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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가 분명하십니까’(빌 3:12-14)
- 이 세상은 막연한 삶이 아닌 목표 중심적 삶을 요구합니다. 목표를 확실하게 정하고 실행해가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큰 성공과 승리가 안겨지게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목표로 삼으나 믿는 우리는 세상 사람과 목표가 다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4)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나의 목적과 목표를 일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마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고, 고전 10:31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승리를 꿈꾸는 사람이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승리를 이미 포기한 것이겠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곳에 해결책도 있다는 말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간에 수없는 뜻을 정해 보았고 시행착오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려면 신앙생활의 목표가 명확해야 하며, 목표가 세워지면 즉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앙은 ‘차차 나중에 하겠다’하면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저하고 방황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인생입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뜻을 정했다면 철저하게 지금 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선한 뜻에는 은혜가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따라 물질도 사람들도 붙여주십니다.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늘 비판하고 반대하고 원망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없는 배는 방향을 설정할 수 없고, 이러한 배는 이리저리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인데 만일 천성이란 이 목표가 희미하거나 확정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 물결로 표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생활 뿐 아니라 우리들의 육신의 생활에도 이 진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분명치 못한 사람은 평생 성공하기 어렵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목적이나 목표가 확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상실하면 그 때부터 방황하며 전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집니까? 목표가 없거나 목표가 있어도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표에 이르기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 손을 놓치지 마시고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표를 분명히 하면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미래를 바라보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소망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갔듯이 우리도 이 적극적인 신앙, 좇아가는 신앙을 본받기 바랍니다. 뒤에 있는 것 중에 오늘 푯대를 향해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모두 잊어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표를 세워나가는 사람은 목표 설정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즉각적인 실행에 옮기는 순종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기억합시다(딤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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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목표가 분명하십니까’(빌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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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18년째 이어온 보은행사 이야기
- 지난 화요일은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TV조선 ‘뉴스 퍼레이드’ 생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태생이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저녁형 인간입니다. 그래서 젊을 때 새벽기도하는 게 참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피곤하다가도 저녁만 되면 눈이 반짝반짝 뜨이고 머리 회전이 팍팍 돌아가는 걸 느끼죠. 그런데 그날은 일찍 일어나서 분명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출발을 했는데 차 안에서도 졸려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죠. 생방송이란 편집을 하지 않고 즉문즉답을 적절하게 잘 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현장에 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스튜디오로 들어갔습니다. 물이라도 몇 모금 마시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막상 인터뷰에 응하려고 하니까 목이 많이 잠겨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간 후회를 하였습니다. “물도 좀 마시고, 목소리도 고르게 발성연습도 하고 들어갈 걸 잘못했구나...” 그런데 끝나고 나올 때 앵커께서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목사님, 아주 적절하게 잘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수십 건의 문자가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내용이 “목사님, 너무 잘 하셨어요. 다큐 50분짜리보다 훨씬 더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요. 목이 잠겨서 몹시 불편했고, 워딩도 100% 만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에요. 꾸밈없이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목사다운 목소리였습니다.” 그런 문자가 왔습니다. 이튿날까지 200통이 넘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TV조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피플 퍼레이드 시간에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아닌 목회자를 불러서 인터뷰를 한 것이 방송사로서는 큰 결단을 해야 했으리라고 봅니다. 돌아오면서 전날 있었던 평개원 간사들의 모임에 대한 피드백 문자가 몇 개 떠올랐습니다. 이분들은 매일 교회에 출근을 하셔서 몸과 시간과 물질로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어찌 이분들 뿐이겠습니까?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생각났습니다. 특별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은 김종대 장로님이었습니다. 이분은 18년째 참전용사 초청행사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해 오셨습니다. 수년 전에 장로님께서는 후두암으로 성대를 잃으셨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전문 닥터들이 생존하는 것도 어쩌면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굳센 믿음과 강한 신념으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 왔습니다. 