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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독립운동과 순교신앙 지켜온 장로의 가문
    1대 엄주신, 2대 엄영환, 3대 엄동규 장로 독립운동가 엄주신 장로엄주신(嚴柱信, 1890-1973)은 1890년 4월 15일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728번지에서 엄순업(嚴順業)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그는 유가적(儒家的) 전통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된다. 19세가 되던 1909년 10월 3일 임명남과 결혼하였고, 칠서면 무릉리 274번지에서 이적하였다. 그 후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다.칠원에서 예수를 믿게 된 그는 1902년 6월 17일 방명원 조사로부터 학습을 받았다. 방명원 조사는 1910년 칠원교회에 부임한 최초의 한국인 교역자라고 할 수 있다. 엄주신은 1913년 3월 5일에는 평북 선천 주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남행리(Henry W. Lampe)로부터 세례 받고, 이듬해 칠원교회 서리집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신앙인이자 애국자로서의 길을 갔다. 그 첫 사례가 1919년 만세운동에의 가담이었다. 칠원에서의 경우 만세운동은 손종일과 엄주신의 지도로 박경천(朴敬天), 윤사문(尹士文) 등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이들은 밀회를 거듭한 끝에 3월 23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모의했다. 이날이 칠원장날이었기에 효과적인 시위일로 본 것이다. 이날 오후 4시경 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이 일은 3월 19일의 함안읍 의거와 3월 20일의 군북에서의 만세 시위에 이은 이 지방의 중요한 만세운동이었다. 손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시위 군중은 칠원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마산 경찰서의 지원을 얻은 왜경은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고 군중을 선동하던 황영환, 신영경, 신영수 등을 체포하였다. 이어서 착검한 총칼로 군중을 위협하였다. 4월 3일 칠원 장날에는 2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때는 1차 의거 때 보다 3백여 명이 더 많은 1천 3백여 명이 회집했다. 이런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된 엄주신은 1919년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으나, ‘내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느냐’ 며 항소하였다. 그러나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병원(고등법원) 형사 1부에서 조선총독부 검사 노구찌(野口)가 간여한 심리에서 “피고 엄주신은 조선 독립의 여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원심 공동피고 손종일이 발의한 모의에 동참하여 원심 공동피고 박경천, 윤형규 등과 손잡고 구한국 대형 태극기를 들고 소형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여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전기 손종일 등과 7˜8명이 칠원 장날 군중 안에 들어가 미리 계획된 순서에 따라 피고 엄주신 장로로 하여금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손종일 등과 같이 대형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하면서 읍내를 누볐다. 그러므로 원판결은 지당한 것이므로 항소 이유는 없다. 따라서 형사 소송법 제261조 제1항에 준하여 항소를 기각한다. 대구 복심법원 형 제558호의 판결로 형이 확정된 엄주신 장로는 대구 감옥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런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로 엄주신 장로에게는 1992년 4월 13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2001년 7월 27일에는 국가유공자(보훈처장)로 추서되었다. 2002년 10월 31일, 그와 부인 임명남 여사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1015번)에 이장되었다.엄주신은 애국자이기 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신앙인이었다.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변함없이 믿음의 길을 갔고, 1922년 이전에 영수가 되었다. 칠원교회 1922년 1월 2일 당회록에 “엄영수 주신”이란 기록을 보면 그 이전에 영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그는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1924년의 칠원교회당 건축 때도 그는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 한의원을 개원하고 있던 그는 칠원교회까지 4km되는 거리를 오가며 교회당 건축을 감독하였고, 재정적인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의 모든 뒷바라지를 감당했다고 한다.엄주신 영수는 1931년 1월 25일 칠원교회 장로로 피택되었고, 1933년 1월 26일에는 손종일에 이어 칠원교회 제2대 장로가 되었다. 손종일은 순교자 손양원의 선친이었다. 이런 신앙의 여정 속에서 경남지방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그가 경남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로 신망을 얻게 된 것은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이었다. 1935년 이후 신사참배가 문제시되기 시작하였고, 1938년 이후에는 ‘시국인식’이란 이름으로 신사참배에 순응하거나 어떤 이는 면종복배의 길을 갔으나 엄주신 장로는 이 점에 있어서 단호했다. 이미 독립운동으로 일제와 맞섰던 그는 요시찰인물로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엄주신 장로는 신사는 명백한 우상숭배이자 신앙과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 하여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 일로 그는 함안경찰서로 불려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교우들과 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도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고취하였다.일제 고문에서 신앙지킨 엄영환 장로그의 장남 엄영환 장로(1914-1993)가 신사참배 반대로 고문과 투옥을 당했던 것도 신앙의 결단이지만 선친의 영향이 켰다. 당시 엄영환은 칠원교회 청년이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한다 하여 함안경찰서로 불려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수난의 날들을 보냈다. 그는 후에 부산 부전교회 장로로 일생을 부전교회를 위해 헌신했고,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다. 엄주신 장로의 쌍둥이인 2남과 3남인 엄문섭과 엄무섭은 칠원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신사참배와 ‘히노마루’(日の丸), 곧 일장기에 대한 배례 거부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도 동일한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국기에 대한 배례는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민의례이며, 동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비국민”의 행위이며 국가에 대한 ‘불경’, 혹은 ‘반역’을 의미했다. 엄주신 장로의 가정은 손종일 장로 가정과 함께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을 함께 했던 믿음의 동지였다.엄주신 장로는 일생동안 한의사로 살았다. 20대 청년 때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정진한 결과 1914년 3월 20일에는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그의 일생동안 한의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함안지방에서 이름난 한의사가 되었고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인술을 펴는 존경받는 의사가 되었다. 당시 함안과 인근 지방에서 이질이란 설사 환자가 급증했을 때 일본인 의사에게 치료 받던 환자들은 거의 다 사망했으나, 그에게 치료를 받았던 환자는 모두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일로 서부 경남에서는 아주 용한 한의사로 소문났고,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이를 통해 복음을 널리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경남법통노회의 지도자로서 부당한 교권에 대항하여 총회석상에서 고별선언을 하고 풀려나 고신교회 설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엄주신 장로는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 그리고 아픈 자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일생을 사셨던 믿음의 사람이었다.엄주신 장로는 1973년 8월 28일 83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임종시 자녀손들이 모이자 아주 환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활짝 펴고 천사들이 춤을 추며 나를 데리러 온다”고 하면서, “너희들 찬송을 부르라”고 하며 만면에 웃음을 띤 기쁜 얼굴로 후손들의 찬송을 들으면서 소천 하였다. 후손으로는 아들 영환(永煥), 문섭(文燮), 무섭(武燮)과 6명의 딸이 있으며, 4명의 손자와 4명의 손녀 등 약 150여명의 후손이 목사, 장로, 권사 혹은 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대를 이은 신앙, 엄동규 장로엄주신 장로의 장손이며 엄영환 장로의 장남인 엄동규 장로(1943~ )는 3대 장로로 현재 서울 동산교회 은퇴 장로(예장합동, 1986년 5월 26일 장립)로, 해망 엄주신 기념 사업회 회장, 초월선교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김명숙 권사와의 슬하에 2남을 두고 있으며, 장남 엄준용 목사는 미국 칼빈대학 기독교육학을 연구하고 캐나다 ICS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차남 엄상용 중령은 공군에서 전투기조종사로 교회와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9-27
  • [15] 바른 신앙을 계승하는 3대 목사
