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2-15(일)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기다림’(눅 2:25-32)
    누가복음을 보면,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이스라엘 역사의 어둡고 고달픈 시간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현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적극적인 삶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복되다.”(사 30: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메시아를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으로 위로를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이 의로웠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고 하더니 과연 아기 예수께서 그 부모에게 안겨 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아기를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제 시므온은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를 본 것은 주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본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보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 약속을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통해 주의 구원을 확인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죽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할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딛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 합니다. 안나는 남편이 죽은 후 성전에 들어가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84년간 봉사하는 중에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안나는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로 안나라는 여예언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았다. 그는 처녀 시절을 끝내고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고, 과부가 되어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바로 이 때에 그가 다가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눅 2:36-38)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대림절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억하면서 또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도록 복음을 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12-15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꼭 쓰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나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시를 쓰는 시성과 시심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부적 시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시심과 시성이 길들여지고 닦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습작하고 창의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런 걸 가리켜서 자발적 진취성이라고 합니다. 자발적 진취성이란 누가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습작하고 창의적 훈련을 받음으로써 진취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문단에 데뷔한 지가 30여 년이 되는데 그동안 13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그런데 13권의 시집을 내기까지 저는 천 권에 달하는 시집을 읽었고 많은 시 창작 이론서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 어렵고 딱딱한 시 창작 이론서보다는 10권의 다른 시집을 읽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시 창작 이론은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고 낯설었습니다. 그 원리와 규칙을 따른다면 오히려 더 시 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붕어빵을 찍어내듯 거의 비슷비슷한 시가 나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창의성은 없고 모방 내지는 규격만 갖추는 시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영혼을 담은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영혼을 담으면서도 문학적 귀족성을 갖춘, 그러면서도 대중성이 있는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부턴가 시 쓰기 창작집을 낼 수는 없을까 고심하였습니다. 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순수 서정시, 그러면서도 문학적 품격을 갖춘 시를 쓰는 안내서를 쓸 수는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던 중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이신 김종회 교수님으로부터 “시 창작 강의를 해 줄 수 없느냐”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때가 제가 정말 바쁘고 힘들 때였거든요. 그래도 왠지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강의 원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서 강의를 했더니 김종회 교수님도 감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강의 원고에 다시 몇 번을 보완하고 수정해서 샘터사에 보냈더니, 처음에는 책 원고가 너무 좋다고 하였지만, 책에 수록된 현대 시인들의 시가 저작권 문제 소지가 있어서 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 앞에 캄캄하고 굳은 철벽이 놓여 있는 듯했습니다. “이 좋은 시 예문을 빼버리면은 도대체 어떻게 시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마침 그 벽을 무너뜨리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명시들의 전문을 빼고 제목만 소개하고 해설을 한 후 대신 저의 시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를 고르는 문제에서부터 시를 쓰게 된 동기와 해설을 덧붙여야 하다 보니까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선 목사님과 함께 협업을 했습니다. 제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해설을 해 주면 선 목사님이 정리를 했는데, 최종 수정과 교정 보완 작업은 제가 다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제 심신이 탈진을 맞을 때였거든요. 그래도 이 원고를 보고 또 보고 또 정리하고 또 보면서 마침내 완성을 한 것이죠. 그래서 마침내 12월 10일에 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이 책은 진짜 제 영혼을 담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건강까지 털리게 할 뻔했지요. 