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성품의 중요성’ 딤후 3:1~5
-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어려운 때를 만날 것이라고 본문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말할 때면 보통 지진이나 전쟁 등이 떠오르는데, 디모데후서는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이 겪는 고통 중에서도 파괴된 성품에 대해 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5절의 내용은 모두 말세에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동성애를 몹쓸 죄악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동성애는 비성경적이고 우리 사회와 문화에 전혀 맞지 않으며, 인륜에 반대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경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은 자아를 존중하는 그런 긍정적인 사랑이 아닌, 극히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방향과 본질이 빗나가 있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어떤 대상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의 첫 번째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며, 그 다음은 이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만 보더라도 모든 구조가 타인을 위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돈을 버는 일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필요를 충족하는 대가로 지급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점점 자기를 사랑하는데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아니고, 이웃이나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된 것입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맞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야 하고, 이웃들로부터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엔돌핀이 생기며,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런데 점점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다 보니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에 집착하다 보니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우울증이 따라다니는 삶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엔돌핀이 아닌 우울과 불안을 동반한 호르몬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생활 속에서도 나타나지만, 교회 안에서 비롯되는 많은 불편하고 빗나간 관계들도 사실상 자기를 위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가 굳어져서 나오는 완고한 모습이 발현되는 순간 많은 불협화음이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는” 모습(2절)도 모두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을 돕기 위해서 돈에 눈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아는 자가 교만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가 부모를 사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사랑의 방향이 자기만을 향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도, 거룩한 마음도 들기 만무한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웃을 향해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며 사나운 데에(3절)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굳이 애걸복걸할 필요 없이 여전히 무정하고 타인을 쉽게 모함하거나 사나운 기질을 고수할지라도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만을 사랑하는 삶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괴롭습니다.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2천 년 전에 오늘날의 현상을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나열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것은, 어떤 종교적인 모습이 아닌, 제대로 된, 본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순전한 인간의 모습과 성품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대로의 성품을 소유한다면, 그러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러한 사람은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성품의 중요성’ 딤후 3:1~5
-
-
[언론회 논평]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법치주의’를 표방한다. 그런데 과연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또 법치주의 나라가 맞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대통령의 12•3 계엄 선포로 인한 문제점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우선 대통령에 대한 ‘내란죄’는 확정이 되지도 않았는데, 공공연히 ‘확정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계엄 선포가 대통령의 고도의 통치적 판단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는 ‘최초’라는 말이 여러 군데에서 붙는다. 야당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은 물론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은 국무총리에 대하여도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탄핵하였다. 그것도 대통령 대행에 준하는 것이 아닌, 국무총리급으로 취급하여 탄핵시켰다. 이때 국회의장은 탄핵가결 시 대통령 권한 대행을 국무총리급으로 언급하며 투표를 감행하였다(헌법재판소 해설서에는 대행도 3분의 2를 얻어야 탄핵이 가결되는데, 국회의장이 2분의 1로 선언하여 강행처리 하였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헌법재판관 임명은 국무총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가능한 것인데, 자신들이 뜻하는 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보복치고는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대통령, 대통령 권한 대행 국무총리, 행정안전부장관, 야당 대표 사건을 수사하던 여러 명의 검사들, 임명되자마자 잘못을 할 겨를도 없는 방송통신위원장, 수사의 핵심인 서울중앙지검장, 부정선거 문제가 불거진 중앙선관위를 감사할 수 있는 직위의 감사원장, 그리고 야당 대표를 쳐다보았다고 법무부장관, 경찰청장 등 29명에 대한 탄핵을 남발하였다. 