기고 목회하는 분으로 들었습니다. 이 발뒤꿈치를 앞으로도 10년 아니 20년 이상을 써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방치하셨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교수님, 나름 드레싱을 하고 연고도 바르고 약도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다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병을 키워 갖고 오셨어요? 처음에 바로 왔으면 간단하게 처치할 수 있는 것을 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습니까?” 그러자 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 “어느 교회든지 연말연시는 다 바쁩니다. 특별히 저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화를 내시면서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해만 목회를 하시려고 하십니까? 앞으로 10년, 20년 일을 해야 하는데요? 조금만 늦게 왔으면 뒤꿈치를 절단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시급함을 모른단 말입니까?” 병실에 누워 있자 얼마나 답답하고 하루가 긴지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성경을 봐도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습니다.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염증 부분을 잘라내는 아픔, 억지로 피를 나오게 해서 생살이 돋아나게 하는 처치의 시간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가슴 저리기까지 하였습니다. 3일째가 되자 그토록 엄격하고 원칙적인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피부 이식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잘 치료하면 빨리 새살이 돋아날 것 같습니다.” 금요일 오후에는 국소 마취를 하여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염증을 제거하였습니다. 제가 휠체어를 타고 가서 설교를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그분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 주를 잘 참아내면 다시 후회 없이 발바닥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만류를 하였습니다. 병실에 앉아서 생각해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일정을 다 취소하고 일찍 화상병원에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로서 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병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성도 여러분을 생각하며 인생의 새롭고도 또 다른 페이지를 써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년집회가 끝나면 쉬고 치료를 받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더 엄격하게 강제적으로 치료를 받게 하시네요. 성도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고 제가 더 새롭고 신선한 얼굴로 뵙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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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1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너무나 숙연했던 송구영신”
    저는 지난 주일 저녁예배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5일 동안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했습니다. 이 성회는 35년이 넘도록 이어온 집회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일날 제주항공의 참사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왜 우리나라에 이런 참사가 일어나는 건가...” 순간 비행기를 조종하는 우리 교회 집사님과 전철과 고속철을 운행하는 성도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무안으로 직접 내려가서 조문을 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발뒤꿈치에 저온화상을 입어 장거리를 오가는 것은 정말 무리가 될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저는 용인시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가서 조문을 하고 왔습니다. 누구에게 뭐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어 이런 글을 남기고 왔습니다. "참척스런 슬픔에 잠겨 애도를 표하며 기도합니다“ 문득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이 땅의 살아있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구하고 이어가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 집회 때마다 박수를 치거나 기쁨으로의 찬양을 금지하도록 했습니다. 새해 0시가 되면 당연히 기립해서 박수도 치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찬양대가 찬양을 한 다음에도 박수를 치지 않고 모든 집회 전에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집회 중에 찬양을 부를 때도 손뼉을 치지 않고 주로 회개와 사모함, 헌신의 찬양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제가 송구영신예배를 두 번을 인도했습니다. 하루 저녁에 설교만 총 4회를 한 거죠. 저는 그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기쁨으로 가슴이 벅찰 뿐만 아니라 목이 터질 정도로 환호성을 내질렀을 때 조용하고 숙연하게 새해를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집합적 인격체(corporate personality) 신앙이 있습니다. 집합적 인격체 신앙이란 한 인격 안에 여러 세대가 함께 하나가 되거나 혹은 한 역사 안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백성이 시공간을 초월해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널 때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죽었지만 집합적 인격체 안에서 함께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미 모세 이후 수백 년 후에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집합적 인격체 안에서 함께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에 와서는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공동체 신앙,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합의 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저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번 참사에 대해 당연히 애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예배를 안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하는 제 자신도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시간마다 가슴이 쪼이고 심장에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목사이기 전에, 또한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 이어서였을까요? 저희의 기도가 부족하고 너무나 방심했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이런 사고가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의 모든 집회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전철과 고속철, 또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새삼스럽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 가슴 벅차야 할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가 숙연할 수밖에요.