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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박의흠 전도사 가정
    순교자 박의흠의 신앙, 사위 김준채 목사를 거쳐 4대로 이어져 순교자의 후예들한국교회는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하였다. 그 중 가장 힘들었던 수난중의 하나는 일본강점기의 신사참배 강요였다. 이 수난으로 인해 많은 ‘수진성도’들이 순교하거나 옥중에서 고난을 당했다. 그 후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순교신앙의 열정을 이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한 가정을 찾아본다. 순교자 박의흠박의흠 전도사는 1901년 11월 13에 평북 의주군 고관면 용화동에서 대지주 부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1942년 42세에 순교하였다. 믿기 전에는 난봉꾼이었지만 30세 되던 1930년 박의흠은 그의 형님이 아내의 병을 고쳐보려고 토교교회 김성심 권사를 모셔다가 집안의 우상을 청산하고 온 가족이 예수부터 믿게 되었을 때 앓던 형수가 차츰 낫게 되는 것을 보고 온 식구들과 함께 믿게 되었다.박의흠은 부모님과 의논 없이 재산을 정리하고 선천으로 나가 성경학교 공부를 시작했으며, 성경학교 삼년을 일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선천 미동병원 원장 최익손 선교사의 권면을 받아 정주 천태동이라는 해변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상단교회에 시무하면서 박의흠 전도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2학년 때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고, 상단교회 다섯 장로 중에서 두 명이 형사들의 위협에 넘어가고 말았고, 교인들은 통분해서 박의흠 전도사에게 신학교를 그만 두고라도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박 전도사는 “상단교회 당회가 이미 다 가결해버렸는데 내가 이제 가면 무엇 하겠느냐?” 면서 당회에 엽서로 간단하게 편지를 한 장만 보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데 아론은 밑에서 ○○○하였느니라”라고 한 다음, 상단교회가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을 아시오 라고 보내고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신사참배로 넘어간 신학교를 박차고 고향으로 돌아온 박 전도사는 한동안 성경 연구에 몰두하다가 양무리를 살리는 길은, 범죄한 교회에서 한 사람씩 끌어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선 상단교회 교우부터 방문하였다. 신사참배를 한 목사나 교역자들은 박의흠 전도사 때문에 교회를 운영할 수가 없고 교역자 노릇도 못해먹겠다고 당국에다 박의흠을 잡으라는 투서를 넣게 되었고, 신의주경찰서 형사대가 총 출동하여 박 전도사와 김린희 전도사를 잡으려고 온통 혈안이 되었다.박의흠 전도사는 가족을 이끌고 다시 안동으로 나갔으며, 신앙을 지키는 가정들을 찾아다니면서 여러 가지로 위로와 격려해주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박 전도사와 김린희 전도사가 함께 있을 때 형사들이 급습했다. 홀로 다락방에 피신했던 박 전도사는 다락에 앉아서 김 전도사가 형사들에게 그렇게 두들겨 맞고 발길에 채이고 고통을 당하다가 잡혀가는 것을 숨어서 듣고 괴로워했지만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뜻을 구하면서 그 위기를 넘겼다.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의 제물이 되다그후 북만주로 피신해 깊은 산골 동네로 이사를 했다. 거기는 낮 정오가 되어야 해를 쳐다볼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산중이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안동결찰서 고등계에 있는 홍 형사라는 사람과 만주국 순경에게 체포당했다.박 전도사는 경찰당국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 중에서 우두머리라 하여 고등계 주임이 직접 취조를 하였는데,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묻는 대로 하나하나 대답을 하는 동안에 차까지 한잔씩 서로 나누어 마셔가며 조서를 꾸몄다고 한다.재판에서 징역 13년형의 언도를 받고 봉천형무소에 수감되어 여름을 지나고 그 해 첫 겨울이 되어서 가족이 면회를 갔을 때의 모습은 처참했다. 박 전도사와 김윤섭 전도사가 함께 면회실로 나왔는데, 그 추운 겨울에 죄수복 한 벌씩만 달랑 입고, 시멘트바닥을 양말도 없이 맨발로 발가락을 꼬부리고 나오는 모습이었다. 박 전도사는 체격이 보통 체격이었으니 옷이 그런대로 몸에 맞기나 했지만, 김윤섭 전도사는 체격이 장대하였기 때문에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훤하게 다 드러나고 손발이 새까맣게 죽어 있어서 더욱 참혹하게 보였다.몸이 점점 허약해진 김윤섭 전도사는 수감된 후 해를 넘긴 어느 봄날 결국 감옥에서 순교했으며, 김윤섭 전도사가 순교하고 난 후 6월, 박 전도사는 장티푸스에 걸려 병감에 수용되어 있었고, 면회를 간 딸이 병감으로 찾아갔을 때 이미 박 전도사는 기력이 쇠해 죽음 직전에 있었다.박의흠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풀려날 수 있는 감옥에서 목숨을 바쳐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순교의 제물이 된 그는 중국 봉천(심양) 북능 묘지에 매장되었다.순교자의 후손들박의흠 전도사에게는 장녀 박신자(박금주)와 신원, 신길, 신광이란 아들들이 있었다. 박신자의 남편 김준채 목사는 그의 본 집안은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순교자의 가정을 돌아본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박신자(금주)와 결혼하여 박의흠 전도사의 사역을 이어갔다.김준채 목사는 평안북도 룡천군 부라면 출생으로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듣고 믿었으며, 6.25 전에 월남하여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재건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했다. 충남 공주교회, 교령 귀원교회, 부산 청학동교회, 대구 삼덕교회, 경북 내량교회 등의 교회를 시무한 후 1991년 10월,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김준채 목사의 6남매 중, 장남 김종만 장로는 해군 U.D.T교관, 외항선 선장으로 일하다가 현재는 대구 새부름교회의 시무장로로 사역하고 있으며, 백화자 집사와의 사이에서 김성훈, 김재훈 , 김경은 3자녀를 두었다.