과거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있었지만, 이때는 대통령 한 명에 대한 탄핵으로 끝났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탄핵정국으로 나라야 무너지든지 말든지, 오직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법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느낌이다. 거기에다 대통령의 권한 대행에 대행까지 탄핵한다고 하여, 결국 그는 헌법재판관 2명을 임명하는데 이른다. 그는 부총리이며 장관이다. 그런데 어떻게 헌법기관인 헌법재판관을 장관급에서 임명할 수 있나? 이 경우에는 그를 대통령 권한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보다 앞서 대행을 맡았던 국무총리를 탄핵하던 기준과도 맞지 않는 모습이다. 또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가 대통령을 체포한다고 체포영장을 신청하여 발부받았다. 그리고 대통령을 체포한다고 출동하였다. 문재인 정권하에서 만들어진 공수처는 그들이 주장하는 ‘내란죄’에 대한 수사권도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을 체포한다고 기고만장이다. 그리고 보통 중앙지방법원에서 체포영장을 발부받는데, 그것이 아니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영장을 발부하는 변법까지 동원하였다. 또 자정에 발부받았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영장 발부는 처음이다. 거기에다 영장 발부를 허락한 서울서부지방법원의 영장 담당 부장 판사는 형사소송법 제110조(군사상 비밀을 요하는 장소는 책임자 승낙 없이 압수 수색 못함)와 제111조(공무원이 소지 보관하는 비밀에 관한 물건은 감독 관공서의 승낙 없이 압수하지 못함)를 예외로 한다는 기가 막힌 적시를 하였다. 이는 명백한 ‘삼권분립’의 파괴로 보는데, 공수처는 여전히 이 영장을 가지고 대통령을 체포한다고 설치고 있다. 전직 문재인 대통령은 부인의 옷값 문제에 대하여 법원의 판결 명령도 무시하고, 모든 자료를 대통령 기록물실로 보내 사건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그러나 야당 누구도 그에 대하여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이것이 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인가? 현재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파면’을 당하지 않는 한, 국가 원수이다. 지금도 직무는 잠시 정지되었으나 국가의 원수이다. 아주 중요한 헌법기관이다. 그런데 대통령제 국가에서 현직 대통령을 검찰이 체포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소위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장악한 의회의 폭거이며,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죽이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왜 이런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깨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미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듯이,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무마하고, 현 정권을 하루속히 무너트리려는 책동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본다.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흔들리고 있는데, 아직도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선동에만 휩쓸리고 있는 국민들이 있어 안타깝게 생각한다. 법은, 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그런데 정상적인 방법을 멀리하고, 선동하는 것에 놀아나서야 되겠는가? 국가가 매우 어려운 가운데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민들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려울 때, 슬기롭게 국난을 극복해 온 경험이 많다. 지금이 바로 그런 지혜를 모을 때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국민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인내하게 하시고, 서로 미워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란다. ‘헌재의 시간’을 맞이한 헌법재판관들에게도 공정심과 헌법의 정신으로 옳은 판단을 하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
[언론회 논평]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너무나 숙연했던 송구영신”
- 저는 지난 주일 저녁예배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5일 동안 신년축복성회를 인도했습니다. 이 성회는 35년이 넘도록 이어온 집회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일날 제주항공의 참사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왜 우리나라에 이런 참사가 일어나는 건가...” 순간 비행기를 조종하는 우리 교회 집사님과 전철과 고속철을 운행하는 성도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무안으로 직접 내려가서 조문을 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발뒤꿈치에 저온화상을 입어 장거리를 오가는 것은 정말 무리가 될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저는 용인시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가서 조문을 하고 왔습니다. 누구에게 뭐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어 이런 글을 남기고 왔습니다. "참척스런 슬픔에 잠겨 애도를 표하며 기도합니다“ 문득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이 땅의 살아있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구하고 이어가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 집회 때마다 박수를 치거나 기쁨으로의 찬양을 금지하도록 했습니다. 새해 0시가 되면 당연히 기립해서 박수도 치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찬양대가 찬양을 한 다음에도 박수를 치지 않고 모든 집회 전에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집회 중에 찬양을 부를 때도 손뼉을 치지 않고 주로 회개와 사모함, 헌신의 찬양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제가 송구영신예배를 두 번을 인도했습니다. 하루 저녁에 설교만 총 4회를 한 거죠. 저는 그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기쁨으로 가슴이 벅찰 뿐만 아니라 목이 터질 정도로 환호성을 내질렀을 때 조용하고 숙연하게 새해를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집합적 인격체(corporate personality) 신앙이 있습니다. 