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 생명을 이어가고 사명을 이어가야 할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애도하는 마음과 더불어 축복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부디 역사와 주권과 생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와 민족에 안전하고도 평안한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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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0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환대가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오게 한다”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그 책에 보면 인생 시간 계산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24시간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를 분으로 하면 1440분, 한국인 평균 수명을 80세로 본다면 1년이 18분으로 계산이 됩니다. 즉 내 나이에 18을 곱하고 대략 60으로 나누어 보면 하루 중 내가 몇 시쯤에 있는지가 짐작이 되지요. 제가 계산해 보니까 0살은 0시, 10살은 새벽 3시, 20살은 오전 6시, 30살은 9시, 40살은 12시입니다. 50살은 15시, 60살은 저녁 8시이지요. 70살은 21시, 80살은 24시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생을 80으로 볼 때, 평균적 기준을 말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인저리 타임이 있지 않습니까? 경기 도중 부상 선수 발생으로 인한 시간 손실을 만회하는 추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승부가 안 나면 연장전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간이 인저리 타임, 연장전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생 후반전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인저리 타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인생 후반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낳은 후에 나이를 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마침내 이룬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의 전반전을 자기중심으로 살았다면 인생 후반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사명을 붙들고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낳고도 75세 이상을 더 살았거든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잘 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세 나그네를 마주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환대하며 물로 발을 씻기고 떡을 가져다주고 송아지 요리를 하여 극진하게 대접합니다.(창18:1-8)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었습니다. 그가 내년 이맘때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합니다.(창18:10)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창18:18) 저는 저온화상으로 아직도 상처의 아픔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인저리 타임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준비한 설교 원고이지만 또 다듬고 보완하며 보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환대하고 성도들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설교준비를 하면, 반드시 저에게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35년이 넘도록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강사로 모신 적이 없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 그리고 장년여름수련회는 오로지 저만 강사로 서 왔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올해도 변함없이 말씀을 준비하고 강사로 서려고 합니다. 비록 그때까지 발이 완치될지, 상처가 덜 아물지는 몰라도 저는 끝까지 강사로 나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상처로 소모한 시간을 만회하는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2025년 한 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환대하는 새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확고한 신앙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신년축복성회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통해 새해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온 생애에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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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29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올해는 성탄절을 좀 뜻깊게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1월 초부터 교회 주변 가로수에 성탄 트리를 장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인시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고 또 전기사고 등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죽전 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성탄 행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헌혈을 하여 헌혈증을 모아 한국소아암재단에 기부하고, 취약계층을 위한 사랑의 쌀 나눔을 비롯하여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을 위한 성탄 선물도 전달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영호 집사님을 비롯한 우리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헌혈을 하신 성도들과 지역주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행사를 하는 동안 너무 음악 소리가 크고 음향 소리가 커서 혹시 민원이 제기되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아계신 이상일 용인특례시장님이 “목사님, 저기 좀 보세요”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니까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베란다에서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정말 희한하고 놀라웠습니다. 사실 제가 담임목사의 직권으로 혹시라도 주민들이 불편해할까 봐 브라스밴드 연주를 생략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도 희한하게 아파트 주민들이 다 내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행사가 끝난 이후에 물어봤습니다. “혹시라도 민원이 제기되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한 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 브라스밴드 공연을 하도록 놔둘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분들도 다들 보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루체비스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왜 이런 어려운 언어를 썼냐”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설명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루체비스타는 ‘빛의 풍경’이란 말입니다. 