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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당신의 가을이 더 행복하길...”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넣으십시오. 많은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극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하략)” 이는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입니다. 여름이 그토록 길고 폭염의 나날들이었지만 정작 가을 문턱에 서니까 그래도 남극의 여름의 햇빛을 그리워하고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폭염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어떻게든지 여름 햇빛을 피하려고 하였지만, 아직도 푸른 나뭇잎들은 여름 햇빛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더 부지런히 광합성 작용을 하며 과일들은 단맛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햇빛이 여름의 꽃들을 피어나게 하였습니다. 지금 어디를 가든지 길가엔 과꽃, 패랭이, 초롱이 꽃들로 한창입니다. 아니, 제가 산행하는 길에는 벌써 앙증맞게 코스모스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웬 시골 처녀가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수줍은 듯 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화려하고 흠모할 만한 미의 자태를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순결한 작은 몸짓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지난, 8월의 뜨거운 햇빛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시원하게 될 수 없었노라고...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여름을 사랑해야 한다. 가을이 오면 올수록 지난 여름이 그리워질 것이라고...” 산행을 한 후 책상에 앉아 아까 전에 본 코스모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니, 산 녘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초가을에 피어난 꽃들의 미소가 제 가슴속에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침묵의 모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여름이 폭염의 계절이었다면 지금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정염의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지난 여름의 폭염이 오늘의 우리들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듯이 이번에 맞는 가을은 당신에게 꼭 행복한 계절이 되기를 바래요. 가을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야 다시 오게 될 불볕더위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그 불볕더위가 그리워지고 그 더위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갑바도기아 대교부 중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 보훈을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는데(마5:8),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청결한 마음이란 에덴동산에서 창조되었을 때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회복하면 자연과 교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저절로 아름다운 시가 나오고 음악이 나오며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하는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신학자의 말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감히 이런 글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산행을 한다면 이번에는 제가 꽃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래, 너희들도 여름을 잘 견뎌냈지. 지난 여름에 불볕더위가 있었기에 오늘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가을이 오면 지난 여름을 더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러나 짙은 가을이 온다고 아쉬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거라. 아직은 가을이지만 여전히 폭염을 일으키는 저 태양의 불꽃처럼 너희들도 이글거리는 삶을 살거라. 우리 모두 함께 가을이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정말 올 가을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 햇볕으로 인해 모두에게 가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고 좋은 소식의 열매를 따 먹는 계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을이 행복한 계절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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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9-1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인문신답 시리즈를 시작하며
    주일설교의 ‘한 말씀 시리즈’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2회를 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해야 할 내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너무 한 주제로 오래 하면 약간 정체되거나 고착화 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강박 때문에 새로운 주제로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다 진리이고 변함이 없는 말씀인데 같은 말씀이지만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언어와 옷을 입혀서 설교한다는 것은 목회자에게 큰 관심이자 일종의 강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 잠언을 강해 할까, 전도서를 강해 할까 고민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잠언을 전공했던 교수님이 저에게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물어봤습니다.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 잠언서를 기반한 설교를 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전도서를 기반한 설교를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인문신답 시리즈를 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잠언을 전공했지만 코로나 엔데믹 시기에는 전도서가 훨씬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서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14세기 중엽에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적어도 1억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페스트는 우리나라 말로는 흑사병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시커멓게 변해서 죽는 병입니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죽었습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이들도 이 병에 걸리면 새까맣게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 가톨릭에서는 무조건 성당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클레멘스 6세 교황은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 페스트를 물리쳐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제들의 명령에 따라서 다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까 성당이 흑사병의 진원지가 되고 감염의 원천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성직자들까지도 흑사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성직자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희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저 사람들이 저렇게 죽어가도록 놔두신단 말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까닭에 아무 죄도 없이 태어난 어린아이가 새카맣게 타서 죽는 걸 놔두고 계신단 말인가? 