또 차남 김종길 목사는 재건총회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원, 칼빈신학교, 코헨대학교(D.C.E.D)에서 공부했으며, 칠레선교사로 파송되어 칠레한인연합교회에서 17년을 시무하다가 귀국하여 현재는 재건서면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재건교회의 부총회장으로도 사역하고 있다.김준채 목사의 장녀 김종순은 정정민 목사와 결혼하여 사역하고 있다. 정 목사는 재건총회 증경총회장이며, 현재 재건부평교회 담임목사이고, 재건총회 신학원장으로 섬기고 있다.2녀 김종회 집사는 박성용 장로와 결혼하여 부산 해운대교회를 섬기고 있다. 박성용 장로는 공무원으로서 해운대 중2동 동장과 해운대구청 감사과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재건해운대교회 시무장로로 사역하고 있다.3남 김종건 장로는 송수경 집사와 결혼하여 재건은석교회 시무장로로 사역하며, 대구대학 사회복지학과 졸업하고, 현재 남해 소망의집 총무로 재직하고 있다. 김재원, 김지훈 1남1녀가 있다.4대로 이어지는 헌신제4대 목회자들이 믿음의 조상들을 따르고 있다. 김종기 목사에게는 3아들이 있고, 그 중에 장남 김신훈 장로(조아라 집사)는 재건광주교회 시무장로로 사역하고 있으며, G.M광주 차장으로 재직하고 있고, 자녀로는 김조회, 김주호 남매가 있다. 차남 김명훈 집사는 찬양사역자인 이현숙 집사와 결혼하여 중남미 무역업을 하는 직장인으로 재직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 3남 김병훈 목사(김수지 사모)는 현재 ‘더 사랑교회’ 교육목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슬하에 김소원, 김소윤, 김주영의 3자녀가 있다.그리고 김준채 목사의 장녀 김종순 사모(정정민 목사)에게는 정영은 목사(최윤진 사모)와 정다은 사모(백재승 강도사)가 있는데 정영은 목사는 한국성서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백재승 강도사는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오륜교회 강도사로 사역하고 있다. 또 차녀 김종회 집사(박성웅 장로)의 장남 박효빈 전도사는 성서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과천중앙교회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차남 박경찬은 성서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순교자의 가정에 믿음의 아름다운 사역을 계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요 복이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3-21
  • 5. 부흥사역과 문학과 병원 원목의 3대 목사
    1대 박용묵·2대 재천, 재섭, 상진·3대 양현 목사 각 가정에는 하나의 전통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가풍(家風)이라고 부른다. 이런 가풍이 그 가문의 자랑이 되고, 후손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제공한다.신앙의 명문가들은 독특한 전통이 있다. 마치 종가집의 음식맛처럼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향기가 있다. 부흥사역의 중심인물이고 거기에 문학적 향기까지 더한 한 가문을 찾는다.목회와 부흥사역의 헌신자목회자로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이끌어 온 박용묵 목사는 1918년 3월 경북 청도에서 부친 박정범 영수와 모친 이동녕 집사의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소학교를 중퇴한 후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장로교총회가 실시하던 성경통신과 신·구약과를 마쳤고 이듬 해 총회교육부의 교사 양성과를 졸업하였다.만주로 건너가 길림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중인 1937년에 북창교회를 개척 시무하다가 1939년에 길림신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의성 양지교회 이분례와 결혼한다.만주 북창교회를 시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고노하나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여 오사카 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다. 광복 후 귀국하여 면서기, 순회강사 등을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메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심한다.1946년 경북 경산군 와촌면 덕촌과 박사 두 곳의 교회에서 전도사를 시작으로 한 평생을 목회자의 길을 간다. 1947년 경북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박사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다가 1951년 대구 문화교회에서 5년, 1955년부터는 대구 동신교회에서 8년, 1963년부터 영등포 대길교회에서 20년 등 40여 년간 목회사역에 헌신하였다.그의 목회를 살펴보면 시무하는 교회마다 예배당을 건축한다. 문화교회와 동신교회에서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대길교회에서는 예배당 건축을 두 번이나 하였다. 이것은 그의 목회사역이 섬김의 리더십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10만 구령’의 소명박용묵 목사의 사역에서 중요한 세 축을 들라면 목회, 부흥운동, 저술사역으로 집약할 수 있다.박 목사는 ‘10만 구령’의 소명을 받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십자가 신앙이며 사랑이었다. 지금도 그의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그는 평생에 1,000회 이상의 부흥회를 인도하며 힘있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1969년 9월 어느 토요일, 신현균 목사는 대구부흥집회를 인도하고 귀경하는 열차에서 부산집회를 마치고 귀경하는 조용기 목사를, 이어서 대전집회를 마치고 상경하는 김동일 목사와 오관석 목사를 만난다.