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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재)어머니 가슴. 2
- 어머니 가슴. 2 오 청달님처럼 둥근 얼굴뽀얀 살갗 사이로 내밀던 그 고운 가슴은기저귀 같은 수건에 가리우고열 남매 위해 고난의 밭에서만 살았다하늘이 노랗게, 땅이 시꺼멓게 변해도흉년에는 가슴 열어 제치고보릿고개에는 숙인 고개를 다시 들고바람을 맞았다때로는 소나무 찾아 수십 리 길흐르는 계곡의 물 퍼 마시며손가락 마디마디 송구 꽃 붉으스레 물들고가루 몇 말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시장 변두리 노점상에서호루라기 소리에 가슴 저미며천둥 소리도 잊어버리고소나기도 제대로 피하지 못하시고쭈그러지기만 했던 어머니 가슴마음에 영원히 남아때 늦은 후회스러움이하늘에 가득 차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성령님은 이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위 시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화자의 어머니는 보릿고개의 가난을 “가루 몇 말로 배를 채우”며 이겨냈습니다. 시장 변두리에서 노점상을 하면서 단속반원에 쫓기면서도 꿋꿋하게 자식들을 키워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이겨내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성령님이 동행하심으로 화자의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화자에게 가문의 전통으로 자리잡습니다. 참으로 한민족은 고난의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누린 것처럼,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연단시키시고 큰 비전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빛나고 뾰족한 화살로 연단시키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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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재)어머니 가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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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아픔
- 네팔의 아픔은 지진과 함께 시작하였다. 필리핀에서 사역하던 중에 지진을 경험한 필자는 7.8에 이르는 강도 높은 지진 소식을 듣고 친구인 네팔선교사인 미국인 세섬스 가족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다행히 세섬스 가족이 사역한 곳은 많은 수도인 카투만두에 비해서 피해가 약하고 주변의 몇 건물과 몇 사람의 인명 피해만 있었지 자신들은 안전 하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순간 감사와 함께 네팔이 안정되기를 기도했다. 네팔은 비교적 작은 국가이나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펼쳐져 있는 습지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경계에 있는 히말라야 등 고산지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곳이 많다. 국경 지대에는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8000m 급의 높은 봉우리를 포함한 히말라야가 존재한다. 따라서 고산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인도와의 국경 지역은 “타라이” “테라이” 또는 “마데스”라고 하는 고온다습한 평원 지대가 있다.네팔의 면적은 14만 7,181㎢이고, 인구는 약 3,098만 6,975명(2014년 현재)이다. 수도는 카트만두이다. 히말라야 산맥 남쪽 비탈면에 있다. 주민은 몽골 계와 인도 아리아 계가 많다. 대부분 힌두교·불교·이슬람 교를 믿는다. 쌀·옥수수·밀 따위가 나고, 목축업이 성하다. 히말라야 등반의 근거지로서 관광 산업도 활발하다.가난하지만 항상 평온을 유지하던 땅인 네팔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수자가 8,000여명에 육박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어쩌면 참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그러나 그곳을 취재하고 있는 한국인 기자들의 리포트에 의하면 “기다려달라” 한마디에 몰려든 주민들 질서를 지킬 뿐만 아니라, 거리엔 무장강도 같은 폭도는 없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세계 각국에서 온 봉사자들은 “이정도로 선할 줄은” 몰랐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한다. 그동안 네팔 정부가 손을 놓다시피한 카트만두 외곽 시골마을에도 하나둘 구호품이 전달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일 세계적인 기독교 구호단체인 ‘기아대책’은 이번 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신두팔촉(Shindupalchowk)의 바레가웅 마을을 찾아 주민 750여명에게 쌀과 천막 등을 지원했다. 마을 사람들은 식량과 천막을 실은 트럭에 앞다퉈 몰려들다가도, “물품은 충분하니 기다려라” 한마디에 다시 물러섰다. 산 정상에 있는 이 마을 주민들은 5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15년째 네팔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광진(45) 기아대책 봉사단원은 “네팔 사람들이 순박하긴 하지만, 이처럼 약탈이나 폭력 행위가 없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마을 누구도 도덕 교육을 받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는 마을 안에 한 명도 없다.조선일보 기자의 리포트는 그곳 소식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네팔 청년들은 취재진과 구호단체의 가이드를 자청했다. 기자의 취재를 돕느라 며칠간 동행한 네팔 청년 아윱씨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그의 지인에게 물었더니, “이번 지진으로 벽에 금이 간 집을 고치러 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너진 자신의 집을 돌보다 말고, 자국의 상황을 외신(外信)에 알리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는 “늦게까지 돌아다녀서 미안하다”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It’s my duty(이건 나의 의무다).” 지진 발생 열흘째인 4일 밤, 카트만두 남쪽 바이시파티(Bhaisepati) 지역의 한 사거리에선 촛불이 타올랐다. 행인들은 초에 불을 붙이고 10분 정도 묵묵히 땅을 내려보다 각자의 갈 길로 갔다. 절망에서 추모로 분위기가 변하고 있지만, ‘선한 네팔인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도 카트만두를 벗어나면 아직 구호는커녕 시신 수습도 이뤄지지 않은 지역이 많고, 네팔이 자랑하는 주요 관광유산이 무너져 경제 역시 10년 이상 후퇴했다. 지난해 네팔의 1인당 GDP는 699달러로 한국의 40분의 1에 불과하다. 기적의 생환(生還)도 이어졌다. AFP는 지진 발생 8일째인 2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북서쪽으로 80㎞ 떨어진 누와콧 지역에서 올해 101세인 푼추 타망씨가 구조됐다고 3일 밝혔다. 