심지어는 기도하는 성직자까지도 페스트에 걸려 죽게 놔둔단 말인가?” 그러면서 르네상스, 곧 인문주의가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인문주의를 하다 보니까 당연히 인문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람이 묻고 사람이 답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시작하고 신의 자리에 인간이 서고 인간 스스로 학문의 상아탑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에 진리가 있고 행복이 있고 참 만족이 있었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문주의가 성행할수록 삶의 회의론자들이 생기게 되면서 실존주의 철학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거기에서도 진정한 답이 있을 수 없지요. 답이 없으니까 인생 회의론에 빠지든지 아니면 쾌락주의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 동성애, 알코올, 성, 게임 중독 등 사람들이 다 어디에든 중독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코로나를 맞았습니다. 정말 현대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엄청난 인구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쯤 돼서 ‘인간이 묻고 하나님이 답하다’라는 주제로 한번 설교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주제가 딱 맞는 게 전도서였습니다. 그래서 ‘인문신답 시리즈’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첫 설교도 이미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요, 이 설교를 준비하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20회 전후로 ‘인문신답 시리즈’ 설교를 할텐데요, 저는 매 주가 기대되고 매 주가 설레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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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9-0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진심을 다했을 뿐입니다”
    지지난주 금요일에는 한교총 상임회의가 열렸습니다. 저는 이미 총회장도 지냈고 한교총 회장을 지냈지만 지금까지 줄곧 한국교회 연합기관 통합을 외쳐오고 활동을 해왔습니다. 제가 한교총 대표회장일 때도 연합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그때는 한기총이 결정을 미루는 바람에 최종적으로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대표회장 임기가 지난 후에도 연합기관 통합위원장 직을 맡아 세부합의서까지 도출해 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단과 교단장의 이견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분들의 요구사항을 다 합의 도출해서 완전히 되는 줄 알았습니다. 현재 대표회장인 이영훈 대표회장님을 비롯해서 대다수의 주요 교단장들이 내부적으로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부 몇 교단장들의 이견이 표출된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이견은 옛날에 교단장들이 똑같이 주장한 것입이지요. 그래서 저는 한교총 실무자에게 한기총에서 이단자들을 어떻게 제명했거나 행정보류를 시켰는가 등을 다 드러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잘 될 거라고, 일부러 세세한 걸 드러낼 필요가 없고 선통합 후에 해도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생각지도 못한 교단에서 또 생각지도 못한 주장들이 제기된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앞서서 연합기관 대표회장을 한 사람으로서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통합위원회 서기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견들이 나오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제가 일어나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저도 연합기관을 하나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100% 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끼리만이라도 얼마나 만족하고 행복한 케슬과 같습니까?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끼리 모여서 의견 다툼을 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아니,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왜 기독교가 무너지고 망했습니까? 그건 분열과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반기독교 악법을 막기 위해 가장 최후의 전선에서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코로나 상황 때도 정부와 맞서서 예배 조율과 협상에 나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서로 이견이 있을 때 앞서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곤혹스럽고 당황스러운지 아십니까? 기독교가 분열할 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반기독교 정서를 갖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종교를 길들이기를 좋아하는 편일 것입니다. 저는 보수주의와 청교도 개혁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결코 이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공적교회와 공익을 위해서는 이단을 제외하고 하나로 뭉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줄기차게 연합사업을 강조해 온 사람입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시기를 언제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는데, 원래는 9월 총회 전에 마무리를 짓고 총회 때 보고 하려고 했지만, 통합은 하되 결의는 총회 후에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주는 비서들이 휴가를 갔기 때문에 다른 부목사님이 운전하고 갔습니다. 오면서 하는 말이 “정말 왜 저렇게 연합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할까요? 정말 제 심장도 쪼여 가는데 목사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과 악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해와 인식 그리고 의식의 차이일 뿐이죠. 얼마나 많은 걸 보고 얼마나 넓은 걸 보느냐에 대한 사고의 차이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선악을 넘어서, 옳고 그름을 넘어서 진심을 다했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 앞에 최선을 다했고 진심을 다했음을 감사할 뿐입니다.” 사실 교계 연합기관이 분열을 안 했으면 이렇게 다시 연합을 하려고 몸부림을 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계속 또 다른 분열이 연쇄작용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는 영화 ‘오펜하이머’가 떠올랐습니다. 