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난 네 목사는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다니는 부흥사들이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 효과적으로 부흥운동과 친교를 가지자는 데 뜻을 같이 하고, 1970년 2월 15일, 17명의 부흥사들이 영천교회에 모여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를 조직한다. 이 모임에서 박용묵 목사가 회장으로 추대된다. 부회장에는 임영재 목사, 조용기 목사, 총무에 신현균 목사가 선임되었다. 여기서 박용묵 목사의 부흥사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리더로서 목회와 부흥사역의 균형을 이루며 모범적 교회로 성장하는 일에 견인차 구실을 하였다. 한국교회부흥운동사 연구에서 박용묵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문서사역의 향기박용묵은 목사만이 아니라 ‘시조시인’으로 불린다. 사랑의 목자요 뜨거운 부흥사의 가슴에서 솟아난 시조들은 독자들의 가슴에 감동의 파도를 일으킨다.그의 대표 시조집 「신애보」(1952년 초판)는 많은 사람들에게 바른 신앙의 고백을 하게 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그의 대표작 ‘임타령’은 이렇게 노래한다. ‘임의고통 비교하면 고통 될 것 없사오나/ 연약하온 이 내몸엔 이것 또한 중하오니 / 임의 품에 나를 안고 눈물 씻어 주사이다// 먹는 것도 임을 위해 입는 것도 임을 위해/ 임을 위해 사옵다가 임을 위해 죽으리니/ 사랑하는 임이시여 나를 도와 주사이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그의 고백이요 삶의 절규이다. 박용묵의 호는 ‘영파(靈波)’이다. 즉 ‘영적 파도’인데, 그의 메시지가 그렇게 전해지기를 열망하는 호소이다.박용묵은 평생에 28권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설교집, 시조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특별히 효(孝)에 대한 설교는 지금도 감동을 주고 있다.인도 선교의 비젼박용묵이 대길교회에 시무하면서 인도선교의 위대한 걸음을 걷는다. 그의 선교전략은 선교사를 먼저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을 한국에 데려와 신학교육을 시키고 목사로 안수하여 인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다.인도 청년 노수길(한국 이름)이 한국에 와서 대길교회 소속으로 총신대신대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 여성과 결혼하여 인도 선교사로 파송된다. 노수길의 동생이 이를 따라 하였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인도에 ‘코인신학교’(Korea-India 의미)가 설립되어 지금도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박용묵은 인도선교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 유언에 따라 그의 자녀들이 ‘영파선교회’를 조직하고 인도선교를 계속하고 있다.대를 이은 7자녀들박용묵에게는 6남1녀의 자녀가 있다. 모두들 자신의 영역에서 충성하고 있다. 7명의 자녀는 목사 3, 장로 2, 집사 1, 권사 1명으로 신앙의 대를 이어 헌신한다.장남 박재천 목사(한국문인교회 시무)는 오랫동안 교목으로 청소년교육을 하였고, 시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한다.차남 재형 장로(명지병원)는 서울의대교수를 역임하였고, 대길교회 장로로 믿음의 터를 지키고 있다.장녀 성순 권사는 7남매 중 유일한 딸로 교회 반주자로 헌신하고 있고, 삼남 재열 집사는 여행업계의 주요 인물이다. 사남 재섭 목사(기쁨의 교회)는 부친의 뜻을 이어 사명자의 길을 가고 있다.오남 상은 장로(안양 샘병원장)와 육남 상진 목사(장신대 대학원장)은 쌍둥이다. 한 사람은 의사, 한 사람은 목사가 되어 이 땅에 생명사역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오남 박상은 박사가 아버지의 믿음의 유산을 글로 엮었다. 「박용묵 목사의 10만 명 전도의 꿈」(국민일보, 2011)은 아버지의 복음 열정을 아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쓴 책이다.3대 목사의 가정장남 박재천 목사의 장남 양현 목사(샘병원 원목실)가 3대 목사의 대를 이었다.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병원 원목으로 사역하고 있다.3대는 양현 목사를 비롯하여 총 16명이고 이들의 자녀들이 ‘5대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대를 이은 신앙 즉 계대신앙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여기에 더하여 대를 이은 헌신은 축복의 명문가를 만든다.자식을 위한 눈물의 기도는 감사의 열매를 풍성하게 한다. 목회자, 부흥사, 시조시인의 사역이 그의 후손들을 통해 귀하게 열매를 맺고 있으니 오직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3-07
  • 4. 4대 목사
    1대 김정복 목사·2대 김두영 목사·3대 김의석 목사·4대 김현철 김현성 목사 섬김의 삶이란 힘들고 어렵지만 그 열매는 많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양식을 준다. 믿음의 선진들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바쳤고 이웃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다.이 땅에서 가장 힘들고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소록도’에서 이들의 목자가 되어 섬김의 삶을 살아온 신앙의 가문이 있다. 3대 목사에 2대는 3명의 목사, 2명의 사모가 되어 모두 목회자로 헌신하였고, 3대는 젊은 부목사들이다..소록도의 꿈소록도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센병 병자를 위한 국립 소록도 병원이 있고, 치우된 환자들을 위한 삶의 공동체가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이곳은 슬픔의 눈물로 시작하여 감격의 찬송으로 끝나는 곳이다. 절망으로 이곳에 와서 그리스도를 만나 소망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기적의 섬’이다. 이곳에서 헌신한 목자들의 사역은 수십 권의 책에 기록하여도 부족하겠지만 우리는 두 사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김정복 목사와 김두영 목사가 그분들이다. 