    1대 명신익, 2대 돈의, 3대 치호·치성 목사 신앙의 계승은 하나님의 복으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가계를 형성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종들을 통해 믿음의 향기를 발하게 하신다.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묵묵히 섬긴 명신익 목사의 3대를 찾아본다.복음을 받고 헌신하다평안남도 평원군이 고향인 명신익 목사는 누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형님인 명신홍 목사는 훗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총회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목회자요 신학자이다.1916년에 태어난 명신익은 청년시절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였고, 조만식 장로 등 기라성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명신익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주기철 목사와의 만남이다. 그것도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평양형무소에서의 만남이다.명신익은 어떤 사건으로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거기서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된 주기철 목사를 만난다. 목사와 성도의 만남치고는 참으로 어색하지만 주기철의 가르침을 통해 명신익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목사는 순교의 면류관을 쓰고, 성도는 석방되어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형님인 명신홍 목사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에 유학하며 세 개의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졸업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비롯한 신학교들은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대표적 학교였다. 그러나 동생 명신익은 이 땅에서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월남과 교회 설립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청년 명신익은 민족지도자 조만식 장로의 활동을 돕는 일을 하면서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다. 그는 조만식 장로의 업무와 경호 등의 모든 일을 담당하였는데 조만식 장로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자 명신익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그리하여 명신익은 공산당의 체포를 피하여 몰래 월남하게 되었다. 아내와 가족을 둔 채 고생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싶으나 어려움이 많았다.그때 평양에 있던 아내가 큰 아들의 손을 잡고 둘째 아들은 없었고, 셋째는 임신한 상태로 남편을 찾아 서울로 왔다. 글자 그대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그 당시 수많은 월남자들이 겪는 삶의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살아갔다.1950년 한국전쟁은 비극의 극치였다. 공산당의 만행을 겪은바 있는 명신익은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였다. 아내는 그에게 신학을 하고 전적으로 헌신하라고 권하였다.당시 부산에는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가 설립한 고려신학교가 있었다. 서울의 조선신학교의 좌경화를 막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을 파수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와 교단의 관계는 순조롭지 못하였다. 경남노회와의 갈등, 총회의 단절 등으로 새로운 총회로 분립(分立) 할 수밖에 없었다.이 와중에 명신익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수진으로는 박윤선 목사를 중심한 한국인 목사들과 한부선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다.명신익은 다대포교회 조사(전도사)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가 밀양 삼문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명신익 목사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고신 교단은 영남 지방을 중심한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총회 지도자들은 수도권 특히 서울에 고신교회를 세우려 하였다.총회는 서울에 교회 설립을 위해 명신익 목사를 전도목사로 파송했다. 1953년 명 목사는 회현동 전기홍 장로댁 마당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설립했으니 이것이 흥천교회이다(지금은 성원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마포로 이전해 있다).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고 하고 남대문에서 시청으로 가는 뒷길인 북창동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여 1953년 5월 25일에 헌당식을 하였다.1960년대에 와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문제는 건축비 상환이었다. 남대문 시장의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들이 주일마다 와서 헌금을 가지고 갔다. 당시 이 교회에 출석하던 김경래 집사(경향신문 편집국장, 장로가 됨)가 자기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았다. 이 이야기는 김경래 장로의 구술회고록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서울: 홍성사, 2013) 230면 이하에 상세히 나와 있다.명신익 목사는 1960년대 기독교반공운동에 힘을 쏟았고, 1960년대 한일협정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 당시 고신 측 목사로서는 특이한 활동이었다. 그는 1968년 5월, 5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2대들의 신앙명신익 목사의 슬하에 4남 2녀가 있다. 모두들 신앙의 전수자로 열심을 다하고 있다. 장남 명돈의 목사는 장로로 봉사하다가 늦게사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다. 미국 볼티모어 예루살렘장로교회를 섬겨왔다.2남 명돈암 집사, 3남 명돈승 장로, 4남 명돈영 장로, 장녀 명돈향 권사, 차녀 명돈혜 권사가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자녀 중 우리가 주목할 것은 3남 명돈승 장로이다. 모친이 남편찾아 월남할 때 엄마 뱃속에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개척한 교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섬겼다. 한평생 흥천교회(오늘의 서울성원교회)에서 섬김의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믿음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무역업을 하며 교회를 위해 재정적으로도 큰 섬김의 사역을 하고 있다.3대들의 헌신명 목사 가문이 3대 목사가정이 되었다. 명돈의 목사의 장남 명치호 목사는 달라스 영락교회에 시무하고, 차남 명치성 목사는 샌디아고 그레이스교회를 섬기고 있다. 3남 명치암은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명돈암 집사의 가정에는 치은 집사, 치영 성도가 있고, 명돈승 장로의 가정은 두 딸 치애 집사(이조원 집사), 치현 집사(조요한 집사)가 있다. 명돈영 장로의 가정에는 치원, 치선 집사가 있다.명돈향 권사의 가정은 장녀가 선교사로 양곤에 있는 미얀마 성원교회를 섬기는 이자모 선교사(남편 김인 목사)이다. 또 이준모, 이예모 집사가 신앙을 이어간다. 명돈혜 권사는 김혜자, 김명규 두 자녀를 두고 있다.그 밑으로 4대, 5대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이 자라고 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리라(시편 128:3).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9-05
  • 14. 예배당 건축에 모든 것 바친 헌신자들
    1대 정인기 장로, 2대 규만, 3대 영현·두현 장로 대구 남산동에 웅장한 모습의 석조 예배당이 있다. 유럽의 오래된 예배당을 연상케 하는 석조건물은 우리나라 교회당 건축의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대구서현교회가 바로 이 교회이다. 이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가정이 있으니 바로 정규만 장로 가정이다. 3대 장로 가정인 이 가정의 미담은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1대 정인기 장로의 헌신정인기 장로는 형님 정인백 영수와 함께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았고, 구미 상모교회의 기둥으로 헌신하다가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다니기 쉽게 대구로 이주하여 서현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그러니 아들보다 늦게 장로가 되었다.양부 정인백의 신앙심을 전승받은 정규만 장로는 23세 때에 결혼한 배필을 통하여 믿음과 능력이 배가되었다. 부인 김영숙 권사는 정규만 장로에게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출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평생 성수주일과 구제와 전도, 성경말씀 읽기와 기도, 헌신과 겸손을 목표로 주님께 약속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그 정신이 그대로 자녀에게 이어지기를 원했으며, 자녀의 학업 성적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루에 성경 말씀을 몇 절 읽고 기도를 몇 번 했는지에만 관심을 두고 독려했다.정규만 장로는 대구 시내 중심가에 있는 약전골목 내의 활신한의원과 접해 있는 한옥에 거주하였는데, 대지가 360평에 방이 열네 개나 되고, 연못이 있는 넓은 집이었다. 대구를 방문하거나 그를 찾아온 목회자와 신학생 및 교인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집을 개방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집안은 항상 북적거렸고, 그들을 위해 서너 명의 가정부가 있었는데 늘 시장에 가서 식재를 사는 일이 일과였다. 김 권사는 인근에 있는 염매시장에 단골로 갔는데 그녀가 오면 상인들은 비싼 값을 불렀지만 절대로 가격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지급했다. 같이 간 가정부들이 불평하자 “그들도 이익이 있어야 운영을 하고 또 그래야 우리에게 좋은 음식재료를 주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해방 전후로 우리 사회가 극도로 가난하여 거리에는 음식을 구걸하러 다니는 걸인이 많았는데 여염집에서는 문전박대하거나 아니면 상하고 식은 밥을 던지듯이 주었는데, 정 장로 집에서는 일일이 그들에게 상을 차려 주어 마루에 앉아 따뜻한 식사를 하도록 잘 대접해 주었다. 하루 평균 10˜20명 정도의 걸인들이 소문을 듣고 걸어왔으나 한 사람도 푸대접하여 보내지 않았다. 한번은 안동댁이라는 가정부가 공손치 않은 걸인과 말다툼을 하면서 “주인과 손님들 섬기기도 피곤한데 너 같은 거지까지 내가 섬겨야 하느냐? 오늘 줄 밥이 없으니 빨리 나가거라!” 하면서 호통을 쳤다. 그런데 내실에서 그 소리를 들은 김 권사가 그 가정부를 조용히 불러 성경말씀을 읽어주며 “거지 한 사람에게 행한 것이 바로 주님께 행한 것이 된다. 불쌍한 거지를 잘 대접하면 그 복을 자기가 받는 법이다”라고 충고했다. 그 후로 안동댁은 딴 사람으로 변해 걸인들을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 소문을 들은 밀양의 어느 방직공장 사장이 마침 재혼 상대를 찾다가 그 안동댁을 반려자로 맞이했다고 한다.활신한의원과 교회당 건축의 소망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된 정규만 장로는 1930년대에 전국 최대의 약령시장이 있는 대구로 이주하였으며 당시 서남교회에서 33세의 나이에 장로 피택을 받았다. 그때쯤 서현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할 기틀이 준비되었는데, 하나님은 정규만 장로가 이 큰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무렵 그에게 엄청난 물질의 복을 내려 주셨다.1940년대 말에 전국적으로 급성 유행병인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그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집집이 죽은 사람이 넘쳐났고 길거리에서도 길 가다가 구토를 하며 쓰러져 죽는 사람들의 주검에 즐비하였다. 하나님께서 정규만 장로에게 특별한 처방을 주셔서 신기하게도 정 장로의 활신한의원에서 지은 약을 서너 첩만 먹으면 다 죽게 된 사람도 툭툭 털고 일어나 멀쩡하게 회복이 되었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전국에서 수많은 환자가 몰려 왔고 보건 당국에서도 마땅한 특효약이 없었던지라 정 장로의 약을 임상시험 해 보았더니 큰 효험이 있었으므로 시민에게도 적극 권유하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경북 일대에서 약을 짓기 위해 모인 많은 환자로 활신한의원은 차고 넘쳤다. 환자들이 당일에 약을 짓지 못하고 그 전날 한의원 근처 여관에서 투숙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한의원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이 벌어졌다. 이 줄은 약전골목 끝을 지나 제일극장, 지금의 중앙시네마 이전의 아카대미극장 방향으로 길게 이어졌다.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활신한의원은 매일같이 사람들로 복잡하고 북적거렸다. 