집합적 인격체 신앙이란 한 인격 안에 여러 세대가 함께 하나가 되거나 혹은 한 역사 안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백성이 시공간을 초월해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널 때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죽었지만 집합적 인격체 안에서 함께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미 모세 이후 수백 년 후에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집합적 인격체 안에서 함께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에 와서는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공동체 신앙,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합의 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저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번 참사에 대해 당연히 애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예배를 안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하는 제 자신도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시간마다 가슴이 쪼이고 심장에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목사이기 전에, 또한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 이어서였을까요? 저희의 기도가 부족하고 너무나 방심했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다시는 우리나라에 이런 사고가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의 모든 집회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 전철과 고속철, 또 자동차를 운전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새삼스럽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 가슴 벅차야 할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축복성회가 숙연할 수밖에요.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 생명을 이어가고 사명을 이어가야 할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애도하는 마음과 더불어 축복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부디 역사와 주권과 생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와 민족에 안전하고도 평안한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너무나 숙연했던 송구영신”
-
-
[언론회 논평] 기독교인 81% 종교가 내 삶에서 중요하다
- 종교활동이 내 삶에서 중요하다는 응답이 기독교인은 81%가 그렇다고 답했고, 천주교인은 53%, 불교인은 33%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종교인의 평균 58% 가운데 기독교인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종교활동에서도 매주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에서 기독교인은 55%, 천주교인은 27%, 불교인은 4%로 자기 신앙에 대한 충성도에서도 기독교가 월등하게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리서치가 지난 11월 22일부터 25일 사이에 전국에 있는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표본 집단으로 하여 조사한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3.1%의 응답률과 95% 신뢰수준에서 오차는 ±3.1%p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전체 종교인은 49%인데, 그중에 기독교인 20%, 불교인 17%, 천주교인 11%로 나타난다. 이런 추세는 지난 2018년부터 거의 변함이 없다. 기독교는 2018년에는 22%를 차지했으나, 그 후에는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천주교는 2018년에 12%를 차지했으나 그 후에는 11%대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불교는 변함없이 17%대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무종교인은 51%를 차지한다. 연령대를 놓고 보면, 기독교인은 18~29세까지 젊은 층이 13%를 차지하고 있으며, 불교는 8%, 천주교는 7%로 나타난다. 연령층이 올라갈수록 종교를 가진 비율이 높아진다. 그중에 기독교인은 30대 16%, 40대 20%, 50대 20%, 60대 23%, 70세 이상이 29%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에서 기독교인은 22%, 불교와 천주교는 각각 13%를 차지한다. 인천•경기에서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아 22%를 차지하는 반면, 불교•천주교는 각각 12%를 차지한다. 그리고 대전•세종•충청에서 기독교인은 21%, 불교는 17%, 천주교는 10%를 차지한다. 광주•전라에서는 기독교인이 25%, 불교인 11%, 천주교인이 10%를 차지한다. 대구•경북에서는 기독교인 15%, 불교인 24%, 천주교인이 10%를 차지한다. 부산•경남에서는 기독교인 14%, 불교인 29%, 천주교인이 7%를 차지한다. 마지막으로 강원•제주에서는 기독교인 17%, 불교인 19%, 천주교인 11%를 차지하여, 기독교는 서울•경기•인천•대전•세종•충청•광주•전라권에서 비율이 높고, 불교는 대구•경북•부산•울산•경남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 보면, 기독교인은 남자가 18%, 여자는 22%를 차지하여 여성의 비율이 높다. 불교도 여성의 비율이 높아 17%, 남성이 16%를 차지한다. 역시 천주교도 여성의 비율이 높은데 12%, 남자는 10%를 차지한다. 이는 지난해 조사와 비교해 보면, 기독교는 여성이 1%로 늘어난 것이고, 불교는 남자•여자가 각각 1%씩 줄어들었으며, 천주교는 남자 신도가 1% 늘어난 결과이다. 60세 이상 고령층으로는 천주교 47%, 불교 44%, 기독교 41%의 비율로, 전체 인구의 평균 32%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즉 모든 종교인구 비율이 고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년 전과 비교하여 믿는 종교가 변화된 사람은 7%이다. 그중에 자기가 믿던 종교를 떠난 비율은 불교가 11%로 가장 많았고, 기독교가 9%, 천주교가 7%였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 매주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전체적으로 31%로 지난해보다 2%p 늘어났다. 