김정복 목사는 충남 출신으로 대한제국 군인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고, 귀국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와 전남 지방에서 목회하다가 해방 후 소록도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9월 6·25전쟁 때 순교의 제물이 된다(김정복 목사에 대한 연구는 김남식 지음, 김정복, 소록도의 순교자[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18]와 김남식의 논문들이 있다).김두영 목사는 한국교회사의 숨겨진 인물이며 그의 사역의 특이성은 소록도 교회에 부임하여 32년 2개월을 헌신한 일이다. 또 그가 은퇴한 후 자녀들이 대를 이어 이곳에서 사역하였다. 필자는 그에 대한 전기를 쓰고 있다(김남식 지음, 김두영, 소록도의 목자). 그러니 김정복과 김두영을 통해 소록도의 신앙적 흐름을 정리하는 것이다.신앙의 뿌리 그리고 헌신이 가정의 이야기를 김두영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자. 이 가정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김두영의 증조 할아버지부터이다. 이 분은 한국교회 초대교인 중의 한 분으로 전도에 열심이었다.김두영은 평양 이천교회 김경호 장로의 장남으로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난다. 김경호 장로는 ‘전도대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전국을 누비며 전도하였고, 특히 개인전도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흐름이 그의 후손들에게 계승되고 있다.김두영의 장인은 평양 숭실대학교 교학처장을 지낸 한창선이다. 그는 3·1운동에 참가하여 경찰에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의 그의 재판 판결문이 구 중앙청 지하 서고에서 발견되어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았다.이러한 신앙의 뿌리 속에서 김두영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신기할 정도의 일을 하였다. 그의 사역을 보면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30년 그의 나이 14세 때에 법수리교회 개척의 중심이 되었고 1933년 17세 때에 신우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19세에는 기독청년면려회 평양노회 연합회 서기가 되고「평양면려회보」를 발간한다.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김두영의 사역에서 기억할 것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하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는 1937년에 일본에 유학하여 준대상업학교 졸업반에 편입한다. 1939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다.이 시기에 그는 남들이 볼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한다. 기독교인 정치지도자들과 친교를 가졌고, 이 관계망을 통해 조선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한다.김두영은 평양에 와서 증경총회장 김선두 목사를 모시고 도쿄에 가서 신사참배 반대를 위해 기독교 정치지도자들과 각료들을 만나 진정을 한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으나 김선두와 김두영의 이러한 운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합법적 반대 모델로 불린다.김두영은 도쿄에서 숭덕교회를 설립하고 유학생과 교포 전도에 진력한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들자 유학생에게도 징병령이 내려졌다. 1944년 4월 김두영은 육군 군속으로 평양병사구사령부에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는다.헌신자의 길해방이 되지 김두영은 평양 기독교 종합사무소 소장으로 북조선 건국준비위원회 대표로 정권인수식 사회를 맡을 정도로 사회활동을 하였다.공산당의 박해가 심해지자 1947년 5월에 월남하여 활동하다가 1949년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53년에 졸업한다. 목사 안수를 받고 대구 영락교회 부목사로 한경직 목사를 돕는다. 그 후 소사중앙교회 목사와 전국 순회부흥목사로 헌신하다가 1962년 2월에 소록도 교회에 부임한다.소록도교회 32년 2개월의 사역은 기적의 세월이다. 소록도 여덟교회를 공동으로 담임하여 ‘소록도의 목자’의 삶을 산다.그는 단순히 설교하고 심방하는 목사가 아니었다. 그의 사역은 ‘전인구원’과 ‘연합목회’였다. 전인구원은 영혼구원, 육신구원, 경제구원, 사회구원, 교육구원이라는 다섯 영역으로 그의 사역이 압축된다.대를 이은 헌신자들김두영에게는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는데 5남매가 모두가 목사와 사모가 되는 특별한 복을 받았다.장남 김의석 목사는 소록도교회 부목사로 헌신했고, 현재 뉴질랜드에서 교포선교를 하고 있다. 차남 중석 목사는 서울음대 성악과 출신으로 총신대음악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사랑교회 원로목사와 북한교회세우기연합 사무총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3남 승석 목사는 충만교회 담임목사로 갈보리선교회 회장으로 동남아지역 선교에 열심이다.장녀 김명자 사모는 중소기업중앙회 관리이사 출신인 이상호 강도사의 부인으로 헌신하였고, 차녀 김명신 사모는 고 박창훈 목사의 부인으로 소록도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필리핀 마닐라 사마리아 교회 목사로 헌신하였다. 박창훈 목사는 필리핀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역하다가 순직하였다.신앙의 대는 4대 목사로 이어진다. 김승석 목사의 두 아들이 목사가 되어 헌신하고 있다. 김현철 목사는 충만교회 부목사와 갈보리선교회 총무로, 김현성 목사는 수원 화산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김두영의 조카 김요석 목사는 전남의 한센병 치유자 정착촌인 영호교회에 시무하다가 지금 몽골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이 가문의 흐름은 소록도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섬김과 선교라는 두 단어가 이 가정의 대표적 화두이다. 어린 시절을 소록도에서 보낸 자녀들은 모두가 목회자 사모가 되었고, 필리핀, 몽골, 동남아 북산선교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다.신앙은 헌신을 통해 계승된다. 교회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사역은 오늘의 우리에게 섬김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떤한지를 보여준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2-22