구조대는 무너진 타망씨의 자택 잔해 속에서 경미한 부상만 입은 채 갇혀 있던 타망씨를 발견, 헬리콥터로 인근 병원에 이송했다고 한다. 네팔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해 본다. 특히 유학시절 함께 공부하여 지금은 현지 교회 지도자가 된 푸라카쉬 쉬바와 친구이며 동료선교사인 허인석, 강대권 가족도 평안하기를 기도하면서 글을 마친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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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단의 ‘자살론’ (비아타나토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오늘날 “자살”을 의미하는 단어로는 “suicide”가 대표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suicide”라는 어휘가 영국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전에는 “self-murder” 나 “self-killing” 과 같은, 직접적으로 “살인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기독교사회가 “자살”을 “살인행위”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Self-killing”이나 “self-murder” 대신 “self-homicide”라는 단어를 등장시킨 것은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는 시인 존 단이 최초의 <자살론>이라 평가받고 있는 <비아타나토스, (biathanatos), 1647>를 출판하면서였다. 영미법사전에서는 “murder”가 유죄한 살인이라면, “homicide”는 정통적(正統的)이거나 우연한 살인에 해당되는 자살을 일컬을 때 쓰인 용어. 그러니까 “homicide”는 “killing“이나 ”murder“와 같이 직접적인 범죄성을 인정하는 표현은 아니게 되는 셈이다. 이를 이어서 “suicide”를 처음 문헌으로 등장하게 한 것은 1651년, <자살옹호론>을 저술한 월터 찰톤(Walter Charleton)이었다. 그는 의사이면서 철학자 그리고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는 존 단이 창안한 “self-homicide”에 이어서 “suicide”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라틴어에는 “suicide” 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그런데 존 단이 법률가에 시인 그리고 성직자였다는 사실과 월터 찰톤의 이력에서 뭔가 연결 고리가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교회가 자살한 오필리아의 장례를 거부하는 장면이 있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자살은 대체로 두 유형으로 나누어 판단했던 것 같다. 순교와 인간적인 이유의 자살. 전자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겠으나, 인간적인 이유에서의 자살은 사악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스스로 삶을 거부하는 행위에는 교회법뿐 아니라 세속법도 지극히 엄격했다. 교회 묘지에 매장될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이 끊어진 시체에 가해지는 끔찍한 형벌은 퇴마의식과 동일한 통주저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르주 미누아의 <자살의 역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검으로 자신을 찔러 죽은 자는 머리통에 나무토막을 박았다. 물속에 뛰어들어 자살한 자는 물에서 5피트 떨어진 모래밭에 묻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죽은 자는 시신의 머리와 배와 발에 돌을 달아 산 밑에 매장했다...독일의 일부 지역에서는 시체를 말에 끌고 다니다가 묶은 채로 목을 매달아 두었다. 대체로 시신은 뒤집힌 자세로 끌려 다니다가 거꾸로 교수대에 매달렸다. 영국에서는 자살자를 내왕이 많은 네거리 밑에 매장했다. 시신을 엎어 놓고 등에 말뚝을 박아 가슴으로 튀어나온 말뚝이 땅속에 단단히 박히도록 했다....유가족에게도 조처가 내려지는데, 가문 전체에 수치가 되는 이 구경거리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을 뿐 아니라, 재산몰수라는 이중의 형벌을 받았다. 자살을 억제하기 위한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르네상스 시기에는 자살이 일기, 문학, 비망록 등에서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는 주제가 된다. 16세기 후반 피에르 드 레스투알의 일기가 당대의 자살 사례를 상세히 소개했고, 고대 영웅들의 자발적 죽음을 칭송하는 문학작품이 불어나면서, 자살론은 점차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된다. 루크레티우스, 카토, 브루투스, 세네카 등, 존경할 만한 인물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왜 자살을 하는가?”를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럼에도 자살이 죄라는 의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살처벌법은 여전히 확고했고 퇴마의식과 연결된 유가족의 어려움은 가혹하기만 했다. 영국은 “자살대국”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자살은 피하라. 실패하면 범죄자, 성공하면 미치광이(lunatic).”라는 속담이 있을 지경이었다. 그만큼 영국에서는 자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7세기의 신학자 존 심(John Sym)은 “면책 받을 수 있는 자살(exempt cases)”이 있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1) 이해력과 이성이 결여된 자. (2)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지 못할 경우. (3) 합법적 행위로 인해 불운한 죽음을 맞는 경우. (4) 삼손처럼 하나님의 명에 의한 경우. (5) 야수적인 정념이나 무분별한 충동에 사로잡혔을 경우를 들고 있다. 이 모든 시도들은 모두 존 단의 <비아타나토스>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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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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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단의 ‘자살론’ (비아타나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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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왜 시들할까?