그중에 기독교인은 55%가 참여하고 있고, 천주교인 27%, 불교인은 4%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인의 충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독교인 가운데 10%는 종교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이에 비해 천주교인은 31%, 불교 신자는 19%) 그리고 가장 중요한 종교활동이 내 삶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가의 조사에서,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에서 기독교인은 81%, 천주교인은 53%, 불교 신자는 33%만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번 조사를 보면서 우리 기독교에 큰 과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10~20대의 13%와 30대의 16%에 머물고 있는 복음화율을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젊은 세대를 겨냥한 다양한 복음 전수의 접근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두 번째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51%에 이르는 무종교인에 대한 복음 전파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무종교인이 늘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부유함과 생활의 안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 또 교회에 대한 부정적, 불신앙적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다. 이런 걸림돌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세 번째로 지역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대한 복음 전파에도 힘써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도의 비율뿐만 아니라, 그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은 분명히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
[언론회 논평] 기독교인 81% 종교가 내 삶에서 중요하다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성령충만과 상’(출 31:1-5, 고전 9:18)
- 사울은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춤추며 예언을 하였습니다.(삼상 10:10)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주님의 영이 떠났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습니다.(삼상 16:14)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을 때 뉘우치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시 51:11)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충만은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 브살렐은 성령충만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직분을 감당할 때 성령충만하였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신 3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영적인 안목이 밝아져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트집을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 특징은 정상적인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면 부부관계, 자녀관계, 고용주 관계 등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엡 5-6장)성령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열매(fruit)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하나입니다. 그 방법이 여덟 가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려면,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음 없음을 깨달을 때 믿음이 돈독해집니다. 믿음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사 55:8) 셋째,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행 2:38-39) 회개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 12: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며,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해주시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존재를 믿고,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로 있어야 상을 주시는데, 사역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칭찬받을 수 있는데 칭찬을 안 받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주신 사명 위해 충성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자기 인생을 마라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을 달려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행 20:24) 바울은 지나간 것으로 만족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복음 전파와 계속 성장해야 할 자신의 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성령충만함으로 미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며 주님의 상을 바라보고 복음 전파와 자신의 신앙 성장에 집중해야 합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성령충만과 상’(출 31:1-5, 고전 9:18)
-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환대가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오게 한다”
-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그 책에 보면 인생 시간 계산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24시간 아닙니까? 그런데 하루를 분으로 하면 1440분, 한국인 평균 수명을 80세로 본다면 1년이 18분으로 계산이 됩니다. 즉 내 나이에 18을 곱하고 대략 60으로 나누어 보면 하루 중 내가 몇 시쯤에 있는지가 짐작이 되지요. 제가 계산해 보니까 0살은 0시, 10살은 새벽 3시, 20살은 오전 6시, 30살은 9시, 40살은 12시입니다. 50살은 15시, 60살은 저녁 8시이지요. 70살은 21시, 80살은 24시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생을 80으로 볼 때, 평균적 기준을 말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인저리 타임이 있지 않습니까? 