어쩌면 이 책은 저의 유고 서적이 될 뻔했습니다. 제가 왜 이 책을 쓰려고 했냐면 어차피 인생은 한 폭의 시와 같은 삶을 살 거든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걸작품, 곧 명시(名詩)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도 하고요.(엡2:10)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명시로 지음 받은 것처럼 우리도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회복해야 명시를 쓸 수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이 시대가 너무나 오염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언어가 오염이 돼서 인포데믹 가짜뉴스, 갖은 욕설과 비방이 난무합니다. 저는 이 시대를 사는 한 목회자요 시인으로서 언어를 세탁하고 정화를 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혼을 담은 시 쓰기를 쓴 것입니다. 더구나 시는 고대에서부터 신탁(神託)으로 이해했습니다. 중국이나 그리스에서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시대 혼, 제사장적 역할, 미래를 예지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차원의 보다 폭넓으면서도 성경에 가까운 시론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저의 인문학적 소양과 깊이를 한 권의 책에 다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런 책을 쓸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 은혜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기자들이 “아직까지 천주교나 불교에서도 이런 책이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소 목사님은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느냐”는 말을 듣고 더 감사했습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마음이 더 순수해지고 더 청결해지며 시적 사랑이 승화되기를 기도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12-14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복 받는 길을 택함’ (수 8:24~35)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33-35절) 오늘 말씀의 내용은 아이 성을 정벌하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광야 벌판에서 아이 성 사람들을 끝까지 뒤쫓아가서 칼로 모두 무찌릅니다. 성 안팎에 있던 모든 아이 성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 날 아이 성에서 죽은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모두 합해 만 이천 명입니다. 이 전투 동안 여호수아는 손에 든 창을 높이 치켜든 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이 성의 모든 백성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그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들은 모두 진멸했지만, 짐승들과 아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전리품으로 취했습니다. 전리품을 취할 때가 있고 취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하심과 그 선포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실패한 사람이 아간입니다. 아간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큰 위험에 처할 뻔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시하고 탐욕과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결과로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고 눈에 보이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공동체 안에서의 거룩성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를 드러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그렇게 멸망한 아이 성은 오랫동안 폐허의 상징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여호수아는 전쟁에서 승리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에발 산에 제단을 쌓습니다. 그 제단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미 율법책에 명령해 둔 방식 그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들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제단 위에서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예배를 올리게 됩니다. 에발산에 쌓은 제단을 자연 그대로의 돌들로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애굽기 20장 2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가나안 지역의 제단과 신전들은 종종 정교하게 다듬은 돌, 조각, 상징적 문양들로 장식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방의 종교나 문화와는 다르게 하나님 앞에 “성별(聖別)”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의 화려함보다는 말씀과 언약, 순종이라는 보이지 않는 중심을 중요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기의 욕심을 따라갈 때 교회와 공동체에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날 장로들, 지도자들, 재판관들, 레위 제사장들, 그리고 온 백성이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앞에 나뉘어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전해 준 율법에 기록된 복과 저주의 말씀을 빠짐없이 낭독하여, 전쟁의 승리 뒤에 온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신명기 27–28장에 따르면, 그리심 산 쪽에서는 순종할 때 주어질 복에 대해서, 에발 산 쪽에서는 불순종할 때 임하는 저주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큰 소리로 조목조목 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고, 그때마다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도 언제나 복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포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라감으로써 축복의 자녀가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12-08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온기