  • 3. 4대 목사 가정… 3대가 같은 교회시무
    민족주의자 이만집 목사·독립운동가 이성해 목사·부흥사 이호문 목사·목회자 이선목 목사 4대 목사를 배출한 복된 가정에 더 큰 복이 임하여 3대가 같은 교회를 시무한 가정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은총이다.이만집-이성해-이호문-이선목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아름다운 계보는 역사적으로 조명할만한 의미를 가진다. 이들의 자취를 추적해 보자.민족주의자 이만집 목사1대 이만집 목사는 평생에 3.1독립 운동과 자치파 파동을 겪으며, 교단에서 제명되기도 하고, 세월이 흘러 복권되는 특이는 경력의 소유자다.그는 1875년, 경북 월성군 강동면 호명리에서 출생하였고,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안의와(Tames E. Adams)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고 경주에서 입신하였다.1906년, 대구 계성학교의 창설교사로 부임한다. 교장 안의와, 교사 이만집, 학생 27명으로 시작된 이 학교는 기독교 사학 명문으로 알려진 계성중고등학교이다. 이만집은 이 학교에서 주로 한문과목을 가르쳤다.1909년,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2년 장로 시무 사면을 하고 순회 조사로 부해리(H.M. Bruen) 선교사와 함께 경북 일원을 순회 전도를 하였다.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신학교 재학중인 1914년 말 대구에 남산교회를 설립하고 부해리 선교사와 동사하였다. 또 1917년에 평양신학교 제10회로 졸업하고 제2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그해 9월에 남산교회 위임목사가 된다.다시 1918년, 대구 남성정교회 위임목사가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대구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발기로 교남기독청년회(현 대구 YMCA)를 조직하고 회장에 피선되었다.이만집은 대구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보였다. 여기서 그의 삶의 급변이 일어난다.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였고, 3월 8일 대구 서문 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당한다.1919년 4월, 대구 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 언도를 받았고,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3년 언도, 7월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3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다가 1921년 2월에 대구감옥에서 출옥하였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이만집이 3년 징역을 받았는데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민족대표 의암 손병희 선생이 3년 언도를 받은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이만집의 영향력이 비록 지방에 있었지만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다른 하나는 재판의 속전속결이다. 1심이 4월, 복심이 5월, 고등법원이 7월에 언도할 정도로 총독부는 대구 만세운동을 하나의 재판의 모델로 삼았다.출옥한 이만집은 대구 남성정교회에 시무하다가 1921년 5월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맹후학을 발단으로 교회가 분규에 휘말리고 이것이 노회 문제가 되어 1923년 3월 18일 이만집 목사와 박영조 목사 등이 선교사들로부터의 자치를 선언하여 이른바 ‘자치파 파동’이 시작된다.교회측과 선교사 중심의 노회측이 교회당 소유권 문제로 승소와 패소를 거듭하다가 1931년에 노회측의 승소로 예배당을 노회측에 인계한다.이만집 목사의 자치측은 봉산교회를 설립했고, 1936년에는 장남 이광세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관을 세운다. 장안사 맞은 편에 30정보의 땅을 확보하고 3동의 건물을 세웠다. 이 수양관은 신사참배 강요를 피하여 온 성도들의 기도처가 되었다.이만집은 1944년 7월 69세의 일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1999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예장통합 경북노회에서 2005년에 복권시켰다.여기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자치파 파동이 선교사와 대립하였기에 반미로 몰렸고, 일부 역사가들이 ‘친일파’로 매도하였다. 그러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학술지인〈신학지남〉1985년 겨울호에 김남식의 논문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운동연구”에서 ‘이만집은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라고 하여 기존 학설을 뒤엎었고, 친일파라고 한 학자의 사과까지 받았다.김남식은 1987년에 〈이만집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저술하였고, 이것이 보훈처에서 인정되어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민음의 대를 이은 후대들이만집의 장남은 이광세 목사이고, 차남은 이성해 목사이다. 이성해 목사에 대해서는 김남식이 “이성해 목사, 그 성자적 삶”이라는 전기에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이성해는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체포되었다. 아버지 이만집 목사는 징역 3년, 17세의 아들 이성해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이성해는 일본 관서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한다. 귀국한 이성해는 아버지를 도와 금강산 수양관 건립에 참여한다.이성해의 생애에서 획기적 사역이 시작된다. 그것은 철원기도원의 설립이다. 철원의 한탄강변에 기도원을 세웠고, 한국교회 영적운동의 모판이 되었다. 