저는 언어에 있어서 선점을 하고 좀 앞선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밤의 긴장과 설렘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거룩한 잔상이 제 심장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루체비스타 행사가 끝나고 줄을 서서 교회로 오시는 성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고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사람과 사람, 또 사랑과 사랑 사이에 연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금실이라는 것입니다. 루체비스타 행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 가슴에 금실로 연결되는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거룩한 금실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교회 주차장으로 오는 모습이 금실에 이어진 행렬처럼 느껴졌습니다. 진짜 욕심 같아서는 그 행사를 한 번 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평생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그날 밤, 유달리 별이 반짝이었던 것처럼 지난주 저녁에 우리는 가슴에 별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이 금실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헌혈을 비롯하여 헌신해 주신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또한 그날 현장에 함께 하신 성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전야제 행사는 없지만, 성탄감사축하예배 때 다 오셔서 다시 한번 아기 예수가 주신 별의 선물을 받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 별빛을 기대합니다.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우리 가슴에 빛나게 될 아기 예수의 별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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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22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여, 더 낮은 곳으로”
    지난 12월 11일 오후에 저는 국회에 가서 ‘2024 성탄절 축하 및 송년 감사예배’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또 국회의사당 분수대 앞에서 있었던 성탄 트리 점등식에서 성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예배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습니다. “과연, 이 예배가 드려질지, 이런 시끄러운 정치 상황에서 여야 크리스천 국회의원들이 어찌 하나 되어 예배를 드리고 성탄 점등식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저조차도 우려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한 주 전에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날짜를 좀 미루자고 하는 제안도 들어왔습니다. 저 역시 그러자고 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크리스천 국회의원들끼리 모여서 성탄예배를 드려야 되고 성탄 트리 점등식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컸습니다. 또 하나 소식이 들려온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강석 목사가 온다면 여야 그리스도인들끼리 함께 손을 잡고 성탄 예배와 점등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배 전날까지도 제 마음속으로는 좀 조마조마 했습니다. 마침내 당일에 저는 국회에 갔고 많은 여야 크리스천 의원들께서 하나 되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윤상현 의원님이 큰 결단을 해주셨고 송기헌 의원님이 강력하게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자리가 정말 불편하였고 초조와 긴장을 하였습니다. 저도 연약한 사람인지라 한마디라도 실언(失言)을 하면 파장이 심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정말 조심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설교 도중에 제가 작사한 성탄절 칸타타 ‘카르네우스’의 첫 곡을 시연한 것은 정말 백미 중에 백미였습니다. 모두가 감동하여 박수를 쳤습니다. 특별히 순서를 맡은 의원들께서 카르네우스의 시연에 감동을 받았다며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습니다. 이어 국회 분수대 앞에서 성탄 트리 점등식을 하였습니다. 거기서도 저는 아주 짧지만 강렬한 카르네우스의 신비와 루체비스타의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회와 우리나라에 아기 예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축복했습니다. 물론 그곳에 우원식 국회의장님이 직접 오셔서 축사도 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국회의장님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명의 국회의원들과 점등식 버튼을 누를 때 루체비스타가 마치 아기 예수의 맨살의 향기처럼 비춰졌습니다. 제가 국회에 가서 점등식을 여러 번 했지만, 이번처럼 성탄의 루체비스타가 가슴이 저리도록 느껴졌던 적은 없습니다. 그 가슴 저린 심정으로 루체비스타가 대한민국 국회와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까지 환하게 비춰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사실 저는 국회 트리 점등식도 하였지만 청계천 광장에서 김삼환 목사님과 함께 성탄절 점등식을 몇 번 주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작 우리 지역에서는 단 한 번도 성탄 축하 루체비스타 점등식을 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고작 우리 교회 앞에 작은 나무들에만 성탄 트리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성탄을 맞아 이영호 집사님과 함께 사랑의 쌀 나누기 행사를 했지만요.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교회와 가까운 죽전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점등식 행사를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약 40여 분 동안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며 점등식을 하고 헌혈과 사랑의 쌀 나누기를 비롯하여 희망과 사랑, 나눔 운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성탄절 이브날 밤이 아니라 좀 미리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5일 오후 5시 반에 죽전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성탄 공연과 나눔 축제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루체비스타는 연말 아니 연초까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행사에 많은 분들이 초청되기를 바라며 구경 나오신 분들도 함께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축제가 끝난 후에도 많은 분들이 이 빛의 풍경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가족, 친구, 연인끼리 중앙공원으로 나와서 사진도 찍고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만들어 가시기를 기대합니다. 아니, 그 빛을 보고 아기 예수의 사랑과 희망, 나눔의 마음을 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지역 주민들과 죽전로를 지나가는 많은 분들에게 이 루체비스타가 사랑과 희망, 나눔의 빛으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달하는 사랑의 쌀, 그리고 헌혈, 공연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더 낮은 곳으로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깊이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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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1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처절한 절규의 산제사