경기 도중 부상 선수 발생으로 인한 시간 손실을 만회하는 추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승부가 안 나면 연장전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간이 인저리 타임, 연장전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생 후반전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인저리 타임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인생 후반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낳은 후에 나이를 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마침내 이룬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의 전반전을 자기중심으로 살았다면 인생 후반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사명을 붙들고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낳고도 75세 이상을 더 살았거든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잘 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세 나그네를 마주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환대하며 물로 발을 씻기고 떡을 가져다주고 송아지 요리를 하여 극진하게 대접합니다.(창18:1-8)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이었습니다. 그가 내년 이맘때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합니다.(창18:10)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창18:18) 저는 저온화상으로 아직도 상처의 아픔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저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인저리 타임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미 준비한 설교 원고이지만 또 다듬고 보완하며 보충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환대하고 성도들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설교준비를 하면, 반드시 저에게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35년이 넘도록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강사로 모신 적이 없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 그리고 장년여름수련회는 오로지 저만 강사로 서 왔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올해도 변함없이 말씀을 준비하고 강사로 서려고 합니다. 비록 그때까지 발이 완치될지, 상처가 덜 아물지는 몰라도 저는 끝까지 강사로 나설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상처로 소모한 시간을 만회하는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2025년 한 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환대하는 새해에 인저리 타임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의 축복을 더해 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확고한 신앙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신년축복성회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를 통해 새해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온 생애에 인저리 타임과 플러스알파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환대가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을 오게 한다”
-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의 흔적’(갈 6:17-18)
- 한평생 주님의 사도로 신실하게 살았던 바울에게는 입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전도자들과 달리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며 깊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흔적이라는 말은 ‘스티그마’라는 단어인데 고대사회에서 주인들이 자기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노예의 어깨나 엉덩이에 화인을 찍은 데서 유래했습니다. 불에 달군 쇠를 노예의 살 위에 찍어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낙인(烙印)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종임을 당당하게 말했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인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그리스도의 소유됨과 고난의 상처로 대변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도 아니요, 마귀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사 43:1).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면서 하나님의 것이지(고전 3:23) 그 외에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속했으면 주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고 또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최대의 기쁨과 최대의 영광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음으로 예수의 흔적은 고난의 상처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따라가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핍박을 당했습니까? 바울의 몸은 고난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는 희생적인 복음의 사자로서 숱한 고난의 흔적 영육 간에 증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 11:23-27). 고후 4:10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희생으로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바울은 도리어 그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말했습니다. 그 해답은 마 5:11-12절에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매 맞는 것 주님을 위하여 욕먹는 것 주님을 위하여 원망 듣는 것 주님을 위하여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가운데 고난과 눈물과 희생이 따를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 주님의 옆구리에 난 창자국 가시관을 쓴 자리에 난 주님의 머리의 상처는 누구를 위한 상처입니까? 모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요 눈물의 흔적이요 매 맞은 흔적이요 찔린 흔적이요 피의 흔적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묻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나는 발자취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발자취를 존귀케 여기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녀가야 하겠습니다.