그 후 목회에 헌신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가족을 두고 홀로 남하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1963년에 강릉에서 인천 숭의감리교회로 부임하였고, 1973년에 은퇴하여 후임으로 아들 이호문 목사를 세웠다.이호문 목사는 1938년 경북 월성군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을 거쳐 목사가 된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흥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적운동을 주도하고 숭의교회를 10만 성도의 초대형 교회로 성장시켰다.그의 타고난 열정은 한국교회 역사에 기억되어야 할 일이다. 목회와 부흥에 이어 인천여자신학교를 굴지의 신학교로 성장시켜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을 육성하였다.4대 이선목 목사는 이호문 목사의 장남으로 목원대 신대원을 수료하고, 영국 유학을 한 후, 2008년에 아버지를 이어 숭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다.4대 목사 가정에서 3대가 같은 교회를 시무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서만 가능하다.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그 열정이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다. 필자는 이만집 목사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만집, 이성해 두 분의 전기를 집필한 바 있기에 그 가문의 흐름을 잘 알고 있다.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믿음들의 꽃을 피워 ‘4대 목사, 3대 같은 교회 목회’라는 기적을 이루었다.
    • 칼럼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2-14
  • 2. 나라와 교회봉사의 3대 장로
    독립운동가 이명룡 장로·피납자 이경선 장로·선교사 이대영 장로 한 가문에서 3대 장로가 나는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큰 복이다. 많은 가문이 헌신의 삶을 살았지만 그 가운데도 나라와 교회봉사의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 역사여행을 떠난다.이명룡-이경선-이대영으로 이어지는 장로 가문의 역사는 특이하다. 독립운동가, 피납자, 선교사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이들이다.독립운동가 이명룡 장로이명룡 장로는 1873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면 유정리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독자인 그는 6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12살 때 부친상을 당하고 모친 슬하에서 6남매가 성장했다. 1885년에 김성련과 결혼하고 20세 때 정주로 이사한다.1899년에 유상도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 시작하고 1902년 정주읍교회에서 노세영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젊은 이명룡은 정주군 상공회의소 소장에 피선될 정도로 사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07년에 신민회에 가입하였고, 1940년 봄에는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지방사업가 130명 중 한 명으로 일본의 산업계를 시찰하였다.1911년 10월에는 이른바 ‘데라우찌 총독 암살 음모사건’이라는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고동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하루 2끼 먹기와 냉수마찰을 시작하였다. 이명룡은 1915년 8월 45세에 덕흥교회 장로로 장립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신앙이나 사업에서 서북지방의 지도자로 일하게 된다. 1918년 12월 ‘윌슨 14개조 강화조건’이 보도되자 이승훈 장로와 양전백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논하였다.1919년 2월 15일에 이승훈과 상경하여 3.1운동 거사 사전 준비를 하였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옥고를 치르고 나온 그는 고당 조만식 장로의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평북노회 회계 등 교계 일에도 헌신하였다.1938년부터 45년까지 덕언면 덕성동 농장을 경영하며 목회일선에서 은퇴한 김병조 목사를 덕성동으로 이사 오게 하여 농토를 마련해주고 이웃에 살게 하였다.해방이 되자 조만식 장로의 권유로 조선민주당 고문에 취임하였고, 7천석이나 되는 사재를 털어 평동(平東)중학교를 설립하였다.1947년 4월 25일, 차남 이경선 장로가 공산당에 체포되어 행방이 묘연해지자 월남을 감행한다.이 장로는 남한에서도 열심히 헌신하였다. 1949년 1월 24일 서울 인왕교회를 설립하였고, 수복 후에도 각종 애국단체의 회장과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11월 12일 오전 4시 반, 충무로 자택에서 84세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었다. 11월 20일 중앙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엄수하였고, 1962년 3월 1일, 윤보선 대통령에 의해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피납자 이경선 장로아버지의 대를 이은 아름다운 역사가 계속된다. 2대 이경선 장로는 1899년 4월 21일, 평북 정주에서 이명룡 장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911년 선천 신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10월에 일어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아버지가 체포되고, 신성학교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13년에 서울 경신중학교에 편입하고, 후에 YMCA 영문과와 사진과를 수료한다.3.1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명룡 장로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체포되었고, 이경선, 이경화 형제는 시위에 참여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중국으로 도피했다. 