    지난 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탈진을 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동안 갑자기 박순애 전도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박순애 전도사님과 친한 윤동현 목사님에게 올해 안에 집회가 가능할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내년까지 집회 일정이 다 차 있지만 어느 한 교회를 잘 설득해서 다음으로 연기하면 12월 첫 주에 우리 교회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일찍 11월 중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날짜가 그렇게밖에 안 된다고 하니 저도 잠시 고민을 하였습니다. 12월부터는 저의 일정이 비상사태나 마찬가지거든요. 교회와 교회 밖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교역자정책수련회와 성탄절 행사를 하고 나면 곧바로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부흥집회를 가진다는 것은 쉽게 결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다가오는 확고한 감동과 거룩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박순애 전도사님 초청 집회를 한다고 했더니 제 측근에 있는 몇몇 동역자들이 “또 해요? 같은 간증일 텐데요.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면 순종해야지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견을 들었지만 제가 다시 기도하는데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아니야, 간증이 반복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차원에서의 접근 프레임으로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하실 거야. 더 깊은 간증과 새로운 영적 언어로 말씀을 전해주실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부터 은혜 받아야 돼. 많은 신도시 교회들은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우리 교회는 시대 흐름보다 중요한 게 은혜야.” 그리고는 제가 담임목사의 권한으로 이 집회를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항상 하고 다니는 간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간증이었고 말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분은 시대에 편승하고 조류를 타는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시대를 역행하고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도전적인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한순간, 한순간의 간증과 말씀이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찔러대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속 시원하게 다 전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주일예배에는 담임목사로서 그런 극한적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심령부흥회를 열어서 담임목사는 하지 못하는 회개의 말씀, 헌신과 사명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개척 초창기에 심령부흥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 부흥 보다는 심령 부작용이 나타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직접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신년축복성회와 장년여름수련회는 우리 교회의 두 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제 자신이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성회를 열게 되었는데, 새로운 깊이의 간증과 말씀을 저에게만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무학으로 자라난 산골 소녀가 어떻게 그러한 영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영혼의 문장을 이어가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피곤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목이 상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분은 집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저와 함께 식사하는 것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 보면 말씀의 초점이 흐려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집회 기간 동안에 전화 한통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발 뒤꿈치에 화상을 입었는데도 엎드려서 저도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 가시는 길도 배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꼭 짜놓고 치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 가서도 최선을 다하셨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윤동현 목사님에 의하면 셋째 날은 얼마나 기도를 쏟아 부었는지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오셔서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전도사님, 살살 하세요. 목도 아끼셔야지요.” “예, 그러겠습니다.” 해놓고 또 올라가서 처절한 절규의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적당하게 기도하고 끝내고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최선을 다하여 베스트 원, 넘버 원이 되는 게 아니라 온리 원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간증 앞에 누가 고개를 저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아니라고 손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유레카의 감탄을 할 뿐이죠. 우리가 그런 삶을 못 산 것이 부끄러울 뿐이죠. 다만 아쉬운 것은 유튜브로 방송을 못 보내서 더 많은 분이 듣지 못한 걸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부터 도전을 받아 온리 원의 신년축복성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의 성회가 온리 원이었다면, 제가 하는 신년축복성회는 온리 원 중의 온리 원의 집회가 될 것입니다. 그 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처절한 산 절규의 제사를 드려서 누구도 받지 못하는 최고도의 축복, 아니, 온리 원의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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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0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찔레꽃 향기 은혜를 기대해요”