-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년이 지난 한국 교회는 ‘한강의 기적’ 못지않은 기적적인 성장으로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허나 문제는 외적인 성장에 비해 내적인 성장은 미약 하다는데 있다.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쇠퇴해 간다고 사람들은 우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생활이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과학이 크게 발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드문 탓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일면 타당한 점도 있다. 이에 교회들이 교회 갱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교회도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여러 정보들을 수집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 한다. 물론 이런 노력들은 교회를 살찌우고 교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점점 쇠퇴해 가고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먼저 목회자들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사람의 몸이 전체적으로 건강하려면 먼저 머리가 건강해야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환경 속에 있어도 머리에 질병이 있고 근심과 스트레스로 고통 받으면 이내 그 몸은 병들고 만다. 반면 마음이 기쁘고 생각이 건전하면 질병도 쉽게 치유되고 건강도 증진 된다. 마치 기관차가 올바로 가려면 먼저 기관차가 힘차게 끌며 올바른 길을 가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의 위기를 곧 자신들의 책임을 일깨우는 말로 받아들여 먼저 스스로 회개해야한다. 즉 지금까지의 윤리, 도덕적인 죄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고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못한 세속적인 삶을 회개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필자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회개 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징계를 하실 것이다. 다음으로 목회자들이 회개의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단마다 설교는 선포되고 전도는 행해지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일은 아주 희귀한 일이 되었다. 마치 성령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수명을 다한듯한 느낌마져 든다. 성령의 능력은 사라지고 복음은 구시대의 유물과 같이 느껴지고 있다. 원인이 무엇일까? 바로 목회자가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며 인간의 말을 전하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의지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또 복음 아닌 인간의 말, 축복의 말, 윤리 도덕 같은 것만을 전하는지 모른다. 이래서는 어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의 권능에 의지한 바른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한 교회의 쇠퇴는 불 보듯 명확한 일이다. 오늘도 초대 교회 때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려면 목회자들이 인간의 말이 아닌 복음만을 전해야한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야한다. 즉 거짓말 하지 말고 진실해야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이 성도들과 동고동락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정치적, 사회적인 강도, 사단이라는 가장 무서운 강도를 만나 헐벗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고통 당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지도자로 자처하는 목회자들은 많아도 이들을 돌보려는 목회자들이 적고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나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돌보려는 목회자들이 적은 것 같다. 주님은 목회자들을 향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명하신다. 목회자들은 지금 가까이 있는 가난한자와 고통 받은 자들을 돕고 함께 동고동락 해야 한다. 톨스토이가 그의 인생론에서 말했듯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며 또 가장 중요한 사람도 바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내 손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교훈하였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이와 반대로 살아가기 일쑤다. 곧 악한 일은 지금 당장 하려 하면서도 선한 일은 뒤로 미룬다. 결국 때를 놓치고 두고두고 후회 한다. 목회자들은 지혜를 가져야한다. 그리고 짧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길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받은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한다. 미국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V.W.Peters가 조선에 와 선교 할 때 ‘조선 사람들을 잘 지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부터 조선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농민 속에 뛰어들어 함께 기거하며 양복을 벗어버리고 한복에 버선과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또한 우리말을 잘했고 무엇보다 조선 사람이 되려면 조선인과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며 조선 여자 한용복과 결혼하여 세간에 화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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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왜 시들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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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재)영혼의 주름