주인공 오펜하이머가 가장 고민하고 우려했던 것은 자신이 만든 원자폭탄으로 인한 파멸의 연쇄작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소폭탄 제작을 반대하고 원자력 무기 확산 방지를 위해서 노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계 분열의 연쇄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다시 연합을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늦은 여름밤인데도 숫매미들의 노랫소리가 무성합니다. 저 매미소리와 함께 저는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한국교회 공적교회와 공적사역을 위해서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리고 진심을 다 바쳤노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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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8-27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보람과 아쉬움은 항상 공존한다”
    로마는 보병을 통해서 세계를 정복했다고 하지요. 그다음에 칭기즈칸은 기마병으로, 영국은 함대로, 미국은 에어포스 공군을 통해서 세계 최강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에어포스보다 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미디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디어 사역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요즘 미디어를 통해서 자극적이고 충동적 영상들이 얼마나 많이 배포되고 있습니까? 이런 때에 건강한 정신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저는 교회가 공적 미디어 사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미디어 영상 속에 인류의 보편 가치인 인간애와 인류애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기독교적인 선한 이미지도 첨가하고 싶은 선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단일 교회로서 공영방송에 십수 차례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중심으로 다큐를 만들기로 했는데 제작사를 바꿨습니다. 한마디로 다큐의 질은 훌륭하고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다큐가 끝나고 여러 문자가 왔는데 대표적으로 두 종류의 문자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교수님이 보내오신 문자인데요.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가장 크게 남습니다. 흉상과 기념비 세우기에 앞장서신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다큐를 보면서,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외람되지만, 기독교 목회자의 공적 사역은 교회와 교인들의 영적, 사회적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목회자는 영적 지도와 가르침 못지않게, 사회적 봉사와 영향력이 매우 중요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변화를 주도하시는 목사님의 활동은 존경스러웠습니다. 목사님이 그동안의 종교적 역량과 활동을 기반으로, 훌륭한 ‘종교적 평화주의자’로서 족적을 남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 공동체 내에서 평화와 헌신,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는 문화를 형성하시고, 사회적 모범을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저는 청년 시절, 제가 다니던 교회로부터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 되기를 권유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권유를 받아 신학을 했더라면, 지금쯤 어떤 목사가 되어 있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마 소강석 목사님의 ‘창의성과 혁신’, ‘사회적 변화에 기여하는 공적사역’의 모습은 아마 저의 롤모델 이었을겁니다.” 이분은 우리 교회가 공공성과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일을 한다는 걸 치하해 온 문자였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이번 다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나라 사랑, 숨어 있는 역사를 재조명해 줌으로 인해 아주 만족스럽고 절대적 보람과 가치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런 문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목사님, 10교구 이00 집사인데요, 최재형 선생 다큐를 보며 광복절에 즈음하여 너무나 의미 있는 사역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잊혀져가는 역사를 기억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위인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이전 다큐와 다른 세련된 촬영과 앵글 그리고 객관적 시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 전개 등이 폭넓게 접근해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역시 허브넷이구나, 동네 한 바퀴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평소에 목사님이 강조하시던 양부모로부터 전수받은 최재형 선생님의 기독교 정신과 가치가 배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애국, 애민했던 선생님의 정신이 덜 드러나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손들의 제사 예식도 그렇고요. 그래도 목사님의 시를 통해서 충분히 세계관 전달이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그 먼 길을 돌아 돌아서 가신 보람이있었네요. 주님께서 기뻐하실 다큐로 기억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라고 왜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꼬마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가고, 그리고 집을 나가 포시에트 항구에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하고 양아들로 삼아 공부를 가르치고 기독교 신앙을 심어준 양부모, 세계를 항해하며 식견을 넓혀서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상이 되어 학교를 짓고 교회를 세운 감명 깊은 이야기, 흙수저 출신이었지만 대부호가 되고,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정신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신념으로 고려인들에게 페치카(벽난로)가 되어주고 독립운동을 했던 스토리로 풀어가도 정말 휴머니티 하면서도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작자가 아니고 감독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의 아쉬움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성도들에게는 송구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꼭 아쉬움만 남는 것은 아닙니다. 보람과 가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어느 목회자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 교회가 발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인간이 살아가고 일을 하면서 모든 것에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또 아쉬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람과 아쉬움은 항상 공존하고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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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8-2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시설보다 중요한 것들