    지난 수요일 오후에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가 존경하는 김상복 원로 목사님과 대담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크리스챤연합신문 1000호 기념으로 한국교회 원로 목회자와 현장 목회자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묻고 진단하며 미래의 한국교회가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 토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보는 관점과 의견은 동일하였습니다. 결국은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시대와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AI 시대에 대해서 묻는 대답도 똑같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성형 AI 시대를 맞고, 미래에는 AGI 시대를 맞는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도 아니고 인간 이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AI가 기술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생식 기능도 없고 더더구나 종교와 예술의 영역은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물론 AI가 한국교회에 유혹을 주는 경우가 많죠. AI로 쉽게 설교 준비를 하고 AI로 쉽게 기도문을 만들어 낸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릎 꿇고 기도문을 작성해야 하고, 무릎 꿇고 설교 준비를 해야 하는데, 너무나 쉽게 AI를 의존해 버린다면 교회의 영성은 침체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1000호를 맞는 크리스챤연합신문을 향한 격려나 권고를 부탁할 때도 김상복 목사님과 제가 똑같은 의견을 내었습니다. 크리스챤연합신문이 선지자적 정론의 역할을 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교회의 역할을 대변하고 보호해 주는 제사장적 혹은 목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교회가 먼저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야죠. 원로 목사님과 제가 25년 차이면 한 세대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장 목회자와 원로 목회자의 생각이 거의 같다는 걸 보면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분 연세가 80대 후반이신데 정말 기억력, 표현력이 너무너무 훌륭하시고 또렷하셨습니다. 대담이 끝나고 나서 저를 허깅해 주시면서 “소강석 목사, 너무 수고 많이 했어요. 특별히 극단적 이념적 행보를 하지 않고 한국교회를 지키는 데 너무 수고 많았어요. 코로나 때도 한국교회를 지키고 세우느라, 또한 한국교회 생태계를 지키고 세우는데 너무너무 애썼어요. 한국교회를 위해서라도 소 목사는 정말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운동도 하고 골프도 치고 때로는 쉬기도 하면서 앞으로도 20~30년 동안 한국교회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두 눈에는 이슬이 촉촉이 맺는 듯했습니다. 저도 목사님께 이런 인사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저희들의 우산이 되어 주셔야 저희가 열심히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순간 저는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가 하나 되는 순간을 느꼈습니다. 옛것과 지금, 그리고 새것이 공존할 수 있으며 하나 될 수 있다는 감격을 느꼈습니다. 저도 2, 30년이 지나면 후배 목회자들에게 그런 존경을 받고 또 조언과 격려를 해줄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하며 지하 주차장까지 나가서 배웅을 해드렸습니다. 저의 바쁜 일정 때문에 대담 시간을 세 번이나 변경하게 된 점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신 목사님이 더 큰 어른으로 느껴졌습니다. 목사님을 배웅하고 뒤돌아서는데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때론 폭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날을 잠 못 이루며 오직 한국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고독한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날 오후, 원로 목사님의 따스한 위로의 말들과 다정한 눈빛은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온기처럼 느껴졌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12-07
  • [언론회 논평] 방송법에도 차별금지 조항을 넣으려는 여당
    지난 11월 13일 더불어민주당의 최민희 의원이 대표 발의(공동발의 김현, 이주희, 노종면, 김우영, 한민수, 조인철, 황정아, 이훈기, 임오경)한 ‘방송법 일부개정 법률안’에 의하면,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는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심의는 하지 못하게 하고, 사회구성원에 대한 다양성 존중과 차별 및 혐오 방지와 금지 조항을 넣으려고 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방심위의 주된 목적은 잘못된 방송이나 왜곡되고 편향되어 방송의 공정성을 해친 방송물에 대하여 바로 잡는 심의(審議)하는 기능이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능은 삭제하고, 뚱딴지처럼 차별금지법에 나오는 조항을 넣겠다는 것은, 방심위의 기능과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으로써, 논란의 소지가 크다. 이들이 낸 의안에 보면, 제33조(심의 규정)에서 제2항에 각호를 수정하거나 신설했는데, 기존의 제5호에서 ‘양성평등에 관한 사항’을 ‘성평등 및 성다양성 존중에 관한 사항’으로 변경하고, 제8호에서는 기존의 ‘인종, 민족, 지역,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에 관한 사항’을 ‘차별 및 혐오 방지와 금지에 관한 사항’으로 바꾸어, 포괄적 차별금지 조항을 넣겠다고 한다. 지금 힘센 정치권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는 것을, 온갖 조례와 법률 개정으로 촘촘하게 역차별의 그물망을 치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헌법에서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법률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본다. 방심위의 진짜 중요한 기능인 방송물 심의 규정을 무력화하려는 변명으로(입법발의 제안 이유) ‘공정성 여부는 사람이나 집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추상적이고, 상대의 개념으로 공정성 심의 또한 자의적인 잣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권력이 개입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제안 이유를 더 살펴보자. ‘권력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방송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악용되어 방송의 독립과 자유를 제한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힘이 센 정치 권력들이 그동안 그렇게 해 왔다는 반증이다. 지금 자유대한민국에 참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가? 공정하고 정직한 언론들이 얼마나 되는가? 오죽하면 대형 공영방송사들이 만드는 프로그램들도 시청률을 한 자리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송 현실을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우리는 흔히 언론을 ‘제4부의 권력’이라고 한다. 