- 영혼의 주름 김 형 애가랑비 받아영혼의 주름에 뿌린다.뜨거운 햇살 받아젖은 영혼의 주름을 편다.푸르름 찾아주름 없는 영혼은높이 높이 날아 오른다. 요한복음 10장 1-6절에는 양의 우리 비유가 나온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가 자기 양들을 우리에서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요 10:1-2). 양들이 자신의 주인인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의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 길에는 진리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우리 영혼도 마찬가지다. 화자는 주름이 있는 영혼에 “가랑비”와 “뜨거운 햇살을 받아” 주름을 펴려고 한다. “가랑비”와 “뜨거운 햇살”은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축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의의 길이며, 구원받는 행동이다.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 표적을 이루셨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하인들의 행동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요 2: 7). “아귀”는 항아리의 끝에 뚜껑을 덮을 수 있게 튀어나온 부분이다. 하인들이 요령을 피웠다라면 그들이 항아리의 7-8부만 채워도 탓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항아리의 크기는 두세 통이 들어갈 정도로 큰 항아리였다. 그러나 하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귀까지 가득 채웠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있었기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표적은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하는 비유가 되기도 한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할 때 의인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보혈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영생으로 나아가는 문이 열릴 것이다.그래서 위 시의 화자는 영혼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주름 없는 순결한 영혼”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자 한다. “푸르름 찾아” “높이 높이 날아 오”르려 한다. 영혼의 축복을 받고자 한다. 오늘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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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재)영혼의 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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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를 위한 종교 연구의 필요성
- 우리는 선교에 열심과 기도를 내고 있다. 이에 반해서 선교를 위한 연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선교를 위한 종교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비교종교에 대해서 살펴보자. 비교종교란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 그 자체의 본질과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구 방법이자 종교현상에 대한 접근 양식이다. 한편 아무리 잘 연구된 비교 종교적 결과물이라도 그 결과가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자신들에 대해 올바르게 서술되었다고 받아드리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자신의 종교적 사고의 틀에서 타종교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종교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각 종교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비교종교학의 중심과제이다. 이는 먼저는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를 들 수 있다. ‘종교혼합주의’란 신학자들에게서는 부정적인 의미와 연관 되어있다. ‘종교혼합주의’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교리와 종교들의 혼합으로서 혼합된 종교를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가 타문화 속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는 상태의 적용을 토착화라고 하며, 기독교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나타나는 것을 종교혼합주의라고 본다. 기독교혼합주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 신적인 존재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인간은 영지적인 방법으로 신적인 빛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순수한 인간으로서 이상적인 인간, 위대한 마술가 혹은 혁명가로서 이 땅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투쟁한 선한 모든 사람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후자의 경우를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모든 종교의 일치”를 위한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계에서 긍정적인 의미의 종교혼합을 찾으려는 시도가 순더마이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두 가지의 개념으로 종교혼합주의를 구분한다. 먼저는 공생적 종교혼합주의이다. 이는 삶의 저변에 깔려있는 전통적인 종교와 이 후에 이차적으로 들어온 종교가 서로 수직적인 관계로 만나는 형태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이중구조를 갖게 되며 전통사회의 사회성과 종교성이 서로 구분된다. 다음은 합성적 혼합주의 이다. 이는 비슷한 종교가 서로 수평적으로 만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태국의 불교는 힌두교와, 신비종교인 뉴 에이지와 종교들의 조화, 통일교 같은 부류이다. 순더마이어는 공생적 혼합주의를 토착화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육체적인 폭력을 동원한 강압선교는 문제점이 있다고 보프는 주장한다. 세 번째는 다른 신앙인들과의 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 대화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존재한다. 먼저는 타종교 포괄주의 이다. 타종교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화를 하여야 한다는 견해. 다음은 타종교 배타주의 이다. 타종교는 근본적으로 사탄의 작품이므로 철저히 이들을 배격하고 대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네 번째는 복음과 비기독교 신앙과의 연속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핸드릭 크래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성경적 계시의 성격을 이해하는 핵심적 열쇠이며, 하나님의 계시 활동의 초점이 그리스도 인격 안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독론 중심의 계시관은 비기독교 신앙과의 연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크래머는 복음은 인간들을 도구로 하여 전달하기 때문에 교리적 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이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사색과 사상, 철학, 견해, 경험의 산물 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에 타종교와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창조적 관계구조를 통한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창조적 관계구조란 세속적인 문화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활동은 제한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선교에 있어서 실제적임 면과 함께 선교의 원리에 따른 이론을 충실하게 닦아 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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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에 대해서