    저는 지난주부터 한교총 사무총장에게 “폭염 때문에 잼버리 대회가 난항을 겪고 있으니 한국교회에서 해야 할 게 뭐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생수 5만 병 보내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1만 병을 지원했는데 이것 가지고는 너무 허전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주최 측으로부터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수 있느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용은 수천 명도 할 수 있지만 샤워시설이 따르지를 못합니다. 더더구나 우리 교회는 지금 여름수련회 집회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관을 개방하면 바닥에 침구를 깔고 500명 이상은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간작업을 해서 화장실을 샤워시설로 개조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480명이 입소를 했습니다. 애들이 교회 들어오자마자 “야,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느냐.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교회에서 밥만 제공한 게 아니라 간식까지 제공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은 캐리비안베이를 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새만금에서 흘린 땀을 캐리비안베이에서 다 식혀 버리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모든 경비를 다 제공했고요. 그런데 다음날 연락이 왔습니다. 교회보다는 용인시를 비롯해서 다른 숙박 시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2인 1실이고 샤워 시설도 제대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솔하는 대장들이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그쪽으로 가고 싶은지 설문조사를 하니까 10분의 9가 교회에 남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청소년 수련원이나 기업체 연수원에 가면 훨씬 시설이 좋죠. 그렇지만 캐리비안베이를 비롯해서 교회에서 하는 행사와 프로그램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화요일부터 마지막날까지 이재훈 목사님 주도로 메디컬처치를 오픈하였습니다. 실제로 의사와 간호사들이 직접 하얀 가운을 입고 무료 진료를 해 주고 약을 주니까 아이들이 더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종민 목사님을 비롯해서 모든 스텝들에게 “최대한으로 잘 섬겨 주세요. 특별히 중국에서 온 아이들은 새만금 잼버리의 폭염의 기억들을 다 지워버리고 우리 교회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도록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주세요”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회에 남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방송에서 우리 교회라고 콕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강당 바닥에서 잠을 자도록 했다는 부정적 보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침을 먹으러 나온 아이들이 핸드폰을 켜들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 뭐래요? 왜 이렇게 썼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단장님들도 서류 뭉치를 들고 와서 걱정스럽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사는 대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희가 기자회견이라도 할까요?” 그러나 우리 스텝들은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단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합시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보고를 받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빠른 뉴스와 정확한 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뉴스를 할 때 심층 취재를 좀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니 우리가 원해서 아이들을 숙박하게 한 것도 아니고 갈 데가 없으니까 우선 종교시설과 여러 교육시설을 알아보고 우리한테 요청해서 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밤을 새워서 샤워시설을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점이 있었겠지만. 그런 부분만을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인가, 언론은 균형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더 좋은 시설이 있으니까 가지 않겠느냐고 묻고 그들이 가면 정말로 환송을 잘 해주려고 했는데 그들은 끝까지 교회에 남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MZ세대와 기성세대의 차이가 대단한 줄 알았는데 MZ세대라고 별 차이가 없구나. 그들도 시설보다 중요한 게 친절이고 환대고 섬김이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 바깥에선 아무 행사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시원한 실내 공간에서 재미있는 레크레이션을 하고 심지어는 CCM 율동까지 하면서 완전히 디쇽(영원한 불꽃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하라)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진짜 어렸을 때 교회에 나갔었는데 처음으로 교회로 와서 숙식을 해봤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성을 다해서 사랑해 주고 섬겨주는 것을 보면서 교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가고 안 나가고를 떠나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간애와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반드시 이런 일을 해야 됩니다. 저는 수련회 집회 중에도 비전홀과 각 교육관 시설을 개방하여 화장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성도들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고 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어지간히 급하지 않으면 교회 화장실을 들리지 않고 집회를 마친 후에 집에 가서 용변을 보신 성도들에게 한없이 송구하고 추앙합니다. 그리고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재정을 투자하여도 모든 걸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신 장로님들과 성도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역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처치 션샤인을 해야 합니다. 무조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 교회가 앞장서서 사회적 돌봄과 시대적 아우름에 앞장서야 교회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퇴소하는 마지막 날까지 그들이 행복한 시간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부정적 성향의 보도를 한 언론은 이런 것을 알고나 있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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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8-1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디쇽, 빛날 때 만끽하라.”