이경선은 중국에서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한다.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면서 교회 집사로 봉사하던 중 27세에 정주교회 장로로 장립받았다. 1926년 안창호의 권유로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였고, 1937년에는 ‘흥사단 사건’으로 연행되기도 하였다.해방 후 공산당의 주일선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에는 ‘정주학생의거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배당하여 생사를 알지 못하나 순교의 제물이 되었으리라 믿는다.소설가 선우휘는 ‘노다지’라는 소설에서 〈수인〉은 선우휘이며, 〈기욱〉은 이경선 장로의 큰 아들 이만영을 모델로 하여 소설화하였다. 선우휘와 이만영은 이웃에 살았고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지명관 교수 등 이 장로의 제자들이 그를 추모하며 신앙의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있다.선교사 이대영 장로3대의 장로는 하나님의 큰 복이다. 이대영 장로는 평북 정주에서 이경선 장로의 차남으로 1925년에 출생했다.기독교 신앙과 독립운동가의 가문이기에 철저한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을 받았다. 영변 숭덕중학교를 거쳐 도쿄 동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의주 부청 재무과에 근무했고, 또 정주 사립신안학교 교사를 지냈다.아버지 이경선 장로가 피납되자 1947년에 할아버지 이명룡 장로를 모시고 월남하여 군인, 공무원, 사업가로 활동하였다.1979년에 안수집사가 되었고, 1982년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교회봉사와 함께 노회, 총회 등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1990년에는 통합측 함해노회장이 되었다.그의 사역에서 특이한 것은 1992년 12월에 남태평양 팔라우섬에 선교사로 가서 한인장로교회를 설립하고, 교포선교와 중국인 및 원주민 선교사역을 한 일이다.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는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 이 가문에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다.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명룡 장로로 시작되는 신앙의 계보는 남태평양 섬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신앙의 계승은 단순한 직분의 계승이 아니라 사명의 계승이며 사랑의 실천이다. 독립운동가의 가정에서 믿음의 꽃이 피워진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우리도 신앙의 아름다운 계보를 형성하기 위해 오늘을 하나님의 소명의 날로 귀하게 사용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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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1-31
  • 1. 한국교회 첫 5대 목사가정 : 박태로 목사와 그 후손들
    선교사 박태로 목사, 순교자 박경구 목사, 신학자 박창환 목사, 목회자 박호진·박범 목사 신앙의 대를 이어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복받는 길이다. 한국교회에 신앙의 명문가가 누구일까? 사람에 따라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필자는 3대 이상의 목사와 장로의 가정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찾으려고 한다.한국의 첫 5대 목사 가정기독교가 전래된지 130여년의 역사에서 2012년 4월에 첫 5대 목사 가정이 탄생했다. 박태로-박경구-박창환-박호진-박범 목사로 이어지는 5대 목사 가정이다.선교사, 순교자, 신학자, 목회자 등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헌신을 한 사람들이다. 이 가정의 가훈은 “성삼위 하나님만 믿고 섬기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 앞에 기쁨을 주자”이다. 소박하고 순수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수묵화같은 그윽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5대 신앙’도 소중하거든 ‘5대 목사’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의 산물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순교의 제물이 되기까지 하였다.한국교회의 중국 선교사 1호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회의 결의 가운데 특이한 것은 총회 조직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일이다.1907년 독노회 조직기념으로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파송한 바 있다. 이것도 귀하고 놀라운 것이지만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제1호 선교사로 파송받은 이는 황해도 재령읍교회에 시무하는 박태로 목사였다.이런 헌신의 뒤에는 숨은 봉사자가 있었다. 재령 지역을 담당하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한위렴(William Hunt 한부선 선교사의 부친) 선교사였다. 그는 박태로 목사의 사역의 멘토였고, 총회 결의에 따라 박태로 목사 등과 중국 산동성 현지 답사를 하였다. 한위렴 선교사는 박태로 목사에게 선교사로 헌신하기를 권면하였다. 당시 재령읍교회는 주일에 1천 여명이 회집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5만, 10만이 되는 수치일 것이다.박태로 목사는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닫고 산동성 선교사로 떠난다. 평양신학교 제5회 졸업생인 그는 총회의 결정에 순종하여 말도 모르고 풍속도 다른 중국 선교사로 헌신한다. 박태로 목사는 ‘5대 목사 가정의 아브라함’이 된다. 그의 후손들이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의 제물이 된다.순교자, 2대 박경구 목사2대 박경구 목사는 교사 출신이다.