- “마에스트로(Maestro)”하면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가 연상되는 것은 소시 적 바그너의 역사 드라마 ‘누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서 받은 강렬했던 인상 때문일 것이다. LP 재킷을 더듬어가며 다듬어낸 주인공 한스 작스의 모습이 그대로 “마이스터징어”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이리라. 덩달아 “마에스트로”라는 칭호조차도 함부로 쓰기를 주저하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마에스트로”를 흔히 거장(巨匠)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거(巨)”란 예술적으로는 물론 정신적, 인격적으로도, 나아가서는 지성과 경험의 크기까지를 아우르고 있는 말 같아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흔하게 “마에스트로”로 불러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더러 목사님들이 성가대 지휘자를 마에스트로라 불러 주는 것은 자신이 음악을 비롯한 예술 쪽에 관심과 지식이 없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가 배어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현상은 그 범위를 넓혀 국가적 차원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술 방면에서 활발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는 영국의 노만 레브레히트(Norman Lebrecht)는 ‘마에스트로 신화(The Maestro Myth, Great Conduc tors in Pursuit of Power)’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지휘자의 헌신적인 팬이 되어간다. 영국의 수상 마가렛 대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절대주의를 공공연하게 시기했다.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참이었을 즈음에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게 안부편지를 썼고, 그의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연주에 참여하고자 틈을 냈었다. 헬무트 슈미트가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저명한 마에스트로가 서독 땅에 발을 들여 놓을 때 마다 관저의 저녁식탁에 초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교적 음악에 관심이 적은 나라라는 평을 받고 있는 프랑스에서 조차도, 피에르 불레즈의 귀국과 다니엘 바렌보임의 바스티유 취임에 장관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바렌보임의 바스티유 취임은 우리의 정명훈과도 관계가 있는 사건이었다.)” 레브레히트의 익살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선물을 바치려는 욕구에 사로잡히고 있다.’ 하고 말한 것은 번시타인의 친구였다 ”하고 운을 떼면서, 자신의 불만을 쏟아낸다. “영국의 지배층은 작곡가는 무시하면서도 많은 지휘자들에게는 작위를 주는가하면, 카라얀이 이렇다 할 학문에의 공헌을 한 적이 없음에도 옥스퍼드에서 박사로 만들어주었다. 번시타인은 프랑스를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누구나 탐을 내는 ’레존 드누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음악가들 중에서는 가장 외교수완이 모자란다는 로린 마젤은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친선대사의 임명장을 받았다. 리카르토 무티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한 번도 ’난민 캠프프‘라면 울타리를 쳐다본 적도 없는데 ’난민고등판무관‘으로 임명받았다.”사실이지 지휘자가 대중의 영웅이었던 적은 없었다. 소위 마에스트로는 엘리트의 “아이돌”이었을 뿐이다. 축구장이나 야구장 그것도 저가석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팬이나, 지방정부의 복지예산을 축내는 계층의 눈높이에서는 마에스트로란 특권계급일 뿐일 것이다. 물론 토스카니니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고, 영상으로나마 카라얀의 지휘 폼을 보지 못한 이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나 영상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음악적 기교나 영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 참으로 묘한 것은 평등의 깃발을 쳐들고 있는 정치지도자라 할지라도, 아니 그들일수록 그러한 사실에 눈을 돌리려하지 않는 법이다. “뮤즈의 여신” 때문일 것이라고 핑계하는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충 보기에도 여느 때에는 뮤즈 여신의 치맛자락도 쳐다보기 싫어하는 정객들이 그럴듯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날이면 마에스트로 라는 호칭을 입에 달게 되는 것을 보면 필시 뮤즈의 여신 아닌 다른 어떤 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다. 마에스트로들이 권력가들의 힘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은 도처에 널려있다. 한편 권세 잡은 이들이 마에스트로가 뿜어내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화적 마법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노리려 드는 꼼수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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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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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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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사람