    지난 수요일 저녁에 저는 태백시 황지교회에서 열린 성시화대성회의 강사로 갔습니다. 제가 어지간하면 전교인 수련회를 앞두고 외부 집회를 가지 않지만, 태백시는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가 있는 곳이고 제가 즐겨 보았던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배경지로 각인이 되어서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함백산이 바로 보이는 숙소에서 하루 저녁 묵고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약했던 숙소를 취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새벽에 병원 중환자실에 가서 故 강정식 장로님의 임종을 지켜보며 마음이 심란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임종 직전에 들리는 소리로 “장로님, 천국에 잘 가세요.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곳은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질병도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 가서 평안히 쉬세요”라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질타를 하였는지 모릅니다. 강 장로님은 생전에 당뇨병을 앓으면서도 운동하기를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한여름에 팥빙수, 아이스크림 겨울에는 꿀호떡, 호빵 등 온갖 달달한 것을 가리지 않고 먹고 살았습니다. 공복 시에도 당 수치가 250, 300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잔소리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강제로 산에 끌고 다니면서 운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대산을 한번 가고 나서는 다시는 산행에 따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저런 험한 산은 못 오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몇 년 동안 투병을 하시다가 죽음을 맞이하시게 되었습니다. 강정식 장로님은 정자동과 구미동 목회시절에 제 가까이서 섬기고 봉사를 했던 분입니다. 그런 분의 임종을 지켜보니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수요일 오후에 위로예배를 드리고 빈소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겨우 집회시간에 맞게 태백에 도착했습니다. 도착을 해보니 공기가 수도권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정말 가을 날씨고 바람이 스산할 정도로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잠깐 움직였습니다. “이곳에서 하룻밤 자면 어떨까.” 그런데 순간 전교인 여름수련회 생각이 났습니다. 그 긴장감과 강박감이 마음을 억눌러서 결국 하룻밤도 쉬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시간이 되는 대로 강 장로님의 조문소를 지켰고 발인예배까지 인도했습니다. 다행히 강 장로님이 전교인 여름수련회 전에 돌아가셔서 제가 빈소를 지키고 모든 장례 절차를 집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수련회 기간에 돌아가셨으면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강정식 장로님의 영정사진을 볼 때 계속 떠오르는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멘탈’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불의 세계의 언어인 ‘디쇽’이라는 단어입니다. ‘디쇽’은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언어인데 “영원한 불꽃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하라”는 의미입니다. 강정식 장로님이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를 드실 때 제가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면 이런 말을 했거든요. “목사님,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짧은 세상 사는데 먹고 싶은 거 먹는 것이 만끽이고 즐거움이 아니겠습니까?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저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막 먹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고 즐거움이고 만끽이었을까요? 그분이 좀 더 먹는 걸 절제하고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잘했더라면 72세의 연세에 돌아가셨을까요? 그러니 건강 100세 시대를 추구하는 세상에 장로님의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영원한 불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빛날 때 만끽해야지요. 그러나 그 만끽은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절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불꽃이 없으니 빛날 때 좀 더 절제하고 건강을 지켰다면 더 행복한 삶을 만끽하고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전교인 여름수련회에 대입을 해 보았습니다. 어떤 인생이든 영원한 불꽃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병들고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영혼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하여 은혜를 받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받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늙고 병들면 은혜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영원한 불꽃, 영원한 삶은 없으니 조금이라도 삶이 젊고 빛날 때 은혜를 만끽하자”고 말입니다. 며칠 전 산행을 할 때 늦은 여름까지도 울어대는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제 글의 한 문장 속에 다시 깃을 치는 듯합니다. 소쩍새 역시도 영원한 불꽃은 없으니 빛날 때, 젊을 때 은혜를 받고 만끽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은혜받고 삶을 만끽하다가 언젠가 아름답게 죽음을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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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8-0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잊지 않겠다는 약속”
    우리 교회는 17년째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해 왔습니다. 처음에 행사를 시작할 때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국가가 할 일을 왜 교회가 하느냐”고 말입니다.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는 이유는, 첫째, 보은과 보훈의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보은이 한 개인의 인격을 말한다면 보훈은 국가의 품격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지난날 역사의 수치를 기억하고 미래의 평화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셋째, 더 나아가 민간 외교를 넘어서 공공외교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공공외교란 ‘정부 대 정부의 외교’(기존의 정무 외교)를 넘어서, 우리 정부와 민간이 상대국 국민들의 여론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새에덴교회와 같은 비정부 민간 행위자들도 외교에 뛰어들어 상대국 국민의 여론을 자국에 유리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상대국 정부의 정책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든 외교활동을 공공외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새에덴교회도 17년 동안 공공외교를 통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한ㆍ일 간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우리 교회 참전용사 행사에 참석했던 미국 참전용사들이 “독도는 우리가 싸워 지킨 대한민국의 땅”이라는 서한을 아들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적도 있습니다. 