가족들이 책임을 분담하여 일부는 대기 환자들을 차례로 줄을 세우기에 바빴고 일부는 들어오는 약값을 셀 시간이 없어 자루나 포대기에 담아두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 장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의 선물과 더불어 경제적인 축복을 받았고 그의 한의원은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1969년도에 정 장로는 소천하기까지 대구 약령시장에서 제일가는 명의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경제적인 수익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서현교회가 처음 목조 단층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현재의 대지에 크고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미 정 장로는 최고의 재료로 아름다운 주님의 집을 건축할 수 있도록 주님께 서원 기도를 올렸고 자신의 경제적인 부를 교회당 건축을 위해 사용할 것을 결심했던 터였다. 그 시절에 그런 규모로 교회당을 건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믿음의 자녀들생전에 정규만 장로 부부는 자녀들에게 믿음의 정신을 확고하게 교육하였다. ‘신본사상, 신전사상, 청지기 사상’을 강조하였고 실천사항으로 하루 3장 이상의 말씀을 읽고, 1년에 한번 통독할 것, 기상, 취침, 식사 때 등 하루 5번 이상 기도를 드릴 것. 매일 찬양을 드리되 찬송가 전곡을 외울 것,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모든 절기 헌금을 빠뜨리지 말 것. 어려운 사람을 돕고 외면하지 말 것.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전도에 힘쓸 것. 항상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의 단점보다 장점만을 볼 것.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히 주일 성수할 것 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정규만 장로가 소천하기 얼마 전 자녀들에게 특별히 남겨 둔 유지가 있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은 교회 개척과 교회당 건축의 시대였지만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 갈 시대는 교회 성장과 세계 선교의 시기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선교에 힘을 쏟아 더 많은 나라와 더 많은 생명을 주님께 인도하는데 앞장서라.” 자녀들은 지금 모두 서현교회를 떠났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좇아 열방으로 나아가 큰 믿음을 행하고 있다.정규만 장로의 슬하에 5명의 아들과 1명의 고명딸이 있었다. 3남 정우현 집사는 미국 유학 중 갑작스러운 병으로 젊은 시절에 별세했으며 4남은 정주현 목사인데 현재 선교사로 A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5남 정재현 집사는 현재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 ‘충현선교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천마 USA. INC.’의 사장이다. 고명딸인 정명자 집사는 대구의 모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손자녀 중에서도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는데 그중 정순영 선교사는 아프리카 ‘기니’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자녀를 중심으로 8촌까지 백여 명의 가족이 있는데 모두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8-22
  • 13. ‘고신 교회쇄신 운동정신’을 계승한 가문
    1대 박손혁·치덕·정덕, 2대 재영, 3대 재철 목사 개혁주의 신학과 순결한 신앙을 강조하는 예장고신측의 초창기부터 뿌리가 된 가문이 있다. 고려신학교 교수와 목회자로 헌신한 박손혁 목사, 목회자요 성경연구의 달인인 박치덕, 박정덕 목사의 가문이다. 박손혁, 박치덕 목사는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박정덕 목사는 성경연구의 대가였다.이들 가정의 이야기를 3대 목사 가정인 박손혁 목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신앙의 깊은 뿌리박손혁은 1901년 7월 13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외산리 351번지에서 박수민(朴秀敏) 장로와 김선이(金善伊) 집사 사이의 10남매(셋은 유아기에 사망하였으므로 사실은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선친 박수민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부농(富農)이었으므로 박손혁은 어렵지 않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밀양의 마산리교회 설립자라고 할 수 있는 박건선, 박윤선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회당을 지나다 예배에 참석한 것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향리 밀양에서 어린 시절을 어렵게 소학교과정을 마친 박손혁은 다소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뒤늦게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 교육은 비록 미미했으나 배재에서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였고 특히 영어실력이 탁월하였다. 그는 재학 중 전국영어 웅변대회에 출전하여 1등 할 만큼 외국어에 재능이 많았다. 배재고보에서 5년간의 과정을 이수한 그는 나이 30세 때인 1929년 3월 2일에 학교를 졸업하였다.신학교육의 여정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9년 4월부터 1934년 3월 31일까지 5년간 마산창신(昌信)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창신학교는 1909년 8월 19일 이 지역 출신 선각자인 이승규(李承圭)의 호주 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슨(A. Adamson, 孫安路)에 의해 설립된 선교학교였다. 이승규는 노산 이은상의 선친으로 마산지방 초기 신자였다. 이 학교는 4년재 보통학교로서 남녀공학제를 채택하였고, 1911년 8월 19일에는 고등과를 병설하였는데 후일 마산지역 청소년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주선교사 리알(D. M. Lyall, 羅大闢), 메크레(F. J. L. Macrae, 孟皓恩) 등이 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확언할 수는 없으나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박손혁은 학교 교사로 일하는 동안 신학과 목회에 대한 소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다 직접적으로 교회를 위해 삶을 헌신하기로 한 이상 교사로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교사가 존경받는 직업이었고 비교적 생활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으나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기로 하고 1934년 3월 학교를 사임하였다.그리고 그 해 4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는 4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신학교 입학과 함께 그는 호주장로회 선교를 소속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고 호주선교부의 관할지역인 경남지방의 교회를 돕게 되었다(1934. 4-1937. 3). 그가 호주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 교사로 일한 것 때문에 목회자로서의 길을 갈 때도 호주선교부가 그를 후원하였고, 그로 하여금 호주선교부 관할하의 교회를 돌보도록 배려하였다. 즉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생으로, 그리고 호주선교부가 관할하고 있는 경남지방 교회의 순회전도사로 1937년 3월 31일까지 3년간 봉사하였다. 지역교회를 맡아 사역하면서 평양신학교의 모든 교육과정을 이수한 박손혁은 1938년 3월 16일 평양신학교를 제33회로 졸업하였다. 그와 함께 졸업한 이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는 강신명, 계일승, 김양선, 박성겸, 손양원, 한정교 등이 있는데, 특히 손양원과는 절친한 관계였다고 한다.박손혁의 선친인 박수민 장로는 한상동 목사가 잠시 봉사했던 밀양 마산(馬山)교회에서 함께 교회를 섬기면서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밀양경찰서에 끄려가 매를 맞고 곤욕을 당하였다. 유치장에 구금되는 등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밀양을 떠나 있던 박손혁은 그렇지 못했다. 이 일을 그는 두고두고 마음 아프게 여겼다고 한다.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던 그가 해방 후 한상동, 주남선을 비롯한 저항인사들의 진리운동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 해방 후 진리운동은 출옥 성도들의 완고한 혹은 독선적인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사 일제하에서 신사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교회 쇄신을 위해서는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947년 9월까지 6년 9개월간 함안 역전교회에서 시무한 박손혁은 1947년 9월 6일에는 밀양읍교회로 이동하여 1949년 9월 30일까지 2년간 위임목사로 봉사하였다. 1949년에는 부산 제일영도교회의 청빙을 받고 10월 1일 이동하였다.고려신학교에서의 봉사그가 부산 제일영도교회로 부임한 일은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가 부산으로 이거해 오자 1950년 첫 학기부터 고려신학교 강사로 초청을 받고 헬라어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것 외에 학교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으나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특히 영어와 헬라어가 탁월하였고, 해박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약 4년간 강사로 고려신학교 교육에 동참했던 그는 1954년 4월 1일부터는 고려신학교 전임교수로 부임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박형룡, 박윤선, 한부선 등의 설립 당시의 교수들에 이어 제2기 교수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주로 신약언어와 성경, 신약석의(新約釋義) 등의 과목을 교수하였다.해방 후 박손혁 목사는 기독교서회 총무였던 김춘배 목사의 부탁으로 찰스 어드만(Charles R. Erdman)의 주석 중 『마태복음』(An Exposition of the Gospel of Matthew)을 번역하기도 했다.고신교회(단)를 위한 헌신박손혁은 제일영도교회 담임목사로서 그리고 고려신학교 교수로서의 봉사 외에도 교단을 위해서 다양하게 봉사하였다. 1952년 9월 9일에는 경남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57년 9월 6일에는 부산노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또 1958년 9월 23일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총회에서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단 총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 다시 1959년 3월 3일에 부산노회장으로 피임되었다.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교단의 해외 교회와의 친선관계, 곧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기독교개혁교회(CRC; Christian Reformed Church)와의 유대와 교류에 기여하였다. 1956년 4월에는 교단 총회 헌법수정 위원장에 선임되어 교단의 조직을 정비하고 체계화 하는 일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조직된 경남 구제위원회 서기로 일하면서 오늘의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의 설립에도 적극 간여하였다.