- 흠정역 성경의 유래이다. 영국의 왕 제임스(James)는 타고난 술꾼에 말하기도 부끄러운 온갖 악한 습성에 빠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외교적 목적으로 자녀들을 마치 저당물처럼 아무데나 시집, 장가보내는 폭군이었다. 포도주와 여자를 위해서라면 국고를 아까워하지 않는 무절제한 군주이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왕답지 않은 그를 두고 그린(J. R. G. Green)은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커다란 머리에 침을 질질 흘리는 혀, 천박하게 누빈 옷들, 흔들흔들하는 다리, 희번덕거리는 눈동자, 수다스러운 말투에 있어서 그는 헨리 왕이나 엘리자베스 여왕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괴상한 몰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조잡한 익살과 취태 학자인 척하는 태도며 그 경멸스러운 소심함이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611년 이 쓸모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학자들을 모이게 하고 권위 있는 성경을 완성케 하셨으니 그분의 섭리가 참으로 놀랍다. 당시 완성된 성경은 현재까지 권위 있는 성경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는 바로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이다. 그렇다. 누구도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역시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영원히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큰 은혜를 주셨다. 헌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기쁨과 행복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영적 불감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자.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은혜를 베풀어도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위험과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실례로 성경의 발람을 보자. 그는 이방의 주술사였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행하고자 했다.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귀조차도 보는 죽음의 길로 갔다. 나귀는 한사코 비켜 가려고 했다. 아니 가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길로 자신과 나귀를 몰아갔다(민 22:21~23).영적 감각 깨달음이 없을 때 우리는 잡혀 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야 된다. 하지만 연약하고 어리석어 믿음이 약해지거나 의지가 꺾이거나 생각이 거룩하지 못할 때가 많다. 늘 입으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바란다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교만한 마음을 품기 일쑤다.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는 대신 거꾸로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순복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실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과 같아서 이러한 교만한 마음을 지닌 자에게는 절대 임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과 섭리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 하자. 헌데 대부분은 감사에 인색하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특별히 노력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세상에는 도무지 감사할 일이 없는 것 하기도하다. 그래서 불평만 늘어놓는다. 좀 더 좋은 자가용을 갖고 싶어 하고 더 큰집을 갖고 싶어 하며 더 빨리 더 높이 승진 했으면 한다. 나와 내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살고 있는 집이 있으며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이 감사하지 않는가?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로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도록 작용하기도 한다. 일터에서 또한 삶속에서 감사의 언어보다는 불평을 더 자주 내뱉지 않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 우리에게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정리해 보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을 하나하나 적어보자. 얼마나 많은 감사의 조건이 있는가? 삶속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못한다면 내 자신의 마음이 완악해졌음을 깨닫자. 주님처럼 감사하자. 주님은 공생애 중 머리 둘 곳도 없으셨고 대부분의 밤을 차가운 광야에서 기도로 보내셨으며 때로는 식사거리가 없어 무화과 나무을 뒤지셔야 했다. 이렇듯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신뢰를 잃지 않으셨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생선을 놓고도 감사하셨고(마 15:36), 십자가를 앞에 두신 마지막 식사 때에도 감사하셨으며(눅 22:17,19),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조차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셨다(눅 23:46). 한마디로 감사 할 수 없는 조건에서도 감사하고 믿는 절대 감사 절대 신앙 이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염두에 두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감사하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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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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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재)그곳에 가면