또한 참전용사들이 힘을 모아 세리토스 조재길 시장이 선출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의 보훈청이나 보훈병원에 가면 새에덴교회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러한 새에덴교회의 공공외교의 기록을 다큐로 제작하여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을 하였습니다. 물론 재방, 삼방도 해준 적이 있지만 방송으로만 끝나니까 좀 허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유튜브로도 남겨서 방송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봐야 할 텐데, 올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우리 교회가 자체적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박소현 작가가 대본을 쓰고 나유진 간사가 연출을 맡았습니다. 처음에 다큐 시사회를 하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정말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절대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 교회 실력으로 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유튜브에 올리기 전에 교계 방송에 내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CBS, CTS, C채널, GOOD TV까지 재방, 삼방을 하였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본방을 보았는데 시사회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있었습니다. 방송을 이미 봤는데도 더 새롭게 느껴지고 더 감동적이고 매력 있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박소현 작가와 나유진 간사의 연출이 아주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자마자 교계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17년 동안 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새에덴교회와 소 목사님께 박수와 응원을 보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은혜받은 사람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박종삼 목사님을 비롯해서 광주신학교 다닐 때 조금이라도 빚을 진 사람들을 잊지 않고 찾아갔고, 구정 때는 내려가서 세배까지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에 관한 보은의 마음이었는데, 차츰 은혜를 잊지 않고 받은 사랑을 보답하겠다는 의식과 안목이 더 넓혀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저는 새에덴교회를 담임하는 지역교회 목사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섬기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의식하고 시대와 사회를 보듬고 깨우는 선각자적인 마인드를 갖게 된 것입니다. 특히 마틴 루터킹 국제평화상 전야제에서 만난 흑인 노병, 리딕 나다니엘 제임스와의 만남을 통해 저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 의식과 시각으로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참전용사들의 초고령화로 국내로 초청하는 것은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그걸 우리가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할 수 있고, 또한 “나는 한국을 한 번도 못 와봤으니 제발 초청해 달라”는 분이 많이 계시다면 이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하나님과 저 스스로에게 “한 분의 참전용사라도 살아 계실 때까지 잊지 않고 찾아가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겠다”고 약속하고 공적으로 선포를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끝까지 함께해 주실 줄 믿습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성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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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3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때늦게 바친 조시
    “님은 이곳 언덕 어딘가에 싸늘한 시신이 되었고 / 한 줌의 바람이 되어 떠났지만 / 우린 여전히 님을 보내지 못하고 그리워 합니다 / 포시에트 항구에 지쳐 쓰러졌던 소년이 / 우수리스크의 거상이 되어 / 독립운동가들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 불의 페치카가 되었으니 /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 눈보라도 / 그 푸른 불꽃을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 최재형 선생님이여, 지금도 타오르는 페치카여 / 님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서야 / 어찌 자유 대한의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있으리오 / 그대처럼 조국의 제단에 모든 걸 던져 타오르지 않고서야 / 어찌 나라를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오 / 때늦은 조시를 바치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 이제, 당신 가슴에 타오르던 그 푸른 불꽃을 / 우리 가슴의 촛대에 점화시켜 주시고 / 님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별과 들꽃의 이름이 되어 / 더 이상 압제와 굴종이 없는 / 자유와 평화의 세상의 밤하늘을 비춰 주십시오.” 이 시는 제가 고 최재형 선생님이 순국을 한 소베스가야 언덕에서 낭송한 시입니다. 사실 저는 최재형 선생님을 잘 몰랐습니다. 몇 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에 선교집회를 하러 가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함경북도에서 소작농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흙수저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8살 나이에 러시아로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상이 되었으면 요즘 말로 갑질도 하고 가오도 잡으며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거상이 되고 귀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흙수저와 같은 고려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권익을 신장시켜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을 고려인들이 페치카(벽난로)라고 했지 않겠습니까? 이분은 고려인들의 페치카만 되어 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거의 대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다 쓴 것입니다.