목회자로서, 고려신학교 교수로 교단의 임원으로 봉사의 생애를 살아온 박손혁은 1965년부터 신장염 및 고혈압으로 투병하던 중 1968년 9월 8일 6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려신학교 교수로서의 봉사는 그다지 길지 못했으나 그의 온화한 성품, 겸손한 태도, 주의 나라를 위한 열정은 고려신학교의 역사 속에 지울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소중하게 남아있다.박 목사는 1951년부터 16년간 고려신학교의 운영과 교수에 관여했다. 그는 고려신학교의 이사로(1951-1959) 출발하여 교수로(1954- 1967), 혹은 교장(1961-1962)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서울 배제고등보통학교와 평양의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한 것 외의 공식적인 교육 경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능력이나 실력, 그리스도인다운 인품에 있어서 교수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고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오병세 박사는 박손혁 교수는 “한마디로 말해서 재사(才士)였다”고 회고하였다. 사려 깊은 목회자이기도 했던 그는 창원의 본포교회, 갈전교회, 함안 역전교회, 밀양의 밀양읍교회를 거쳐 1949년에는 부산의 제일영도교회로 부임하여 1968년까지 19년 동안 봉사했고, 이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일하던 때인 1954년부터 13년간은 고려신학교 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박손혁 목사는 한상동, 박윤선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으나 사실 그는 한상동 목사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고, 한상동 목사의 브레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상동 목사와 동갑으로 연령적으로 주도적 위치에 설 수 있었으나 언제나 중심에 서고자 하지 않았고, 항상 뒤에서, 그리고 숨은 곳에서 일하고자 했던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였다.2대 박재영, 대를 이은 목회자의 길박손혁 목사의 장남 재영은 고신측 학생신앙운동(SFC)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하였고, 미국 유학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뉴저지한인제일장로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고신미주총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고신의 ‘진리운동’을 미국에서 펼쳤다. 지금은 원로목사로 은퇴하여 한국에 와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의 고신운동의 산 역사이다.3대 박재철 목사3대 박재철 목사는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현재 NASA한인장로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하나님의 기적적 치유로 완쾌하여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6-20
  • 12. 거제 기독교의 역사 진종학 목사의 5대 목사 가정
    1대 진종학, 2대 병효, 3대 형봉·덕봉, 4대 상권·상복·상민, 5대 주영 목사 농어촌 교회에서 대를 이어 헌신한 가문의 사역 연수를 무엇으로 계산할까? 도시 지역도 아닌 거제도와 영남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이름없이 섬긴 이들의 기록이다.우리나라의 두가정 밖에 되지 않은 5대 목사의 아름다운 가문에 거제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가정을 탐구한다.거제도에 복음의 전래부산 경남 지방의 선교는 호주 장로교회의 공헌에 지대하지만, 거제도 지방 선교는 부산, 진해, 통영 등지에서 활동한 선교사들, 특히 손안로(A. Adamson)와 왕길지(G. Engel) 선교사의 영향이 켰다. 거제도 지방 선교는 1913년 설립되는 호주 장로교회의 통영선교부를 통하여 구체화되지만, 초기 거제도에서의 기독교 전파는 이 두 선교사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거제 지방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거주민들의 개방적인 성향으로 내륙보다 신속하게 복음이 확산되었으며, 피난민과 포로 수용과 같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한 것이다.거제를 책임지고 있던 통영선교부는 호주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전진운동(Porward Movement)’이 한창이던 1913년에, 경남지역 5개 선교지부 중 하나로 생겨났다. 통영 선교부가 담당한 지역은 거제, 칠암, 고성 지방이었다.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타 선교부에 비해 의료 활동이 미진했지만, 통영에서는 부산과 같이 아동 건강관리소를 운영하고, 선박으로 위급한 섬사람들을 후송하여 치료받게 했다. 그런데, 1892년 내한한 무어(Miss E. B. Moore) 선교사가 1894년 이래로 통영선교부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왕대선 선교사는 1910년 이래로 꾸준히 통영 일원과 인근 도서 지방을 순회 전도하였다. 이 도서 지방에 포함된 곳이 거제도였다.거제도의 첫 교회: 구영교회진해 웅천에서 거제도에로의 기독교 유입의 예는 구영교회 설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구영교회 첫 교인으로 알려진 신삼동, 신암혜, 김세율 등이 진해 웅천의 주성윤으로부터 복음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과 거제 사이에는 기선의 정기 운항이 있을 정도로 왕래가 잦았다. 지리상으로 통영을 돌아서 거제로 오는 것보다 부산이나 진해 웅천에서 거제도의 북부 지방인 거제도 장목면 일대로 들어오는 것이 훨씬 용이하고, 왕래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의 유입 경로를 보더라도 진해 웅천을 통해 유입되었듯이 기독교도 진해 웅천이나 부산에서 거제 북부 지방 특히 천연 항인 구영리 부근으로 접근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구영리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설립된 자료는 찾지 못했다.구영리는 거제도 북쪽의 장목면 중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육지의 부산, 특히 진해와는 왕래가 잦은 곳이다. 구영교회는 거제지역 최초의 교회로 추정되고 있지만 사료가 부족하다. 장목면에 거주하는 몇몇 사람들은 1894년에 구영교회가 설립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거제교회백년사』에서는 1894년에 최초 신자인 신삼동씨가 진해 웅천의 주성윤씨로부터 복음 듣고 1900년쯤 친인척으로 하여금 구영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복음을 수용한 신삼동, 신암혜, 김세율 등 가족은 송진, 농소, 황포 지역을 순회 전도하였고, 그 결과로 구영교회를 시작으로 농소(1918), 황포(1922), 송진교회(1924)가 분립되어 갔다. 구영교회 기틀을 잡은 선교사는 왕대선으로 알려져 있으나 설립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손안로 선교사이다. 즉 손안로 선교사의 전도로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후임 왕대선 선교사에 의해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다.1대 진종학 목사(1882-1968)진종학 목사는 거제도의 초대 목사로 거제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거제도뿐만 아니라 경남 지역 여러 교회들을 돌보았다.부산에 거점을 둔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마산, 통영, 진주 등지에 스테이션을 두고 경남 지역 전도에 진력하였다. 거제도는 이 선교 구역에 속했고 보수적 신앙 전통을 지켜 나갔다.진종학은 경남 거제 사등면 사등리에서 출생하여, 손안로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1914년 부산진 성경학교에서 3년간 수학하고 조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 경남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19회로 졸업하고 목사 안수 후, 고성읍교회에 청빙을 받아 시무하였다. 1944년 5월 26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남교구 통영지구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5년 이후, 욕지도, 옥포, 상리, 동항제이, 통영 충무교회 11대, 13대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68년에 별세하였다. 2대 진병효 목사대를 이은 신앙의 전통이 계승되었다. 진병효 목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세의 나이에 전도사 사역을 시작, 일제 치하에 항일사상으로 모진 고문과 옥고 등 압박을 받으면서도 굳건히 복음 사역을 감당했다. 진병효 목사는 해방 직후 비록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8월 17일, 해방 후 출옥을 감사하는 첫 주일에 예배를 드리던 중 예배당을 난입한 일본 헌병대에게 교인과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모진 폭행당하는 잊지 못할 일을 겪었다. 결국 진 목사는 자녀들의 눈물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중 부친에 앞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옥중 고초를 당했고, 해방의 기쁨 속에 고통 중에 별세했다. 그후 대한민국 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3대 진형봉 목사3대 진형봉 목사(1932년생, 현재 거제시 장승포 거주)가 목회자로 사역을 은혜 중에 잘 마감할 수 있었던 데 대해 남다른 감회를 갖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태어나기 전 이미 목회자의 가정으로 살아오며 목격하며 겪어야 했던 상상키 힘든 어려움 탓에 젊은 시절, ‘예수는 믿어도 평신도로 믿으리라’ 생각하고 오랜 동안 부르심을 외면하며 살아온 나날들 때문이다.부친의 순회 전도사역을 보고 가족들과의 생이별이 두려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목회자의 길을 갔다. 큰 교회 목사도 아니고 이름난 목사도 아니지만 헌신자의 길로 나아갔다.이때부터 자신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을 그의 부인이나 자녀들에게 또 다시 물려줄 수밖에 없음을 늘 안타까워했는데 양심의 가책 없이 소신껏 목회해 오던 중에 아들 삼형제 모두가 목회자의 길을 따르며,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두 딸 또한 모두 장로 가정의 며느리가 되었고, 아들들은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 일선에서 뛰고 있으니 가족이 모이면 그야말로 교회 살림, 목양의 어려움과 보람 등을 나누는 것이 언제나 관심이요 화두가 아닐 수 없다.“조부님의 그늘이 늘 제게는 부담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려 할 때만 해도 많은 지역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성자로 기억되던 조부의 영향은 오히려 처신에 어려움을 줄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도 일관되게 희생이 있을지언정 ‘다툼과 분쟁’ 없는 목회를 실천해온 모습에 대한 기억들이 알게 모르게 목회철학과 소신으로 자리 잡아 그의 사역을 인도했다.젊어서 너무 고생스럽게 보였던 부친의 목회담이나 안정된 목회 현장 같은 것은 아니어도 목회사역에 그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세습’이 또 있을까.‘적당히 하는 것은 없는 목회’라는 그의 평소 소신도 산 순교자로, 힘들고 어려운 농어촌 교회를 순회 목회하며 일생을 살아오신 선대들의 유산이 있기에 배고픔도 온갖 오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나갈 수 있었다.4대 목사의 아름다움50세가 넘어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진형봉 목사의 동생 진덕봉 목사와 함께 장남 상권 목사(구미 양무리 교회)를 비롯해 차남 상복(거제 아름다운교회) 그리고 삼남 상민 목사(양산 양울 교회)가 4대를 이루고 있다.만학으로 아들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며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쪼개고 또 쪼개어 살림해 온 부인 홍복희 여사는 목회자의 부인으로 살아가는 며느리들에게 ‘찬송하고 기도하며 사는 생활에서 발견한 즐거움’을 살림을 가르치듯 정성을 다해 전해준다. 순교자의 희생 위에 세워졌던 한국교회, 대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걸어 온 진 목사 가정의 가게 속에서는 이 땅에서의 영광된 기록보다는 오히려 힘겨웠던 이 민족 교회의 이름들이 더 먼저 만나게 된다.영광의 5대 목사 가정진 목사의 가정에 5대 목사의 영광이 왔다. 2019년 봄노회에서 진주영 목사(부산 산성교회 부목사)가 장립을 받아 우리나라 두 번째 5대 목사 가정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다. 이 믿음의 뿌리가 아름답게 뻗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6-07