    오늘 저녁예배 때부터 박순애 전도사 초청 특별집회가 열립니다. 정말 이번 집회는 저부터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제 영혼의 옷깃을 여미며 목회에 새로운 도전을 받으려고 합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은 그야말로 찔레같은 인생이었고 모진 삶의 가시덤불에서 최상의 꽃을 피워낸 여자입니다. 청송의 산자락에서 산나물을 캐고 토끼를 잡으며 자란 산골 소녀, 어린 시절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행을 못 이겨 집을 나간 어머니, 말로 할 수 없는 가난과 외로움 속에 버려져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전부였으며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었던 절대절망의 삶...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집중되었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붙잡고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었지만 판타지 드라마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학생 700명의 학원 원장이 되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된 대역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폭력배 출신의 남편을 만나면서부터 찾아온 죽음과 절망의 위기, 그리고 불의 연단을 통하여 빚어진 순금 같은 신앙, 하나님께 돌아온 남편의 회심과 그녀가 받은 오늘의 축복과 사명의 길... 그분의 간증은 꼭 꿈같은 소설이자 격정의 드라마입니다. 원래 간증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스토리가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박순애 전도사님은 간증을 하면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높이고 영광 돌립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북유럽풍의 세련미와 여유, 고적함과 관조를 즐기는 스칸디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그녀의 메시지는 너무 처절하고 야생적이고 맹렬해서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 역시 아무래도 신도시에서 목회를 하다보니까 현대 문화에 동화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여전히 야생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인생을 건 희생과 눈물이 담긴 헌신을 강조할 때는 섬뜩, 섬뜩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박순애 전도사님의 메시지가 맞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육신의 소욕은 시대에 편승하고 싶고 시대에 역행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결코 우리의 신앙이 타성에 젖고 안일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사실 고난 없는 성도가 어디 있고, 문제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수록 이번 집회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다시 살아나고 대역전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박순애 전도사님은 얼마나 건강관리도 잘하고 활발하게 사역하는지 코로나 기간에도 한 주도 안 빠지고 집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분은 늙지도 않는 걸까요, 피곤하지도 않는 걸까요, 정말 돌덩이고 쇳덩이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분을 붙들어 주시고 사용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젊어서 아니 어려서 주의 이름으로 고생을 하고 고난받았던 걸 다 보상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교회에 세 번째 집회를 오는데 어떤 교회는 10번도 넘게 가셨다고 합니다. 더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찔레꽃 여자, 박순애 전도사님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우리 함께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새해에는 우리가 베스트 원(best one)이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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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2-0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책이 풍겨주는 가을 향기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해 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 시몬, 너는 아느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 낙엽은 날개 소리와 /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 시몬, 너는 아느냐 / 낙엽 밟는 소리가 / 가까이 오라 /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가을길은 낙엽길과 같습니다. 단풍잎을 밟으며 가을길을 걸으면 뭔가 숙연해 집니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붉고 길은 스산합니다. 안도현 시인의 말마따나 나뭇잎이 가을엽서가 됩니다. 우리는 그냥 낙엽을 밟는 게 아니라 가을엽서를 밟는 것입니다. 낙엽은 정말 향기로운 가을향기를 물씬물씬 풍겨주죠. 그러나 우리는 가을낙엽이 주는 향기로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가을에는 책 읽기가 너무 좋은 계절입니다. 하늘이 푸르듯이 책도 푸르게 보이고 단풍이 아름답듯이 글씨가 어쩌면 그렇게 곱게 보이는지요. 그리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에서 나오는 냄새가 가을 향기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공원이나 기차 여행길에서 보면 책 읽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스마트폰에 집중을 합니다. 물론 저도 스마트폰 검색은 하죠. 그러나 스마트폰 검색 가지고는 다분히 정보만 얻을 수 있지 향기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하여 알게 된 책을 구입해서 책장을 넘길 때야 책 향기를 느끼거든요. 저는 요즘 무척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일로 많이 고민하고 애태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있을 어떤 행사에 우호적 반대를 해야 할지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야 할지 어제와 오늘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를 하고 교계의 몇몇 분들은 같이 하자고 주문을 합니다. 또 연합기관 통합 문제도 이렇다 할 해결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심란할 때 저는 책을 읽습니다. 쉬운 책은 빨리 읽히고 어려운 책은 늦게 읽히지만, 쉬운 책이건 어려운 책이건 책을 읽는 그 순간은 얼마나 마음이 평온하고 코끝에 향기가 묻어나는지 모릅니다. 특히 이소동집사(숙명여대 중문과교수)님이 쓰신 ‘공맹과 노장’이라는 책은 어려운 내용인데도 감탄사를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면 책상에 앉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독서 탐닉가가 되죠. 그 많은 독서의 힘이 설교의 내용을 더 탄탄하게 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물론 목회자가 힘들 때 기도해야죠.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죠. 그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사실 일반 책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는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모릅니다. 눈이 침침하도록 성경을 읽죠. 그 장을 읽다가 원근통시법적으로 그 장과 관련된 여러 편의 성경을 연구합니다. 또한 주석을 묵상하면 성경 본문이 제 안에서 거의 완벽하게 흡수가 되고 용해가 되어 새로운 창작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어도 제가 읽는 책보다 읽지 않는 책이 훨씬 더 많고 성경도 제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끝없이 독서를 할 겁니다. 특별히 가을일수록 푸른 하늘과 책장을 넘기며 독서할 겁니다. 그리고 가을 길을 걸을 때 모든 잎새 하나하나가 가을엽서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길을 걸을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도 종이 위에 가을 낙엽 향기가 폐 속 깊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좋은 계절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양서를 읽으며 가을엽서를 이웃들에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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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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