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실질적 후원자였고 후견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만 많이 들었지만 안중근 의사가 위대한 열사가 되기까지는 그분의 후원과 지원이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후에도 최재형 선생님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잘 보호해 주고 뒷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던 것은 최재형 선생님을 어린 시절 때부터 키워준 양부모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해주에 32개 학교와 32개의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려면 교육도 받아야 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정말 당시로서 남자의 향기를 발하신 분이고 미스터 선샤인의 삶을 살았던 분이죠.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분에 대해서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19년 여름에 당시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었던 안민석 의원님의 도움을 받아 그분의 흉상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을 받아 이런 일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외주 제작사에서 제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현장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가 전시 중이라 비행기가 운항이 되지 않습니다. 25시간 배를 타고 가야 되고 올 때는 중국 북경을 거쳐서 돌아와야 됐습니다. 더구나 밤 비행기로 북경에 와서 공항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오전 비행기로 인천공항으로 와야 합니다. 그래야 주일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안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작사에서는 제가 가서 화면에 등장하여 설명도 하고 인터뷰도 해야 빛이 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결단 끝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재형 기념관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촬영을 하고 마침내 주 촬영 장소인 소베스가야 언덕에서 때늦게 바치는 조시를 낭독하였습니다. 조시를 낭독하는데 가슴이 울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베스가야 언덕에서 최재형 선생님이 총살을 당하여 죽으셨거든요. 그러나 그분의 유해조차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금방 어디에 분명히 묻혀 있을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며 조시를 낭독하니까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조시를 낭독하는 동안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람을 통하여 들꽃들과 들풀들을 흔들리게 하셨고 저는 마치 그 들꽃들의 향기가 최재형 선생님의 정신과 혼처럼 느껴졌습니다. 거침없이 비쳐오는 오후의 태양 열기로 이마에서뿐만 아니라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의 모습과 향기는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온몸을 땀으로 목욕하고 얼굴이 까맣게 탔지만 그래도 나름 고생하고 온 보람과 가치가 느껴졌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연추와 포시에트 항구까지 가고 싶었지만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저는 미리 갑니다. 촬영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니 어서 빨리 교회로 돌아가고 싶네요. 소베스가야 언덕에 그 아름다운 들풀의 모습과 향기를 가슴에 담고 어서 빨리 교회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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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23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집어등 교회를 꿈꾸다”
    지난주에는 제주도에서 저희 교회 전반기 교역자 정책수련회를 하였습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밤이 되면 바다에 현란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찬란한 불빛이죠. 그 빛은 오징어를 잡기 위한 ‘집어등’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그 집어등이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시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징어로서는 가장 슬프고 비극적인 불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는 다른 물고기와는 다르게 시각이 발달해 있죠. 그 시각은 눈부시고 찬란한 불빛을 좋아합니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오징어는 사족을 못 씁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도 등 뒤로 하고, 죽고 못 사는 짝도 버려버린 채 불빛을 향하여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어부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버리고 맙니다. 오징어에게는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만일 오징어에게 생각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후회할 것입니다. “아차 속았구나! 저 불빛의 유혹에 내가 걸려들었구나” 그러나 가슴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유하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눈앞의 저 빛 / 찬란한 저 빛 /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 의심하라 모든 광명을” 이 시적 의미는 오징어의 생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뿐만 아니라 모든 시에서의 은유의 본질이란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문장과 문맥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의 차원으로 확산이 되죠. 그러므로 이 시는 인간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죽음이 될 수 있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유혹의 미끼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저는 집어등을 보며 이런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사고의 대전환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집어등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징어를 유혹하는 집어등은 죽음의 미끼가 되지만, 교회가 집어등을 켜놓으면 죽을 영혼, 영원히 멸망할 영혼이 새 생명을 얻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혼탁하다 할지라도 우리 교회가 제대로 집어등을 켜고 비추기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영혼을 영원히 구원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거룩하게 납치할 수 있습니다. 산란한 집어등을 통해 교회는 거룩한 영혼의 포로수용소가 되고, 새 생명의 어장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신앙의 본질 회복과 초대교회적 원형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안목과 생각에 호기심을 당겨주는 매력을 보이고, 거룩한 유혹의 빛을 발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게는 지역 주민에게 매력 있는 교회로 비추어져야 하고, 넓게는 이 시대와 사회에 신비스러운 유혹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과거 선교사들은 암흑한 우리 민족사회에 집어등의 빛을 비추어주었습니다.