행정, 입법, 사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은 대부분 특정 정파에 치우침과 쏠림현상이 현저하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그렇다면 입법부가 이런 방송 현실을 타개하려면, 방송심의를 맡은 기관의 역할과 기능을 오히려 강화시켜야 하는데, 반대로 한껏 낮추면서 마치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듯한 태도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단견(短見)으로 보면, 정치 권력자들은 모든 국가 기관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자기들이 쥐락펴락하고 싶어 하겠지만, 긴 안목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모든 국가 기관의 고유한 역할들이 살아나야 하고, 바르게 지켜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비상계엄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탄핵과 특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당시 대통령을 탄핵 시킨 헌법재판소의 정치권에 대한 경고는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 무분별한 법률 개정은 오류가 일어나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한 것 외에는 엄격히 자제되어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12-0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6-27)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창 6:5-6) 이처럼 사람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습은 사라지고, 죄악으로 가득 차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롬 3:10-11)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사람을 인격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 의지, 공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형상은 영혼육의 전인적인 인격과 성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예수께서는 능력의 말씀으로 피조물을 주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없애심으로써 이 세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는데, 사람은 스스로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후 한 사람도 사망의 몸에서 스스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태초에 당신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골 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귀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삶이 마땅합니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로서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 8: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우리의 영혼육의 온 형태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날마다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11-30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산행이 좋은가, 골프가 좋은가?”
    저는 60살 이상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취미 활동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취미가 있다면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고 또 설교 준비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심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 취미이자 제 인생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년의 삶을 살다 보니 체력을 좀 증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산행입니다. 산은 저에게 있어서 별세의 세계요, 출애굽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행을 할 때마다 제 몸과 마음에 끼어 있는 이끼를 벗어내고 다시 새로운 마음을 갖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너무 바빠서 산에 가지 못하고 오랜만에 산을 가면 어쩐지 산에게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세속에 찌들었지 않은가, 너무 바빠서 나를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가 없었지 않은가...” 지금까지 산행은 저의 유일한 취미요, 낙이었습니다. 여름이면 싱싱한 풀잎들과 대화를 나누고 가을이면 마치 엽서처럼 떨어지는 낙엽들의 글자를 새기는 듯하며 겨울에는 하얀 눈을 밟고 산행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에게만 주시는 유일무이한 낙이요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산에 갈 때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이렇게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주여, 이 두 다리로 오늘도 산을 오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산속에서 저를 다시 돌아보게 하시고 성찰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이 권유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산행도 중요하지만 골프도 한번 해보십시오. 골프를 하게 되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산행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또 두근거리는 황홀함의 세계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장로님들도 권유하고 특히 집사람과 아들이 권유해서 유송근 장로님의 안내로 골프연습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뭘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온 열정과 투혼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골프연습장에서 1시간 동안 거의 250타를 쳐 버렸으니 산에 올라갈 때 흘렀던 땀보다 더 많은 땀이 흐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골프에 흥미를 가졌냐면 자다가 일어나 보니까 골프 치는 제스처를 하고 있잖아요. “아, 큰일 났구나. 내가 골프에 중독되어서는 안 되지.”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골프 마귀야, 물러가라.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내 본업이지 골프가 내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저는 그 이후로 필드를 몇 번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뭣 모르고 나갔죠. 그런데 한 번 나가고 나니까 골프가 주는 마음의 신선함, 마음의 새로움, 무궁한 미지의 세계,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아, 어떻게 공을 잘 쳐야 오비가 나지 않고 벙커에 들어가지 않으며 해저드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당분간 거기에 올인하고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장타도 중요하지만 어프로치를 잘해서 퍼팅을 하는 것이 골프 점수를 내는 데는 아주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장타도 중요하지만 설거지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여튼 골프는 분명히 흥미가 있고 경쟁이 있고 호기심이 넘치고 또 끝없이 펼쳐지는 미지의 세계가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아마 그 재미로 골프를 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칙을 정해놨습니다. 