후두를 제거하면 음식 삼키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밥을 점심까지 씹어서 삼켰다고 합니다. 또 점심을 저녁까지 씹어서 삼키고, 저녁식사도 주무시기 전까지 씹고 또 씹어서 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살아야 합니다. 소강석 담임목사님의 사역을 돕고 6.25 참전용사 행사를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라면서 그는 성대를 잃은 후에도 이메일로 부지런히 미국과 소통을 해서 지금까지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겨오셨습니다. 올해는 텍사스주의 달라스에서 행사를 합니다. 왜 그곳으로 가게 되었냐면 그 지역에서 우리 교회 초청을 받은 참전용사들이 너무 감동을 받아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도 후원을 하였는데요. 그래서 그곳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래서 그날 인터뷰를 하고 난 후에 장로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물론 장로님은 후두를 잃어서 전화로 통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께 “장로님 덕분에 인터뷰를 잘하고 왔습니다. 장로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김종대 장로님을 생각할 때마다 생명보다 귀중한 게 사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 또 한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강종직 장로님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장로회수련회를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한 게 아니라 장로님들의 말을 다 경청했습니다. 대부분이 다 담임목사의 목회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건강을 염려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좀 약간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때 강종직 장로님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자기 생각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서도 안 돼요. 우리 목사님은 전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목사님께 순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처럼 강직한 발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래가 아주 엄숙하고 숙연해 진 것입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우리 교회는 18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보은이 한 개인의 인격이라면 보훈은 한 국가의 품격이죠. 우리 교회는 적어도 보은을 넘어 보훈의 정신을 함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니 18년 동안 이어온 보훈행사의 스토리를 만들어낸 교회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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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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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18년째 이어온 보은행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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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
-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가인이라는 말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최초의 여인일 뿐 아니라 최초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새 아이가 탄생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더군다나 자기의 실수로 인하여 아담과 자기의 영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게 되었고, 에덴 낙원까지 잃게 되어 소망 없이 살았었는데 아들을 낳았느니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낙원을 가인으로 말미암아 회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는 많이 공부를 못했기에 아들 대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시켜 대리만족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정 이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넘어지면 다칠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온갖 정성을 다 쏟았을 것입니다. 행여 풀 밭에 가면 뱀이 나타나 그를 유혹할까 봐 보는 즉시 잡아 죽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들의 기대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기만 살아서 한마디 충고도 듣지 못했으며, 자신의 뜻대로 무슨 일이 되지 않으면 성질을 내며 갈수록 난폭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제는 기쁨보다 가인에 대한 트라우마같은 것이 생겨서 자녀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벨’ 곧 허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와 소망을 가지면 실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소망을 갖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으며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십니다(시105:16). 돈을 의뢰하면 돈이 궁핍하게 됩니다. 자식을 의뢰하면 자식이 기대에 어긋나게 됩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자신의 지혜에 속게 됩니다. 이처럼 창조주 외에 그 어느 것도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며 주님을 의뢰하는 생활이 아니면 모두 빈 껍데기이며 허무한 것뿐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자녀라도 성격이 다르고 소질도 다릅니다. 가인은 농사를 잘하여 농사짓는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을 잘 쳐서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은사는 가인과 아벨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은사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속죄하는 제사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는 아벨의 양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인이 농사한 밀, 보리, 수수, 조, 참깨, 들깨 등과 같은 곡식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동생이었기에 필요하면 가인에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인은 속죄를 위한 양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최고로 알았기 때문에 아벨의 것을 애써 부인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도 동생 아벨의 동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가 기른 곡식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드릴 때조차 자신의 곡식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히9:22). 오늘날 신앙인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점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입니다. 내가 형제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형제보다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겸손하게 형제를 찾아 자문을 구하거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자리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시133).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사랑도 기꺼히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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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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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내 입장보다 상대방 입장이 더 먼저죠”