  • 11. 한 교회에서 4대 장로/ 경북 안동교회 이정일 장로의 집안
    경북 안동교회, 1대 이중희·2대 이재삼·3대 이인홍·4대 이정일 장로 기독교 가정은 한 집안에서 한 명의 장로가 나와도 자랑인데, 같은 교회에서 4대가 장로가 된 ‘기적 같은 축복’이 있다. 좀처럼 자랑하지 않는 경북 안동교회 사람들조차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우리나라에서 경북 안동교회가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안동교회에 4대째 장로를 배출한 이정일 장로 집안이 그것이다.한 교회에서 한 집안이 4대에 걸쳐 장로를 배출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려면 첫째 4대가 모두 예수를 아주 잘 믿어야 하고, 둘째 이민이나 이사를 가지 않고 한 고장에 살아야 하며, 셋째 대대로 장로가 될 만한 인물이 있어야 하고, 넷째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평화로워야 한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984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에서 거행된 선교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한 교회에서 4대째 장로로 섬기고 있는 이정일 장로 집안이 기념패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예장통합 경안노회로부터도 기념패를 받았다. 당시 함께 기념패를 받은 4대째 목사, 장로 가정이 모두 다섯 가정이었다고 하는데, 한 교회에서만 4대를 섬기는 집안은 이정일 장로 집안이 유일했다고 한다.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20세기 현대사에서 요지부동으로 한 교회만을 4대에 걸쳐 섬기며 계속해서 장로를 배출했다는 것은 그 정도로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1대 이중희 장로이정일 장로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중희 장로는 1859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한학으로 독학을 하여 송천학당을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하신 분이다. 이중희 장로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좀 특이하다. 아들이 김천장에 갔다가 전도지를 한 장 얻어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온 집안사람들이 다 이를 읽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볼거리,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라서 길이나 전철에서 전도지를 나눠 줘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그때는 워낙 읽을 게 없던 시절이라 전도지 한 장의 위력이 그토록 엄청났던 모양이다.예수를 믿게 된 이중희 씨는 1907년 대구에 선교사로 와 있던 미국 북장로교 부해리 선교사와 함께 김천군 아포면 송천동 고향마을에 송천교회를 세웠다. 그 후 부해리 선교사가 안동에 왔다가 안동교회에서 세운 계명학교에 여학생을 지도할 교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중희 씨를 초빙해서 교사로 모셔 오게 된다. 그때가 1913년이었다.안동으로 이사해서 계명학교 교사가 된 이중희 씨는 안동교회를 열심히 섬기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15년 안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이중희 장로는 한학을 한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분이었다. 남녀평등, 계급타파, 미신타파를 부르짖으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일깨웠다.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이중희 장로는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 등과 함께 일제의 예비검속에 걸려 안동경찰서에 열흘 동안 구속되었다 풀려났는데, 이 일로 병을 얻어 그해 3월 1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에 이른다.2대 이재삼 장로이중희 장로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그의 아들 이재삼 장로 덕분이었다. 이재삼 장로가 1905년 김천장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또는 장에 갔더라도 전도지를 받아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에 한 교회 4대 장로 집안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이재삼 장로는 아버지를 따라 안동에 이사 온 후 안동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교회에서 집회가 있을 때마다 나서서 객지에서 온 교인들을 열심히 봉사했다고 한다. 성품이 워낙 진실하고 열성적이었으며 인정이 많아서 사람대접하는 일을 즐거워했다. 해방 후에는 교회 부흥전도부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의해 통폐합된 경안노회 교회들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1948년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로 안동교회 장로가 된 이재삼 장로는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 등을 맡아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1956년 캐럴송이 울려 퍼지던 크리스마스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된다.이정일 장로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증조부님은 한학을 공부하신 후 교사 생활을 하셨어요. 할아버님 때문에 증조부님도 예수를 믿게 되셨죠. 안동에 오셔서 5년 만에 장로님이 되셨어요. 3.1운동 때 안동교회에서 만세운동을 논의하시다 일제에 잡혀서 안동경찰서에 끌려가 어찌나 고문을 당하셨는지 나오신 뒤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뭐 거의 다 어른들께 들어서 알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또릿합니다. 인정이 많아서 남 주는 거 참 좋아하셨어요. 일 년에 한 번씩 성소병원 직원들 불러다가 식사도 하시고, 과수원 과일을 따다가 이웃들에게 나눠 주는 것도 좋아하셨지요. 밭에서 나올 때는 한 지게 가득 지고 오시다가 동네를 거치면서 다 나눠 주시니까 집에 들어올 때는 빈 지게로 오실 때가 많았어요.”3대 이인홍 장로이정일 장로의 아버지인 이인홍 장로는 1919년 3.1운동 당시 임동협동학교에 재학중이던 열아홉 살 나이로 안동교회 청년회 일을 하며 만세운동에 앞장서다가 구속되어 6개월 형을 살고 풀려났다. 3.1운동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적극 가담해서 다 구속되었다가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손자는 6개월 뒤에 풀려났으니 국가관이 투철한 애국자 집안에 불어 닥친 시대적 아픔이었던 셈이다.그 후 이인홍 장로는 안동역 앞에서 6.25사변 전까지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1964년에는 3대째 장로로 임직하여 장학기금 설립에도 앞장서서 많은 기부를하였으며, 안동댐 경내에 있는 광복지사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독립사 출판사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사 안동판》이라는 책자도 출간하였다.1992년 광복절이 조금 지난 8월 24일 노환으로 소천하신 고 이인홍 장로에게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장이 수여되기도 하였다.4대 이정일 장로이정일 장로는 이인홍 장로의 7남매 중 유일하게 대를 이어 안동교회를 섬기며 제직회 서기, 성가대장 등으로 일하다가 1983년 안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이로써 안동교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4대 장로 가문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이정일 장로는 현대해상화재보험 안동지점장으로 근무하다가 은퇴한 뒤 아직까지 대리점을 직접 운영하면서 젊은이들 못지않게 땀 흘려 일하고 있으며, 안동교회에서 설립한 안동중앙신용협동조합 이사장과 경안노회 평준화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이쯤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궁금해진다. 과연 5대 장로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정일 장로에게는 딸 넷, 아들 하나 다섯 남매가 있다. 하지만 4대 장로 어른들이 사시던 시대와 지금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너무나 다르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다.“제가 딸만 내리 넷을 낳은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아들을 안 주시려나 보다 생각해서 포기하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아들을 주셨어요. 이것 참 신기하죠? 그래 제 아내가 이런 거는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아들이 생겼으니 5대 장로가 되어야 할 텐데…. 아들이 수원에 가 있어요. 거기서 직장 생활하고 해야 하니 글쎄 5대 장로가 되려는가 아직 잘 모르겠어요.”부러웠다. 정말 복 받은 가정이라는 게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 복의 근원이 되었듯이 이중희 장로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긴 결과 4대째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대를 이어 장로로서 한 교회를 섬기는 엄청난 영광을 누리며 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이정일 장로 집안이 이런 값진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수 있었던 것은 어른들을 극진히 모시고 순종하면서 선조들의 신앙을 잘 이어받고 따르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 사람들이 웬만한 시련과 고난 앞에서는 쓰러지지 않고 견고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아는 것, 나를 비우고 양보하고 먼저 순종하는 미덕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이런 가문의 내력과 집안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보며 살아온 때문이 아닐까. 좋은 신앙을 가지려면 좋은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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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5-24
  • 10. 김일남 목사 가정의 3대 목사들