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 교사와 사리원 덕성보통학교 교장을 거쳐 진남포 덕신학교 교장으로 헌신하였다.그는 목사의 아들로 또 자신이 목사로 헌신하며 그의 아들도 목사가 되기를 원하였다. 아들 박창환에게 편지하기를 “우리는 목사 집안이다. 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하였다.박경구 목사는 일제강점기 말에 황해도 경이포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45년 4월 6일. 사복형사 두명이 박 목사를 체포해 갔다. 죄목은 박 목사가 주도하여 황해도 황주군 일대의 목사들이 반국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8.15 해방과 함께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박경구 목사는 석방되어 장연읍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아들 창환에게 서울로 가서 신학공부를 할 것을 권유하였다.1946년 늦가을 박창환은 어선을 타고 남하하였다. 이것이 이산가족의 시작이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교회탄압에 박차를 가했다. 가까운 이들이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으나 ‘내 양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거절했다고 한다.1950년 6월 25일 새벽 박경구 목사는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이 북진하자 감옥의 죄수들을 모두 학살하였다. 박경구 목사의 손과 발이 토막 난채 죽었다. 이 날이 1950년 10월 15일이었다고 한다.신학자, 3대 박창환 목사3대 박창환 목사는 1924년생으로 아직도 생존해 계신다.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의 「헬라어 교본」으로 공부하였다.박창환 목사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제국음악학교 작곡과에 입학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졸업반에는 나운영, 전봉초 등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 말기여서 유학생활은 몇 달 가지 못하고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 다니다가 일본 해군에 징집되었다.징집된 지 한 달만에 해방이 되어 무사히 귀환하였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부친 박경구 목사도 석방되어 온 가족이 함께 모였다. 박창환은 아버지의 권유로 남하하여 조선신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조선신학교 편입 1년만에 이른바 ‘신앙동지회’ 사건이 터졌고 신학생들은 박형룡 박사가 있는 부산 고려신학교로 옮긴다.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 교장 취임 9개월만에 서울로 와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자 박창환도 서울로 왔다.그러니 5년여 세월에 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를 두루 경험한 셈이다. 1948년 7월 9일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그는 박형룡 박사의 추천으로 1948년 9월 학기부터 신학교 어학 전임강사가 되어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넷을 갓 넘은 미혼 청년이었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한 평생 신약신학과 성경 원어 교수로 헌신한다.그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하여 Th.M. 학위를 받고, 장신대 13대 학장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가 선교지의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다.목회자, 4대 박호진 목사, 5대 박범 목사신앙의 명문가는 당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를 이어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해야 한다. 2012년 4월 17일 예장 통합측 평북노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5대 목사 가정’이 탄생했다. 5대 박범 목사가 목사 장립을 받았다.4대 박호진 목사는 “인간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격려하였고, 5대 박범 목사는 “신앙의 좋은 전통을 전수해 준 가정의 영향이 컸다”고 하였다.이렇게 탄생한 5대 목사 가정은 헌신자의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고, 바로 전하는 것이 믿는 자의 본분이다”라는 지표를 안고 살아간다.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되었고 그것도 5대를 계승한 것이니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세월이 더 흘러 한국교회에 6대, 7대 목사 가정들이 났으면 좋겠다. 그것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세로 말이다.필자는 그동안 100권 이상의 책을 쓰고 번역하였다. 마지막 남은 때에 꼭 쓰고 싶은 책들이 있다.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를 통해 신앙의 아름다운 계보들을 발굴하여 태양에 비추이게 하는 것이다. 또 「한국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순교자들의 자취를 찾아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한국교회에 ‘순교신앙’을 확립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미담들」을 쓰고 싶다. 욕만 먹는 교회들과 욕하는 사회를 향해 “아니다. 이런 믿음도 있다”고 외치고 싶다.※자료를 찾습니다※ 3대 이상의 목사와 장로 가정의 역사를 아시는 분들은 「교회연합신문」으로 연락바랍니다. (T.02-744-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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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의 명문가를 찾아서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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