- 저는 지난주에 필리핀 선교 50주년 희년성회 강사로 다녀왔습니다. 필리핀 선교 50년째를 맞아 열린 주빌리 성회였습니다. 몇 달 전부터 필리핀 선교사 회장되신 이영석 선교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주강사로 섬겨달라는 것입니다. 말이 주강사지 거기에 걸맞은 후원금을 담당해야 하는 부담스런 자리입니다. 처음엔 주저주저했는데, 제 신학교 입학 동기인 임종웅 선교사님이 또 찾아와서 통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바빴던지 사실 그 집회를 위해서 설교 준비할 시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본 틀만 정해놓고 비행기나 차로 이동 중에 세세하게 원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비행기여서 새벽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일찍 잔다고 했지만 시간에 맞게 깨어나야 되는데 새벽 2시 이전에 깨버리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시간에 설교 준비를 하고 또 특강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집회장소가 마닐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클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클락은 마닐라에서 2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사님들에게 “저는 차로 이동하는 중간에 좀 누워야 됩니다. 그러니까 옆자리로 누워갈 수 있는 차를 좀 준비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중에 좀 쉬겠다 싶었는데, 차에 타고 가는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누울 공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닐라에 들려서 또 점심식사를 하고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기내식을 했거든요. 그래서 “제발 밥 먹지 말고 저 좀 쉬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교사님들이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대접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니 선교사님들 입장보다 제 입장이 더 중요한 거지, 그게 겉치레이고 불필요한 예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이미 예약을 해서 돈을 물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돈 내가 물어줄 테니까 그냥 가자”고 얘기까지 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지금 주강사 입장이 중요하지 밥이 중요합니까? 그런데 또 일행 중에서 “기왕 준비했으니까 밥 먹고 가시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에 약한 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밥을 먹으러 가야 했습니다. 순간 진짜 짜증이 났습니다. “몸은 피곤한데 밥 먹는 게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 강제로 식당에 가서 1시간 반이나 허비하고, 다시 2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아찔한 것입니다. 저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습니다. 물론 차로 이동하는 시간은 유익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얘기, 총회와 교계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유익했습니다. 그러나 가면서 눕지 못하고, 펴지지도 않는 의자에 앉아서 두 시간 반을 간다는 게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습니다. 두 시간 반이 4시간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곧바로 가서 저녁식사하고 양치하고 바로 집회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를 하기 전에 개회예배와 특강 시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친구이자, 이 시대에 한 동역자인 고광석 목사님이 개회설교를 하시고, 그 유명하신 손현보 목사님께서 전도 특강을 하시는데, 피곤하다고 저 혼자 누워 있다가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또 두 시간 이상을 앉아있다가 그 다음에 이어서 제가 저녁 메인 집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정말로 까무러칠 것 같았습니다. 머리는 띵하고 눈은 쓰리고 어깨는 무겁고요. 그래서 저에게 주어진 시간보다 짧게 끝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지방에서 온 선교사님들도 다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올라왔을 거 아닙니까? 선교사님들도 다들 피곤한 기색이 보이고 저도 피곤했구요. 집회가 끝나고도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정말 설교를 잘할 수 있었는데 오늘 점심 때문에 버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차에서 이동하는 도중에 누워서 가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왜 그랬습니까? 제가 어떻게 온 줄 아세요? 주일 날 예배를 여섯 번이나 인도하고 쪽잠 자고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이런 사람에게 맞춰서 해줘야지 주최측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되나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그분들 입장에서 보면 강사로 오시는 분을 잘 대접해야 되겠죠. 그러나 정말 저에게 필요한 것은 ‘쉼’이었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기내식을 이미 해서 밥도 먹을 필요가 없는데 끝까지 자기들의 입장과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정말 내 입장보다 중요한 게 상대방 입장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목사의 입장보다 교인의 입장을 먼저 배려해 줘야 되겠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내 입장보다는 그분들의 입장을 존중해 줘야 되겠구나.” 참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날 그런대로 잘 자서, 다음날 특강과 저녁집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마는. 어쨌든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내 입장보다 상대방 입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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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내 입장보다 상대방 입장이 더 먼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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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값진 인생’(엡 5:15-16)