    1대 목회자 김일남, 2대 선교사 김정웅, 3대 신학자 김바울·김다니엘 목사 지난 2005년 예장합동측과 개혁측의 합동총회가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회집되었을 때였다. 개혁측 총대들이 박수를 받으며 입장할 때 맨 앞엔 김일남 목사가 섰다. 떠났던 옛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의 선도자가 바로 그 분이었다.김일남 목사의 가정은 3대 목사의 가정이다. 그것도 목회자, 선교사, 신학교수 등 특이한 영역에서 헌신하였다. 그 가정의 아름다운 향기를 맡아보자.특이한 목회 방법들김일남 목사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 가자울에서 태어났다. 조모가 선교사의 전도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온 가정이 예수를 믿었다. 김일남은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았고, 집안에서 많은 목사와 헌신자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 구세군사령관 김순배도 있다. 김일남은 헌신자의 길을 갔다.김일남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제2회 졸업생이다. 조선신학교에 다닐 때 ‘51인 신앙동지회’ 회원으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보수신앙을 지키기에 노력하였다.그는 평생을 전남 지역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엄다교회라는 시골 섬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안식년을 실시하였다. 그의 안식년은 특이했다. 6년 사역하고 1년을 안식년을 지켰는데, 그 때 교회에 사표를 내고 안식년 후에 재청빙하는 특별한 방법이었다. 이것이 ‘김일남 안식년제도’였다.안식년의 개념도 없던 때에 그는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초창기 엄다교회 시절이다. 첫 안식년을 마치고 재부임할 때 월 3,500원과 잡곡 포함 그의 가족 10식구의 식량만 받을 때이다. 일년 예산의 수지를 뽑을 때(초등 6학년 아들)의 일년 지출이 600원인데 교회의 수입예산이 없어 그나마 삭제해 달라고 했단다. 두 번째 안식년 때 연봉이 42,000원이던 때, 당시 대전대학 1학년에 다니던 큰 아들 용돈은 장부 결산액이 41,500원이고, 김일남 목사는 총신 대학원에서 한국 농촌교회 부흥을 연구하였으니 남은 식구 7명이 엄다에서 그대로 산 것은 광야의 기적과 같은 체험이었다. 후에 농촌교역자 수양회에서 농촌 목회를 할 때는 하나님께서 자녀들 대학과 신학교도 다 장학금을 받아 시켰는데, 도시 목회시는 학비는 지원할 수 있었으나 대학입시에 낙방을 했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목포로 옮기기 전 그 교회는 노회에서 제일 큰교회이지만 분열로 전임자가 부임후 8개월 만에 떠나가버리고 8개월간 공석으로 있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교회에 주변 목사들의 강권으로 부임했다. 문제가 생기면 교회 당회장실에 들어가 응답을 받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안 나오는 것이다.그럴때면 문제를 일으킨 분이 하나님이 두려워 사과하고 문제들이 풀려나가고, 장로를 선택할 때도 원칙대로 선출하니 하나님께 다른 도시 큰교회로 옮겨 주심으로 교회는 잠잠해 22년간 은퇴할 때까지 그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철저한 조직과 개혁에 의존해 정상적인 목회를 하였다. 처음 부임해 교회가 막 부흥해 나갈 때,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수양달을 지켰다. 어차피 더워 심방도 못하고 목회도 활발하게 못하니 수양달로 정해 두 주간 정도 목사 장로 수양회나 영적 성장을 위한 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고 남은 두 주간은 기도원에 가고, 성경연구에 몰두하였다.낙도 선교에 힘쓴 김일남 목사김일남 목사는 전도와 선교도 남다르게 적극적이었다. 교인들에게도 전도를 강조하고 개척교회도 목포제일교회 시절 첫 10년간은 일 년에 한 교회씩 개척하고, 둘째 10년은 매월 한 교회씩 개척하고, 마지막 10년은 하루에 한 교회씩 개척하자고 하며 전교인들 한 가족이 힘을 모다 한 교회씩 개척하자고 아시며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주의 종으로 바치든지, 가족들이 한 신학생을 장학금을 주어 키우고 개척교회를 하도록 돕든지, 정 못하면 자기라도 잘 믿어 자녀손이 한 교회를 이루면 된다고 하였다. 당시 김 목사의 모친이 살아 계실 때 자녀손만 126명이었고, 그들 속에 많은 목회자의 중직자들과 선교사들도 있었다.교회가 성장을 멈출 때는 목사가 은퇴할 때가 된 것이라고 하여 당시에도 65세 은퇴를 주장하였으나 후임을 찾기까지 기다리다가 67세에 은퇴를 하였고, 교회가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성탄절에는 전세계에 아시는 모든 선교사들에게 목포의 김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고, 아들이 태국 선교사로 가기 3년 전에 벌써 세계일주하여 태국도 이미 다녀왔다. 해외뿐만 아니라 낙도선교회를 통해 남해에 산재한 도서지방 목회자들의 교회들을 지원하고 불러 훈련하고 격려하는데도 최선을 다 하셨고, 목포의 김 목사 사택에는 풍랑으로 못간 도서지방 교역자들을 위한 숙식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선교사로 헌신하는 아들 김정웅 목사김일남 목사의 아들 김정웅 목사는 선교사들이 세운 광주의 숭일 중고교와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 성문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후, 대전 CCC 간사와 전군신자화운동에 맞춰 동해안 거리에서 묵호까지를 순회전도한 동방사의 군목과 광주중앙교회 부목생활을 거쳐, 1976년 9월 12일에 파송식 후 24일에 태국 방콕에 도착하여 현재까지 태국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출국시 모든 교회들이 어려운 때 인지라 개척한지 일년된 남서울교회에서 장례비조로 생활비를 후원받고 지금까지 개속 선교비를 받고 있다. 첫 안식년에 일리노이주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한 후 태국에 다시 부임해, 1987년에 동료 선교사들과 한국지구촌선교회를 조직하고 팀사역을 하는 중 한유순 권사를 통해 촌부리선교센타 대지를 구입하여 “지구촌 선교의 교두보”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모토로 정하고 그간 은혜의 집 고아원과 평화의 집 마약재활원을 하고 신학교와 팔복교회를 현재도 담임하며 앞으로 한국 선교사들의 노후대책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1999년에는 KGM과 PWM 두 선교단체가 GP로 통합하고, 11월에는 인도차이나 한인선교사 창립대회를 호지밍시에서 열고 초대 회장의 역할을 맡아 5개국의 단합을 위해 노력해서 현재까지 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와 미안마에서 돌아가며 매년 잘 모이고 있다. 같은 해 미국 시카고에서 모인 세계한인선교사회 총회시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불참했다. 회장으로 추대를 받아 2002년 캐나다 한인선교대회를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함께 가는 선교를 대회장으로 섬겼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완성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선교사들을 규합하고 하나로 뭉쳐 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 심부름 하고 있다. 헌신의 길을 가는 3대 목사들김정웅 목사의 큰 아들 김바울 목사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의 중국인교회와 한인교회 영어예배담당으로 사역하다가 태국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사역을 도우며, 방콕의 지식층을 대상으로 영어성경공부와 영어예배 등을 인도하며 태국 엘리트그룹에 선교하고 있다.둘째 아들 김다니엘 목사는 미국 시카코의 트리니티에서 M.Div. 와 Ph D.(구약전공) 학위를 받고, 미국 세인트 루이스의 카바난트(Covernant) 신학대학원의 구약학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국제사범학교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김일남 목사의 가정과 친족들 가운데 수많은 목사와 장로가 나왔다. 이들을 모우면 하나의 노회가 될 정도이다.전라도의 한 마을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한국, 미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고 있다. 태국 촌부리선교센터의 선한 영향력이 각지에 가득하고 있어 김정웅 선교사와 이순교 선교사의 헌신을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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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5-10
  • 9. 독립운동가 박영화 목사 가정
    1대 독립운동가 박영화, 2대 선교사 박상동, 3대 신학자 박대선, 4대 목회자 박태기 목사독립운동가의 가문에서 4대 목사가 태어났다. 1대와 2대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옥고를 치루었고, 3대 목사는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한국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한 가정을 탐구한다.독립운동가 박영화 목사1대 박영화 목사는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상계교회 장로로 임직했다. 그 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헌신자의 길을 간다.그가 50세 되던 191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경남 통영의 충무교회 목사로 헌신한다. 충무교회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손안로 선교사가 첫 목회자로 시무하였고, 그후 최상림 전도사 등 3명의 전도사가 시무하다가 박영화 목사가 5대 목회자, 즉 목사로서 처음 부임하여 담임목사가 성례식을 집례하는 감격을 누린다.박 목사는 1년 시무하다가 신학교 동기인 박영숙 목사에게 교회를 넘기고 귀향하였다가 3·1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아름다운 믿음의 계보를 계승한다.독립운동가, 선교사 박상동 목사2대 박상동 목사는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에서 독립운동가였던 박영화(朴永和) 목사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출생지인 의성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이 시절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어린 나이에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고베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오늘의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재학 중 일본에 있는 여러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신학교 졸업 후 곧바로 경북 안동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다. 1925년 7월 전도사로 부임하여 당시 동사목사였던 권찬영 선교사의 협조를 받다가 1926년 9월에 목사안수를 받고 본격적인 목회활동이 시작되었다.박 목사의 목회방침은 온 교인들에게 오직 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강조하였고, 부단한 가정심방을 통해서 교인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교인들의 가정 형편과 이해해 힘쓰면서 신앙적인 성장을 위해 조언했으며, 모든 교인들을 공평하게 포용하여 교인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샀고, 성도들의 안정된 신앙의 기초구축에 크게 기여하였다.안동교회에서 박 목사 시무 시점에 특기할 사항은 1929년 아동부를 거친 소년층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현재의 중등부에 해당하는 ‘안동기독소년회’를 창립하여 신앙활동을 조장하였고, 1928년 9월에는 현재의 본당건물 신축을 위한 기성회 모임을 열어 교회 건축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최초로 하였으며, 그동안 교회학교가 분명한 계선에 의한 지도없이 자치적인 활동을 해오던 것을 교회학교 전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묶어 교역자로서는 최초의 교장이 되었으며, 교회학교 각 부서장은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 분담시킴으로써 교회학교 체제를 체계있게 정비하였다. 또 서부교회 전신이며 안동교회의 기도실이었던 ‘안동기도실’의 육성을 위해 전도 강연을 벌였고, 집사·장로들을 주일 및 수요일 밤에 예배인도차 파견하였다. 