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초대교회는 암울한 우리 민족의 명든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시대의 아픔을 치유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시대적 집어등 교회가 되어 준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시대적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저는 수련회를 하는 동안 내내 집어등 교회를 꿈꿨습니다. 후반기에는 더 생명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눈부신 복음의 빛과 더 거룩한 유혹의 이미지의 광채를 비출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에게 우리 모두 함께 집어등 교회를 꿈꾸자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창문 밖으로 현란하게 집어등 불빛이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집어등 교회를 꿈꿔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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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16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목회자 이중직, 이렇게 본다
    최근 이재철 목사님의 목회자 이중직 발언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께서 한 목회자 세미나에서 ‘어떤 목사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이중직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신 것입니다. 이 목사님 이야기의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과 다르게 신앙생활에서 프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대통령, 의사와 더불어 수습 기간이 없어야 할 직종이다. 최근 젊은 목회자들이 ‘이중직을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많이 하는데, 추신수 선수가 미국에 건너가 7-8년 동안 2군, 3군으로 활동을 할 때는 햄버거만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가 이중직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고 나흘은 야구장 가서 야구하고 사흘은 아르바이트를 했더라면 오늘날의 추신수가 존재하겠는가. 자기 기량을 더 높이기 위해 프로야구 선수도 그렇게 치열하게 미래를 위해 자기를 가꾸는데, 목사는 프로야구 선수보다 더 프로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더 몰입한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는 세속직을 가지라고 권한다.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자립이다. 세상에서는 내가 살아가는데, 내가 처자식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들이는 능력을 경제적 자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경제적인 자립은 내게 얼마가 주어지던 내게 주어진 경제적인 여건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목회자의 마음을 담아서 설교할 수가 없다.” 이러한 발언을 놓고 유튜브와 SNS 상에서 찬반 논란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발언에 대해서 이해하고 동의하는 쪽보다는 무차별적인 비난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보았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목회 환경과 각자가 처해진 상황을 간과한 채 이중직을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폄훼하거나 작은 개척교회의 현실을 모르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중직 목회자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이재철 목사님이 말씀하신 “목사는 프로가 되어야지 아마추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이해하고 맞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라면 당연히 목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목회자의 이중직이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천막을 만들며 선교를 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중직은 본질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선교적 방법론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자들의 이중직 문제를 생각할 때, 과거에 정말 일반 회사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아니 굶어 죽을 각오로 전도하고 목회를 해 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아침 일찍부터 온 종일 사람들을 만나며 전도하고 심방하고 목회에 인생 전부를 걸고 투혼을 발휘해 본 적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가락동 지하상가 23평에서 개척 맴버 한 명 없이 개척을 한 개척목회자였습니다. 당시 저는 아파트 전도를 하기 위해서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며 전도지를 돌리며 뛰었습니다. 그때 신문 배달을 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문에 교회 전도지를 끼워 놓을 뿐 아니라 모든 아파트 문 앞에 교회 전도지를 놓는 전제로 신문 배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살기 위한 이중직을 하는 것보다 선교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방법의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선교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저는 정말 목회에 목숨을 걸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도를 하고, 말로 안되면 손을 잡고 뜨겁게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새부터인가 영혼이 달라붙고 납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비슷한 방법을 실천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굶어 죽을 각오를 가지고 뛰었습니다. 집사람이 우리 딸을 임신했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거의 유산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그때마다 까마귀를 보내주시고, 애를 낳은 다음에도 우유를 대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굶어 죽을 각오로 전도하고 목회를 했을 때, 어느 순간부터 교회가 부흥이 되는 걸 봤습니다. 저는 이중직에 대해서 왈가불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환경과 상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중직이 새로운 목회 대안이나 출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중직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이것이 새로운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중직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더한 열심을 가지고 목회에 모든 것을 투신한 후에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고 바로 이중직을 선택하는 것은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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