- 사람은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그 시간은 시 90:10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칠십 혹은 강건하면 팔십의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천년만 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실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생의 시간이란 한정적이고 짧습니다. 이처럼 짧은 인생의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니 이 귀한 시간들을 우리의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시간은 생명이며 보화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고, 이만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를 지혜롭게 생각하여 주어진 시간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15-16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시간을 낭비하고 헛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게으름 역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데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획 있게 쓰지 않으면 분명 후회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시간을 사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삶에서 우선순위가 세워지지 않으면 삶을 닥치는 대로 살게 됩니다. 시간을 관리하지 않으면 시간에 떠밀려서 살게 되며, 시간을 헛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시간을 써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도록,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를 지으셨는데(사 43:7, 21), 우리가 ‘하루의 얼마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시간은 우리의 인생을 반드시 바뀌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주시고 새 옷을 입혀주실 뿐 아니라 은혜가 채워지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산다고 똑 같은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유익한 것입니다. 내 멋대로 산 시간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서 늘 그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은 본래 뜻은 “시간을 사다”입니다. 시간을 산다면 얼마나 아끼며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신속히 날아가는 인생의 세월을 아끼지 않으면 그 값진 시간이 그냥 흘러가 버리고 의미 없이 허비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합니다. 잃은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지나버린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점이 모여 선이 되듯이 하루하루가 모여 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입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 받는 것도 바로 지금입니다(고후 6:2). 매 순간의 삶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생명 같은 시간이 낭비되어는 안 됩니다. 인생이 너무 나 짧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입니다. 현재를 일어버린 사람은 미래도 다 잃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시간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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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값진 인생’(엡 5: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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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쉽지만, 보람이 가득한 한 주
- 지난주에는 우리 교단 목사장로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목사장로기도회를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총회 스케줄을 모르고 목회팀에서 교회 내부 일정을 잡아 뒀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일정이면 변경을 해서 목사장로기도회로 가야 되겠지만, 1교구에서부터 28교구 모든 생명순장을 미팅하는 일정이어서 제가 어떻게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오전 일정을 월요일 오전 일정으로 당겨서 개회예배라도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이종민 목사님이 개회예배는 2시에 있다고 해서 개회예배만 참석하고 계속 일정을 감당하기 위해서 2시 전에 갔습니다. 그런데 웬 걸요? 사람들이 몇 명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봤더니, 개회예배가 3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회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증경총회장님들과 몇 분들만 인사를 하고 왔습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총 9번에 걸쳐서 적게는 90여 명, 많게는 140~150여 명의 순장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찬양으로 함께 마음을 모은 후에 제가 간단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받아놓은 질문지를 보며 즉문즉답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합니다. 즉흥적으로 답을 하는 지혜,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잘해 주는 진솔하고 솔직한 시간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아, 우리 목사님, 철인이고 강한 줄만 알았는데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우리 목사님도 외로움을 타고 우울함도 겪고 고독감을 겪는 분이구나. 그리고 한없이 나약한 분이구나. 오히려 그런 약한 자를 하나님이 들어 쓰시고 약할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 붙잡고 사시는 것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아직까지 한 번도 큰 실수나 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그리고 추첨권을 뽑아 일일이 사진을 찍고 이름을 부르며 악수를 하고 그들을 위해서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멀리서만 보던 담임목사님을 가까이서 보니까 너무 다정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모든 게 부족함이 없고 만족한 줄 알았는데 목사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연약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으며 목사님과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을 때 울컥하는 느낌을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뭣 모르고 시작을 했지만 중간쯤 되니까 정말 피곤했습니다. 특히 목요일쯤 와서 세 타임을 연속하려다 보니까 피곤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1천 명이 넘는 분들과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며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새에덴의 순장들은 살아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살아있는 영을 소유하고 살리는 영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새순이 나르샤’ 그 이름 자체였습니다. 목요일에는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마지막 금요일까지 다 마쳤습니다. 