1926년 안동교회 권찰구역인 동부, 서부구역을 전도구역으로 설정하고 동부전도대장에 김익현 장로, 서부전도대장에 권점필 집사를 임명하여 대대적인 전도활동을 벌였다.일본에 16개 교회 설립그 후 조선장감연합회에서 일본의 전도사업을 위해 일본 오사카 중앙신학교 출신인 박 목사를 전도목사로 청빙함에 따라 1928년 8월 28일, 조선예수교연합회로부터 오사카 전도목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한국인 약 30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가 공장의 노동자나 기타 잡역에 종사하는 빈민들이었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를 설립하고 교민들의 가정을 심방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짧은 기간에 교인수는 급증하였고, 박 목사는 목회뿐 아니고 현지 한국인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경시청·노동청을 찾아다니며 한국인의 권익 보호운동에 힘썼다. 이런 활동이 일제당국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사카, 나고야 등지를 중심으로 17년간 선교활동을 성공적으로 벌여 16개 교회를 설립하였다.박 목사는 1941년 12월 7일 ‘조선독립운동자행(自行)’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어 4년형의 선고를 받고 일본 야마구치(山口)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출옥 후 귀국하여 대구 남산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는데 지병인 직장암으로 1948년 6월 4일 별세하셨다.번창하는 믿음의 후손들박 목사는 강직한 성격에 책임감이 특히 강하며 약속한 일은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며, 진실을 생활신조로 목회활동과 자녀교육을 하였다. 그의 가족 관계를 보면 부인 김순이(金順伊)는 박 목사 사후에 서울 사현교회 권사로 시무하다 90세에 별세하였고, 슬하에 9남매를 두었는데 장남 대선(大善)은 신학, 법학, 문학, 인문학 등 4개 부문에 박사학위를 가진 한국교회 대표적 신학자로서 연세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또 차남 대인(大仁)은 경신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새문안교회 장로로 시무하다가 미국에 이민하여 LA 가나안장로교회 장로로 시무하였고, 3남 대위(大衛)는 미국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경제학 박사로서 서강대 경영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소망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또 4남 대걸(大傑)은 롯데상사 기획실장으로 갈보리교회 집사로 시무하였고, 딸 다섯은 모두 출가하여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9남매는 아름다운 신앙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유산으로 물려준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고인의 부부가 안장된 묘비에 이렇게 새겨두었다.“우리 부모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유산을 남긴 것은 없다. 그러나 무엇에 비할수 없는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서 이 비석을 세우는 것이다.”4대에 이어지는 헌신신앙의 명문가는 헌신으로 그 역사를 나타낸다. 3대 박대선 목사에게 3남 1녀가 있었는데, 그중 차남 박태기가 목사의 아름다운 가문을 계승하여 4대 목사가 되었다.박태기 목사는 공학박사로서 KIST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믿음의 후손들은 신앙의 향기를 만방에 퍼치는데 독립운동가의 가정으로 목양의 귀한 사역을 한 이 가정의 소중함을 기억한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4-26
  • 8. 김영옥 목사의 4대 목사 가정
    1대 김영옥 목사·2대 은석 목사·3대 형칠, 형일, 형태, 형달, 형숙 목사·4대 형규, 대규 목사로 이어져 한국교회의 모범적 ‘4대 목사가정’으로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사역한 김영옥 목사의 가정이 있다.1대 김영옥 목사, 2대 김은석 목사, 3대 김형칠 김형일 김형태 김형달 김형숙(형훈) 목사, 4대 김형규 김대규 목사로 이어지는 일가(一家)를 이루었다.한국교회 최초의 조사 김영옥한국교회 최초의 조사(助事)로 불리는 김영옥은 191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에 대구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마지막 회의에서 목사로 장립되었다. 지난 2011년이 그의 목사장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시무처는 경북 안동교회이며, 그의 나이 40세(1871년생)였다. 그때 경상남북도에서는 단 2명의 목사가 있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4회 졸업 동기생인 홍승한(방지일 목사의 외숙)은 경북 대구 시내에 제일교회 목사로 장립되었는데, 그는 5년 후에 총회선교사로 중국 산동성에 파송되어 김영옥이 경상남북도에 유일한 목사로 남았다. 김영옥은 황해도가 고향이고, 홍승한은 평안도가 고향으로 모두 이북 출신들이었다. 장로회신학교가 평양에 설립됨으로 평안도가 장로교회의 본산지처럼 알려졌다.김영옥은 1894년경 20대 초, 항해도 배천군 해월면 부소동에서 빈한한 소작인의 신분으로 살았는데, 평산 신씨댁으로 출가한 둘째 누님을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네 살 아래인 배제중학생 리승만을 만나 장연 소래에 미 선교사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 목사에게서 기독교를 전도 받고 유교에서 개종하여 예수교인이 된 후, 당시 성서공회의 매서인(賣書人)의 직분을 거쳐 1898년경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삼열 목사의 조사(助事)가 되었다. 모삼열(Samuel Noore) 선교사와 함께 경성으로 와 종로 4, 5가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한 결과 예수를 믿게 된 신도들이 1년 후 모여 지금의 서울 종로5가 연지동에 연못골교회를 이루었는데,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1967년 12월에 그의 손자 김형태가 연못골교회(지금의 서울 종로5가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라 하겠다.김영옥은 성실한 복음사역자로 겨울 사경회에 참석하여 지방의 두 사경회를 주관하던 모삼열 선교사를 지원했다. 또 7월에는 경성에서도 사경회에 한 주간을 보내며 모삼열 선교사가 유숙하고 있는 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거리전도 집회를 했다. 그의 고향인 예성강이 해월면 동쪽에 흘러 하구에 해월면 벽란도가 있어 배편으로 경성 마포나루까지 교통이 가능했다. 김영옥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들은 배천, 평산, 토산, 금천, 금북, 금성, 적성 교회 등이다.1901년 말부터는 김영옥이 모삼열 선교사의 후임인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오월번(Henry G. Welbon) 목사의 조사가 되어 경기도 양주, 포천, 연천 등지와 강원도 철원 지방과 양구, 화천 등지에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했는데, 1905년 6월에 연천에서 장남 은석(恩錫)이 출생했으며, 1907년 9월에 선교사 공의회(公議會)에 의해 김영옥이 연천 사장교회 장로가 되었다. 이때 서상륜도 서울 승동교회 장로로 추천되었으나, 복혼(複婚, 소실을 둔)을 이유로 안타깝게도 장로가 되지 못한 것으로 회의록은 언급하고 있다.경북 안동교회 초대 목사가 된 김영옥당시, 강원도가 감리교 선교구역이 되자 김영옥은 원주교회 조사시무를 끝으로 오월번 선교사를 따라 신설된 경북 안동 장로교선교부로 옮겼다. 그는 거기서 안동교회 초대목사(1911년 9월~1921년 1월)가 되어, 그 지역에 있는 이대영 등에게 세례를 주고, 후에 경북노회장 때 그때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 목사와 장로 후보자가 있어 그들을 모두 임직시켰다. 당시 오월번 선교사는 대구로 가서 가마를 타고 안동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조사 신분인 김영옥은 소달구지에 이삿짐을 실고 어린 아들(은석)을 어깨에 목마를 태워 부인과 함께 걸어서 죽령재를 넘어 갔다고 한다. 사실 당시의 선교사의 조사는 그 선교사의 월급을 받는 고용자에 불과했다.그는 신설된 경북 안동선교부의 안동교회(법상동)의 초대목사로, 그리고 수차례애 걸친 경북노회장으로 경안노회를 창설하여 10여 년동안 피땀 흘려 교회와 교역자들을 위해 헌신적 수고를 했다. 그러나 안동에서 그는 잊혀진 한 외지인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경안노회는 그의 지난날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경안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여 점촌에 한 문전옥답을 선물로 포상했다. 그의 고향인 황해도 배천에서는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은 그가 배천에서는 아직 목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2대 독립운동가 김은석 목사2대 김은석 목사는 1905년 연천에서 출생하여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안동에서 자랐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풍기교회 목사로 시무하다가 일본 나고야 서부 한인교회 목사로 가셨는데, 조국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1년 반 미결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해방 후 건국 정치활동에 참여하셨다가 김천소년교도소 교화과장을 시작으로 인천과 서울에서 교정교역에 여생을 보내고, 1952년 인천소년교도소에서 불하받은 관사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김은석 목사의 아들 형칠, 형일, 형태, 형달, 형숙 5형제가 목사이다. 뻣어나는 후손들3대 김형칠 목사는 1923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삼분교회 목사가 되었는데, 이후 경북과 경남 일대에서 목회를 하던 중 제100회 부산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강원도 태백에서 개척교회를 시무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작고했다.둘째 김형일 목사는 1926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과 캘리포니아 리틀스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장로교 목사가 되어 캘리포니아 리틀리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한 후 클레어몬트대학원에서 법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롱비치 주립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회장을 두 번 역임했다. 미국장로교 무임목사로 계속 남아 있다가 지병으로 파사디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셋째 김형태 목사는 1929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하여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석사)과 피츠버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 교목과 서울 연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제72회 총회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부회장을 역임하고,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으로 봉사했다.넷째 김형달 목사는 1931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하여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경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잠시 교수와 목회를 하다가 미국에서 영주하면서 외항선교와 일본인 교회를 목회했다. 다섯째 김형숙(형훈) 목사는 1934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여 대구 계명대학과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군목으로 있다가 도미하여 뉴욕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면서 미주한인장로회총회 설립에 참여하고 총회장을 역임했다.