설교 준비가 완료가 될 때 필드에 나가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30분 거리 안에 있는 골프장을 가는 것, 그리고 주일을 앞두고 토요일에는 필드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산행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도 갈 수 있고 토요일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산행은 부담이 없는 운동이고 더 주님과 가깝게 하는 운동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프 역시 심신을 이완시키고 또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행이 좋은가? 골프가 좋은가? 산행은 창의적 고독과 사색을 할 수 있어서 좋고 골프는 창의적 관계 형성과 셀프 컨트롤을 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친숙한 습관 탓에 산행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관계성을 맺고 심신을 이완시키는 데 있어서는 골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때로는 골프가 더 좋을 수가 있겠죠. 그래도 아직은 산행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왕초보이지만 골프를 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건강한 목회 사역과 하나님 섬김을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요 도구이겠지만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11-30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계 2:8~11)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9-10절)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계시를 주셨습니다. 특히 일곱 교회를 향한 말씀이 계시록의 초반에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두 교회, 즉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만이 책망 없이 칭찬과 격려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서머나교회와 지도자가 겪고 있는 고난과 가난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9절).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서머나교회와 그 지도자는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을 제공합니까? 가난하면 불편함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하면 쉽게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저절로 낮은 자리가 되어집니다. 볼품없고 빈약해보이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여러 핀잔과 아쉬운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가난한 가운데서 느끼는 처절함과 불편함과 박대 속에서 더욱 필요하고 요긴해지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가난함은 어려움의 대명사입니다. 각종 고통의 중심에 처해있을 때 우리는 간절해지고 이때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픈도어 선교회는 매년 세계에서 기독교로 인해 박해받는 50대 국가를 선정해서 발표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와 아프리카의 수단과 나이지리아 지역은 수천명의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있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수단은 박해받는 국가들 중 5위에, 나이지리아는 7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기독교 탄압과 핍박이 심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박해받는 국가 50개국 중에서 주로 1위에 많이 올라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나라와 가장 근접한 나라, 북한입니다. 형제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들 국가들은 가난한 중에 신앙으로 인해 핍박까지 받고있는 실정입니다. 이들 국가를 위한 지원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특히 가난하고 위협받는 처절함 중에도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이 특히 그러합니다. 나이지리아는 인구의 약 46%가 기독교 신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지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결코 안전한 시대에서 산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반기독교인들로 인한 위험도 크지만, 자칭 유대인이라는 사람들로 인해 성도가 겪는 고난도 큽니다. 자칭 유대인이라는 의미는, 자신들이 선택받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며 신앙인들에게 무거운 굴레를 씌우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실상은 사탄의 집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머나교회에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지 않고 방종하게 되면 자칫, ‘자칭 유대인’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소유한 자로서 그야말로 부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말씀으로 고난을 이겨내며 끝까지 충성하셔서 최고의 은혜를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11-2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우리 모두는 가슴에 시 한 편을 가졌다.”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시 중에 첫 번째로 꼽히는 시가 바로 윤동주의 ‘서시’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 뿐만 아니라 일본인 가운데도 윤동주의 ‘서시’는 가장 애송되는 시라고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윤동주의 ‘서시’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만큼 서시는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서시’에 대해 보편적 인류애나 가치를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시 속에는 암울한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한 청년 시인의 고뇌와 아픔, 민족의 독립을 꿈꾸는 저항정신이 새겨져 있습니다.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합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의 청년 지식인으로서, 스스로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이상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비극적인 현실은 자그만 바람에도 흔들리는 잎새 같은 유약한 존재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섬세하고 순혈적인 자세로 별을 노래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며 고백합니다. 