저는 이렇게 목회를 내실 있게 하는 한 주간이었지만 총회를 생각하면 참 죄송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중간에 어느 기사를 보니까 2천여 명이 모여서 기도회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은 더 많이 모여야 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자리가 훤히 비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와 우리 교회 부목사와 장로님들과 함께 늦게라도 자리를 채워야 했는데 실무진들이 정해 놓은 목회 일정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다음 주로 미룰 수 있었지만 다음 주는 또 필리핀 출국을 해야 하고, 그 다음 주는 또 미국 참전용사 초청행사건으로 준비해야 될 일들이 많아서 딱 이번 주간밖에 없었다고 하니, 저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총회를 생각하면 송구한 마음이 더 들었지만, 개교회적으로는 내실있는 목회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하는 시간을 순장들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심지어 저와 함께 사진을 찍을 땐,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톱스타 연예인도 아닌데 말이죠. 아무튼 아쉬움과 보람이 가득한 한 주였습니다. 이 모임을 끝까지 잘 마치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평개원 간사와 목회팀장들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 (오직 하나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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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아쉽지만, 보람이 가득한 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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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불법의 합법화 시대 앞에 선 교회’
- “희안하네, 내 주변에는 온통 빨간색인데 왜 꼭 선거만 하면 파란색이 이기는 거지?”라는 탄식 섞인 말을 지인들에게 듣곤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이 땅의 보수가 자기 매너리즘의 폐쇠적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임을 알기에 장탄식 할 뿐이다. 반면 진보세력들은 부수고 싸워야 할 대상들로 차고 넘쳐서, 불법이나 탈법, 편법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이겨먹고야 만다. 이런데도 보수의 무감각한 무기력은 우물안 개구리들의 만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들의 우물이 메워지고 있고, 곧 그 우물에서조차 쫒겨날 것이 분명하고, 일부는 이미 쫒겨나서 생존을 위한 사이비 보수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덕주의자를 흉내내며 무기력과 무능력을 감추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쓴「군주론」은 국가통치와 권력유지에 관하여 실용적인 조언을 하는 군주제 국가의 통치지침서이다. 이탈리아의 분열과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군주의 자질과 행동 방침을 말한다. 이 내용 중 권력유지를 위한 권력자의 잔인함과 비도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비윤리적인 부분이 있다. “사자처럼 두려움을 주어야 하며, 여우처럼 교활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권력유지를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 곧 인권, 자유, 책임, 양심과 같은 것들을 중요한 정치적 리더십으로 여기는 현대 정치에는 부합하지 않는 위험한 사상들이다. 그런데 야당은 지금 이 조언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다. 그런데 민주주의 가치 존속을 부르짖는 여당은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투쟁조차 포기한 듯하다. 정치적 도덕성을 앞세워 야당의 영역으로 돌진할 힘이 없는 무기력한 말잔치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야당은 명분이고 뭐고 상관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당의 영역을 넘나들며 상대를 초토화시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대법원의 법률심만 남겨놓은 사람이 지휘하는 정당이 제3당이 되었다. 그 당을 통해 이미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들이 당당히 국회로 입성했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전과를 가진 사람이 일주일에 몇 번씩 법정을 드나들면서도 지휘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제1당이 되었다. 야당 당선자 중에는 윤리적 역사적 학문적으로 문제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몰표를 준 국민들의 의중을 여당은 전혀 읽지 못한 듯 하다. 아니 읽을 능력도 읽을 의지도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온통 같은 색으로 만들어진 우물속에서 나올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야당 인사들은 자신들의 파란 우물에서 나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붉은 우물을 매우고 있는데, 여당은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여당은 무기력하고, 대통령은 정치적 경험 미숙으로 대통령의 언행에 적합하지 않는 수사로 연속하여 실언과 패착으로 지지도의 하락을 스스로 견인하고 있다. 반면 야당은 자신들의 법적 문제들과 비윤리성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정치적 수사와 팬덤들을 동원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들의 모든 약점을 일거에 덮어버리고, 여당의 작은 허물도 특검으로 몰아간다. 여기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여당의 전투력은 보이지 않는다. 불행이다. 최근 모 유명 가수가 음주운전 사건에서 보여준 비윤리적 처신이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팬덤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지층에만 기대면 살아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큰 세력을 모을 수 있다는 그릇된 인식과 처신이 불량 정치인의 복사판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은 건전한 국민들의 의식 변화에 있다. 또 국민들의 도덕적 가치를 고양하고, 영웅적 신앙윤리의 실천을 보여줄 책임이 교회에 있다면 과도하다할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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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불법의 합법화 시대 앞에 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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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경기도 교육청, 학생인권조례 답습 말아야