- 그곳에 가면 정 신 재그곳에 가면내가 그토록 원하던 금사과를 구할 것이다봄내 향긋한 금사과를 마음의 옷으로 갈아입혀세상을 감쌀 빛을 얻을 것이고시대의 상처를 보듬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바를 것이고적당한 흙과 공기를 넣은 화분에꿈꾸는 영혼의 나무를 키울 것이다거기서 너를 울리는 열매 한 점 얻어추억의 꽹과리를 울리고 싶은 날이면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아힐링 힐링 하며 그 숲으로 안내할 것이고너와 개울가에 다정히 앉아 내장의 고민을 씻어 말리고일상의 권위도 바위에 내려놓을 것이다시냇물 비켜가는 시(詩)로 맛있는 요리를 할 것이고너와의 악연(惡緣)을 연기로 날려 보내고아름다운 시 한 점 맛있게 먹으리시가 있어 행복한 젖을 짜는 너에게맛있는 이야기 쌈을 보태리잘 가라 상큼한 공기가 되어 버린 후각이여이제는 먼 나라가 되어 버린 도시의 추억이여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천국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소망하는 것이다. 그곳은 과거에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 있을 때보다도 더 아름답고 행복한 낙원이다. 그곳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원초적 죄성으로 인하여 한 때는 누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 보혈을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속죄양이 되어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하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께서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 행동이 의로워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생명의 빛”을 따르는 자는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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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재)그곳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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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지도자 리콴유
- 필자는 몇 년 전 싱가포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작은 도시 국가인 그곳은 시내의 모든 시설들이 조밀 조밀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동양의 나폴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교팀을 안내한 가이더를 통해서 싱가포르를 만들었던 리콴유 수상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때의 기억으로는 지도자로서 참으로 멋진 분이라고 판단되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건물 하나하나를 계획에 의해서 설계하고 건축할 만큼 세밀한 정책이 부럽기도 하였다. 특히 건물의 모양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도록 지어진 소방서는 명물이었다. 이처럼 멋있는 도시국가를 만들고 통치하신 분이 3월 23일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지만 지도력의 빈곤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지상에 큰 별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리콴유 전 수상에 대해서 조선일보 닷 컴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리콴유는 영국 식민 시절인 1923년 9월 16일 부유한 중국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혁명가 쑨원·중국 지도자 덩샤오핑 등과 같은 객가인(客家人·중국 북부에서 남부·동남아로 이주한 한족) 출신이다. 1941년 12월 들이닥친 일본군에 동족 수천명이 살상 당하자 리콴유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통치 이념이자 신념인 ‘실용주의’의 싹이 튼 것이다. 그는 고향을 짓밟은 일본군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먹고살아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고 1942년 일본어 강좌를 수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패퇴한 뒤에도 혼란이 가시지 않자 심란한 마음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빛(光)과 영리함(耀)이라는 의미가 깃든 이름을 얻은 소년은 명문 래플스 대학에 수석 입학했다.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에서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1950년 귀국해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각됐고, 1954년 실용주의 정당 ‘인민행동당’의 창립을 이끌며 사무총장에 올랐다. 5년 뒤 1959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했고, 서른여섯 살 리콴유는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됐다. 서른여섯 살이던 1959년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바닷가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리콴유는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연방에서 축출되다시피 독립한 싱가포르의 앞날은 암담했다. 정정이 불안하고 가난한 섬은 곧 주변국에 흡수될 거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반세기 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가 넘는 아시아 최고의 부국이자 세계적인 물류·금융·비즈니스 중심지다.리콴유는 산업 분야에선 완벽한 자유를 부여했다. 해상 물류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극대화시켜 외국에 문호를 활짝 열었다. 다국적기업의 사업자 민원 처리 속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세계 기업을 빨아들이기 위해 낮은 법인세율(17%)을 정착시켰고 양도소득세, 상속세는 아예 없다. 이런 개방적인 경제정책 덕에 1만여 외국 기업과 세계 유수 은행 200여곳이 둥지를 틀었다.“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 안주”라며 국민을 독려해온 그는 31년 통치를 마감하고 1990년 퇴임한 뒤에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정부 운영은 오케스트라 지휘와 같다. 유능한 팀 없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며 ‘악기’가 되어준 각료와 국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63년을 함께 산 반려자 콰걱추 여사와 2010년 사별한 뒤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혼수상태의 부인 옆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병간호를 해온 만큼 사별의 충격은 컸고, 5년 뒤 천상에서 재회하게 됐다. 이처럼 멋있는 지도자 밑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일등국민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필자가 유학시절에 만났던 싱가포르 사람들은 같은 동양계 이면서도 성품과 매너가 참으로 정직하였다. 이러한 국민성을 길러 준 귀한 분이 타계 하였다는 소식에 진한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지도자가 우리 국가도 통치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진정 민중들로부터 존경 받을 수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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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지도자 리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