죽어가는 민족, 죽어가는 백성, 죽어가는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끌어안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의 세계를 오늘의 괴로운 현실과 시련이 차갑게 스치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청년 윤동주는 조국의 밤하늘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아니, 하늘마저 빼앗긴 조국의 현실이 얼마나 가슴 저렸을까요. 그래서 밤마다 잠 못 들며 괴로워합니다. 창문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도, 잎새의 작은 흔들림에도, 그것마저도 자신의 잘못인 양, 자책하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하기에 더욱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의 서시가 있었기에, 일제 강점기의 그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에도 민족의 광야 위에 별 하나 빛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KBS 다큐 촬영을 위해서 일본에 갔더니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에서도 대부분 다 서시를 자연의 서정과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노래한 시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별이 별로 없었습니다. 별이 있어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일본 사람들이 동주의 별을 바라볼 때도 편집증적으로 한쪽 시각으로만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이런 설명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윤동주를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모르지만, 윤동주는 한 젊음을 고뇌하고 방황하는 순수서정 시인을 넘어서 민족을 사랑하고 또 양국의 평화를 기원하며 진정한 대한독립을 꿈꾸며 시를 썼던 애국 저항 시인이었습니다. 이런 윤동주의 저항적 시성이 일본에도 꽃 피길 바라고 한 일간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평화와 화해의 다리가 윤동주의 시를 통해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다 놀라워하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미안함과 윤동주를 무참하게 죽게 했던 제국의 만행을 자기들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돌아오는 길에 ‘서시 이후’라는 시를 썼습니다. “윤동주 이후 / 우리 모두는 가슴에 시 한 편 가졌다 / 아무리 시에 관심 없고 / 문학에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 그가 사형수이든 수배자이든 /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 초호화 재벌이든 폐지를 줍는 노인이든 / 경찰이든 단속에 쫓기는 노점상이든 / 꽃처럼 피어나는 소녀이든 / 막다른 골목 유곽의 외로운 여인이든 / 콘크리트 숲 회사원이든 / 지하도에 신문지를 깔고 잠드는 노숙자이든 / 어머니의 손수건 같은 시 한 편 가졌다 / 우리의 지저분한 마음을 / 가혹한 상처를 / 씻을 수 없는 후회를 / 위로하고 닦아주는 시 한 편 가졌다 / 서시(序詩)는 지금도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 우리 가슴 속 별이 되어 / 바람에 스치운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류의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을 내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윤동주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윤동주는 별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두운 밤하늘을 반짝이는 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예배 때는 ‘그대라는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아주 특별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저녁에 많은 성도님들이 가슴에 별이라는 시 한 편을 가지고 오셔서 별들의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고 이루는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11-23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올바른 금식’(마 6:16-18)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모세도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40일 동안 금식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영적인 힘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금식입니다. 평상시에도 문제가 있든 없든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약함과 악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와 재 등을 뒤집어씀으로써 자신이 금식하는 것을 알렸습니다. 위선적인 금식을 한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금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삶의 원점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행위이지 사람들 앞에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억압받는 자들에게 관심 두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폭력을 멈추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행위가 동반될 때 진정한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면 어떤 복을 주실까요?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가정, 교회, 나라를 위해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로 동족인 유다 백성이 멸망하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에게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전했습니다. 3일 동안 주야로 금식한 것을 볼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 말살정책은 무산되고 오히려 이틀 만에 대적들이 전멸하는 대역전을 경험했습니다. 금식기도의 힘입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서 재앙을 면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이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전해지자 왕도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습니다. 왕은 백성에게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7-9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10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서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 금식의 힘입니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금식할 때 주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5-11-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