- 경기도 교육청(교육감 임태희)이 지난 3일 ‘경기도교육청학교구성원의권리와 책임에관한조례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경기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 지난 2010년부터 시행해 왔다. 당시 좌파 교육감 김상곤 씨에 의하여 만들어지므로, 전국의 여러 지자체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인권을 증진시키자는 취지로 시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교권의 추락과, 면학 분위기를 망치는 것과, ‘동성애’ ‘임신 출산’ 등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으로 인하여 상당히 부작용이 있었던 ‘조례’였다. 이런 상황들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시민단체, 학부모 단체, 종교단체 등이 반대 운동을 편 결과, 충남과 서울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런 부작용을 알게 된 경기도 교육청에서도 새로운 ‘조례안’을 내놓고, 입법예고를 하고 있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학생인권조례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못하는 모양새이다. 이에 대하여 임태희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편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조례를 만들어 학교 구성원들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것을 선언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전문가들이 살펴보니, 여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드러나고 있다. 이를테면 제7조 제4항에 보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고 있는데, 그 차별받지 않을 것에 대한 명확한 내용이 없다. 그렇다면 전에 있던 학생인권조례에서 말하는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언어, 장애, 용모와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및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성적 등을 말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여전히 동성애, 임신 출산, 사상 등 여러 가지 독소 조항이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제16조 제1항에 보면, 상담과 구제를 위하여 ‘학생생활인성담당관’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전에 있던, ‘학생인권옹호관’과 같은 맥락의 권력자(?)가 아닌지, 그 성격 규정이 명확하지가 않다. 그리고 그런 담당관을 어떤 기준과 인물로 뽑느냐도 중요하다. 이 ‘학생생활인성담당관’은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는데, 제16조 제6항에 보면, 시정 권고를 받은 경기도 교육청, 교육 지원청, 직속 기관, 학교, 학생 및 교직원은 시정 권고를 이행하고, 조치 결과를 담당관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뿐만이 아니다. 제17조에 보면, ‘학생생활인성담당관’은 직무 수행을 위해 관내 각 기관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고, 관계 공무원에게 질의할 수 있고, 현장 방문 조사와 직권 조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한다. 그러나 ‘지방공무원법’에 의하여 선발되는 지방공무원이 ‘국가공무원’인 교원들에게 다양한 권리 행사를 하는 것이 국가 사무에 관한 체계에도 맞느냐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 헌법 제31조 제4항에서는 교육의 자주성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같은 조항 제6항에서는 학교 교육의 제도와 운영에 관한 것 등은 법률로 정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교육기본법 제5조 제1항과 제3항에서는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는 교육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존중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교육에 관한 것은 외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교육자나 교육 전문가들에 맡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자꾸 무슨 ‘조례’를 만들고, 무슨 제한과 과잉된 내용을 만들어서 학교 교육과 운영을 간섭하려는 것인지? 이런 것들은 극히 자제해야 한다. 따라서 경기도 교육청은 학생인권조례 형식을 계속 답습하지 말고, 아예 어떤 조례도 만들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각 학교에는 자주적으로 ‘교칙’과 ‘학칙’이 있을 것이다. 국가나 교육청은 각 학교에 대하여 자주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헌법’과 ‘교육기본법’을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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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경기도 교육청, 학생인권조례 답습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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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붙드심’
-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3,24) 20년도 넘는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A 자매에게 이웃집에 사는 분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일 년 안에 돌려받겠다는 조건으로 천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은행 이자보다 싼 이자였습니다. 자신도 힘들지만 평소 싹싹하고 친절한 사람이기에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은 몇 달 동안은 꼭꼭 이자를 보내주더니 어느 날 밤 이사 간다는 말도 없이 그 지역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사한 지역을 찾아보았지만 주민등록마저 말소됐는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신뢰했던 사람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A자매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습니다. 침대에서 분을 삭이고 있는데 문득 내면에서 “돈을 뜯긴 너 보다 못 갚고 달아난 그가 더 불쌍하지 않느냐?”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불쌍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이웃이야, 나는 빌려줄 돈이라도 있었지만 그는 갚을 돈마저 없었던 사람이지. 하나님, 그 분의 형편이 풀리게 하시고 영육 간에 은혜를 내려주세요.'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후에 그 돈에 대하여 빌려 간 사람이 직접 들고 찾아오면 받을지언정 자신이 애써 수소문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 작정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어찌나 가볍고 기뻤는지 '성령의 위로가 바로 이런 것이 구나.'라고 그 자매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다 5 년도 넘게 지난 어느 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전철 안 맞은편에서 수심 깊은 표정으로 옆 사람과 대화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A 자매의 돈을 빌려갔던 이웃이었습니다. 정면이 아니었기에 그 쪽에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보통 마음으로는 그녀 앞에 가서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 끌어내리고 싶었을 텐데, 자신도 의심하리만큼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녀 눈길을 피해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했는데도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A 자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야무지고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인데, 그런 마음 가지고는 결코 그냥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그녀를 보는 순간 왜 그렇게 편안한지 왜 그렇게 불쌍하게만 느껴졌는지. 나 아닌 전혀 다른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은혜란 바로 주님이 붙잡아 주시는 새 마음 같아요.” 그렇습니다. 