김형칠 목사의 외동딸은 1956년 경북 풍기에서 출생하여 대전보육학교를 졸업하고, 이성식 목사와 결혼을 하여 사모가 되어 이 목사의 목회를 내조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두 아들 교육에 힘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김형칠의 장남 김형준은 1938년 경북 풍기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하고 경서노회에서 전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서울에서 문서선교회에서 교역하다가 미국유학을 한 후에 회사원이 되어 교회를 개척하고 장로로 시무하면서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중국선교에 힘쓰고 있다.4대 김형규 목사는 김형칠 목사의 차남으로 인하대학교를 나와 대한항공에서 근무하다가 목회에 뜻을 두고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서울에서 목회를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교회를 개척하고 미국장로교(PCUSA) 목사로 교회를 시무하고 있다. 또 김대규 목사는 김형준의 장남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출생하여 클레어몬트대학교와 뉴욕 법과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보다 목사가 되기로 작정하여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훌러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목회를 하고 있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4-17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7. 고신측의 3대 목사, 2대 총회장 박유생 목사 가정
    1대 박유생 목사·2대 박정원 목사·3대 박성진 목사 3대 목사란 귀한 일이고 축복의 사역이다. 그것도 부자가 총회장을 하는 기록을 낸 가정이 있다. 1대 박유생 목사(97세, 김해중앙교회 원로), 2대 박정원 목사(76세, 대연중앙교회 원로), 3대 박성진 목사(49세, 김해복음교회 목사)가 그들이다.이들이 소속된 교단은 예장고신측으로 순교신앙의 전통을 이어온 개혁주의 교단이다. 그러니 3대 목사는 고신대학교(옛 고려신학교)의 동문인 셈이다. 그래서 2016년 ‘고신대 가족상’을 수상하였다.뼈속부터 ‘고신 정신’으로 가득찬 이들은 1대 박유생 목사가 고신 총회 제42회 총회장을, 제2대 박정원 목사가 62회 총회장으로 섬기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이 가정의 자취를 따라가 본다.세상 영화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이 가정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박유생 목사의 모친에 의해서다. 모친은 임신 2개월째 남편과 사별하고 어려운 여건에 있었다. 어느 날 밤 밤길을 걷는데 예배당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더란다. 아들을 낳은 후 아기를 품에 안고 스스로 교회에 나갔다.1대 박유생 목사의 육성을 들어보자.“저는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없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창피해 그대로 부산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해 검찰 서기가 됐습니다. 그 이후 축산업 등 사업을 해 많은 돈을 벌었는데, 중병에 걸려 6개월 동안 쉬게 됐습니다. 그때 성경을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모든 재산을 정리해 연지교회를 개척하고, 그때부터 목회자의 걸을 걷게 됐습니다.”말로는 이렇게 표현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내려놓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박유생 목사는 한 평생 ‘기도하는 목사’의 삶을 살았다. 아들의 방황 그리고 회심목사는 자기가 받은 은혜와 사명으로 이 사역을 감당하지만 자녀들에게는 생각지도 않은 고통이 되어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이 상황이 박유생 목사의 가정에 찾아왔다. 2대 아들 박정원 목사의 육성을 들어보자.“아버지가가 전 재산을 다 정리해 연지교회를 개척한 때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는 정말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 당시 고기반찬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는 시대였지만 저는 늘 고기반찬을 도시락을 싸서 학고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전 재산을 다 정리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자 그때부터 고기반찬은 고사하고 도시락도 제대로 가지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또한 수업료를 내지 못해 창피도 많이 당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생활환경과 전도사 아들로서 교회 성도들의 뭇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이 어린 저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앞에서만 교회 다니는 것처럼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하던 날, 부모님께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신앙은 자유인데 이제부터 교회에 다니지 않겠습니다!’라고 반기를 들고 본격적으로 탕아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부모님에게 반항하기 위해 더 심하게 방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아들의 방황에 부모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목사의 아들의 방황은 부모로 하여금 기도의 강물을 흐르게 한다. “부모님은 제가 ‘결혼을 하면 방황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결혼을 시켰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 자란 아내는 ‘목사 아들이면 사람은 확실하겠다’ 싶어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힘들어 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후, 제가 결핵 3기라는 청천벽력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비교적 치료가 쉬운 병이지만 40여 년 전의 결핵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치명적이었습니다. 6개월 동안 약물치료와 주사를 권한 의사 역시 완치에 대해 반신반의할 정도였습니다. 약을 20일 정도 복용한 어느 날 아침 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약을 치워 버린 것입니다. ‘약을 먹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같아 치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새벽기도에 가자는 것입니다. 저는 단 번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새색시가 새벽길을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 자신을 예배당까지 데려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의 보디가드로 새벽기도를 따라 다녔습니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 때문에 밖에 있을 수 없어서 예배당 맨 뒤에 앉아 있기를 사흘 쯤 되는 날, 그동안 전혀 들리지 않던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러면 제 삶을 바꾸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데, 정말 한 달 내내 회개의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 병이 완치가 된 것입니다. 의사도 놀라면서 “당신의 병은 하나님이 고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병원 문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제가 목회자가 되고자 한 가장 큰 이유는 제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되지 않으면, 또 방황할까 겁이 나서입니다. 회개 한 후,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버지는 제 방황이 당신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수시로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제가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만 8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당에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저렇게 살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제가 어떻게 집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까지 저는 집에서 자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하셨답니다. 어머니가 엎드려 기도했던 마룻바닥을 보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 지 그 자리에만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결국 부모님과 아내의 기도로 제가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아버지 박유생 목사는 아들이 전화로 신학교를 간다고 했을 때, 잘 믿어지지 않았다. 또 다른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들 집으로 찾아 갔다. 그런데 자부로부터 그동안 과정을 설명 듣고, 그 말이 진실인 줄 알게 됐다. 9년 만에 아들을 부둥켜 않고 같이 울었다. 3대로 이어지는 목사박정원 목사의 아들 성진이 목사가 되었다. 목사 장립식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3대 목사의 명문가가 태어났다. 3대 목사의 목소리를 들어보자.“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가장 배우고 싶은 부분은 ‘오직 예수만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목회핵심은 ‘오직 주만 바라보는 목회’입니다. 할아버지가 개척한 교회에 가 보면 ‘오직 주만 바라보는 교회’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회하셨던 대연중앙교회당에도 ‘오직 주만 바라보는 교회’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제가 두 분에게 가장 배우고 싶은 부분도 바로 ‘주만 바라보는 목회’입니다. 저 역시 두 분에게 배운 대로 그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할아버지는 일평생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새벽 4시면 어김없이 기도의 자리에 않습니다. 아버지 역시 기도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예전에 목회하실 때, 금요기도회를 마친 후 교인들과 함께 산 기도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분의 목회를 보면서 배운 것이 ‘기도하는 목회’입니다. 심방을 잘하는 것도, 설교를 잘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즉 영성을 가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도 기도합니다.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목회자가 아닌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신앙은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져 간다. 굽이굽이 돌아 저 영원한 바다에 이를 때까지 ‘복있어라 믿음의 명문가여’.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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