은혜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힘이 아니라 전혀 다른 능력으로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구원 받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조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어떤 죄를 지을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이 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능 만점을 받았었던 의대생이 여친의 이별 통보에 격분하여 여친을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시지 않는다면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하나님께서 막아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다 살인, 간음, 도둑, 사기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죄 짓는 일을 막아주실까요?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 거듭난 자라도 죄를 짓는 것을 우리는 목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잘 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말씀 ‘하나님께로 난 자’는 영이지 육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일지라도 영을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육신을 따라 살아간다면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붙드심을 체험하려면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죄를 짓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A 자매가 체험했던 것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상대에게 복을 빌어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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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붙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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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신학이 과학에 의하여 흔들려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에 의하여 부정되는가? 신학과 과학은 상호 충돌하는 부정적 관계인가? 소위 진화론으로 모든 과학을 대변할 수 있는가? 진화론이 성경을 모두 증명할 수 있는가? 특수성을 가진 신학대학에서 학문의 자유라는 빌미로 진화론을 가르칠 수 있는가? 이런 명제들이 떠오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인 특별 계시와, 자연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 계시(일반계시)를 주셨다. 과학은 관찰과 시험을 통해서 얻어낸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과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럼 과학은 성경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천체에 대하여 먼저 ‘천동설’을 믿었다. 천동설(天動說) 또는 지구중심설(地球中心說, geocentrism)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을 태양과 달 및 행성이 돈다는 설이다. 이는 BC 140년경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등이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바뀌게 된다. 1515년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이 ‘지동설’을 주장하고, 케플러나 뉴턴 등에 의하여 지동설이 보급되면서 이를 따르게 된다. 이는 태양을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간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태양이 우주 중심에 있다’는 명제로 세워진 지동설도 ‘빅뱅이론’ 등이 나오면서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고 하는 증명들이 나오게 되면서 이 또한 완전한 주장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이렇듯 과학의 영역에서 얻어낸 정보나 데이터라 할지라도 원리와 법칙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즉 과학조차도 가변적이며 절대적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완성되어 가는 영원한 근사(近似)라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찰스 다윈에 의하여 만들어진 ‘진화론’은 엄밀히 말해서 과학도 아니면서, 사람들을 ‘과학주의 상상’에 갇히게 만들었다. 진화론(進化論)은 생물의 다양성이나 적응성이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변화되거나 전개되어 온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는데, 이것이 자연과학이나 심지어 인문과학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실험과 검증, 이를 실증하는 역사적 증거들이 제대로 없는 가운데, 이미 정해진 추론(追論)과 상상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진화론의 모습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진화론에다 기독교의 창조를 연계시킨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이 대두(擡頭)되고 있다. 이는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에 자연계의 생명체에게 진화 능력을 부여해서 (나중에) 현재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이는 창조와 진화가 충돌하지 않도록 ‘가치중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진화도 창조도 아닌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이야 그 자체로 원체 과학이 아니면서도,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과학의 틀’에 가둬버린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진화 능력을 주셨다가 다양한 생명체가 후에 생긴 것으로 결코 말씀하지 않는다. 단호하고 명백하게 각 생명체가 창조되는 것이지, 중간 단계가 있거나, 나중에 진화로 생명체가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신진화론’ ‘진화적유신론’ ‘진화적창조론’이라는 것이 결국은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와 과학의 충돌을 피하고, 진화의 사실을 인정하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성경에서의 창조를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 교과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과학이 모든 성경을 설명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하나님’ ‘천국’ ‘구원’을 과학이 증명할 수 있는가? 또 지금까지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한 것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모두 증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모 신학대학에서 어느 교수가 ‘유신진화론’을 가르쳤다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성경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성경은 분명한 것을 말씀하고 있고, 과학은 증명되지 못한 것을 시험을 통해 점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진화로 창조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전6:12)고 한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학문적 자유와 지적 호기심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자신이 믿는 바 신앙의 입장에서 주님의 교회와 교단과 신학교와 성직 후보자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 얽매이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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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신학이 과학에 의하여 흔들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