-
- 칼럼
- WAIC 칼럼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의 흔적’(갈 6:17-18)
-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 올해는 성탄절을 좀 뜻깊게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1월 초부터 교회 주변 가로수에 성탄 트리를 장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인시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고 또 전기사고 등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죽전 중앙공원에서 루체비스타 성탄 행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헌혈을 하여 헌혈증을 모아 한국소아암재단에 기부하고, 취약계층을 위한 사랑의 쌀 나눔을 비롯하여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을 위한 성탄 선물도 전달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영호 집사님을 비롯한 우리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헌혈을 하신 성도들과 지역주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행사를 하는 동안 너무 음악 소리가 크고 음향 소리가 커서 혹시 민원이 제기되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아계신 이상일 용인특례시장님이 “목사님, 저기 좀 보세요”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니까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베란다에서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정말 희한하고 놀라웠습니다. 사실 제가 담임목사의 직권으로 혹시라도 주민들이 불편해할까 봐 브라스밴드 연주를 생략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도 희한하게 아파트 주민들이 다 내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행사가 끝난 이후에 물어봤습니다. “혹시라도 민원이 제기되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한 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 브라스밴드 공연을 하도록 놔둘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분들도 다들 보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루체비스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왜 이런 어려운 언어를 썼냐”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설명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루체비스타는 ‘빛의 풍경’이란 말입니다. 저는 언어에 있어서 선점을 하고 좀 앞선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밤의 긴장과 설렘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거룩한 잔상이 제 심장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루체비스타 행사가 끝나고 줄을 서서 교회로 오시는 성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고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사람과 사람, 또 사랑과 사랑 사이에 연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금실이라는 것입니다. 루체비스타 행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 가슴에 금실로 연결되는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거룩한 금실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교회 주차장으로 오는 모습이 금실에 이어진 행렬처럼 느껴졌습니다. 진짜 욕심 같아서는 그 행사를 한 번 더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평생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그날 밤, 유달리 별이 반짝이었던 것처럼 지난주 저녁에 우리는 가슴에 별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별들이 금실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헌혈을 비롯하여 헌신해 주신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또한 그날 현장에 함께 하신 성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올해는 크리스마스 전야제 행사는 없지만, 성탄감사축하예배 때 다 오셔서 다시 한번 아기 예수가 주신 별의 선물을 받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 별빛을 기대합니다.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우리 가슴에 빛나게 될 아기 예수의 별빛이여.”
-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루체비스타, 그 밤이여”
-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지록위마(指鹿爲馬)가 통하는 슬픈 세상’
- 중국의 진나라 환관이요 간신이었던 조고가 어린 황제 호해 앞에서, 자신을 위해하거나 따르지 않는 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말하고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말이 틀린 지 바른 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살 것이요 아니라 하거나 대답을 안하면 죽을 것인데, 결국 조고는 ‘지록위마’에 동의한 신하들만 남고 모두 죽이고 말았다.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 말한 신하들이 모두 죽어나간다는 명백한 현실, 그 현실을 넘어서서 용감하게 그것은 말(馬)을 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했던 신하들은 조고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황제보다 자신이 더 권력이 세다는 것을 세상에 확인시킴으로 절대 권력자임을 보여주었다는 고사성어, 지록위마. 지금 필자가 이 세상에 보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 동안 거대 야당의 입법폭주와 탄핵 남발 정국을 보면서, 그것도 그것이지만 참 그곳에도 ‘지록위마라고 합창하는 못난 선량들과 많구나’ 했더니, 계엄 선포의 배경에는 참으로 딱한 지록위마 소인배들이 무능한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어쩌다 이나라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바른 말하는 정치인을 볼 수가 없는가? 왜 이렇게 ‘지록위록(指鹿爲鹿)’ ‘지마위마(指馬爲馬)’라고 쉽고 명백한 언사를 사용하는 정치인이 없는가? 선동자들의 주창에 따라 합창하는 패거리 천박한 스크럼이 횡횡하는 이 불쌍한 나라를 누가 바로 잡을까? ‘지록위마’하는 인사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죽기 싫어서, 조고의 눈 밖에 나면 정치적인 생명은 물론 육체적인 생명까지도 보장받을 수 없으니, 나부터 살고 보자는 비루한 이기주의가 이 지록위마의 근본이다.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비루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 지난 20일 고양시 의회에서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바꾸는 조례안이 17:17로 끝내 부결되었다. 당론으로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시의원들이 정말 베일에 쌓인 것같은 ‘성평등’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요, 알았다면 그는 정말 지록위마의 비루한 정치인이다. 또 이것을 당론으로 밀어부친 민주당 역시 소수의 지지자들을 의식한 지록위마의 비겁한 정당이다. 어제 민주당 지지자의 토론을 보면서 무식하다기보다는 마치 초등학생 수준의 토론을 보는 것 같은 무능한 전형적인 지록위마의 현대판 정치인이었다. 그것이 두려워 무턱대로 자기 표를 헌상하는 의원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정치인들이 비겁하고, 이기적이 되면 그것이 망국의 징조이다. 조선이 그렇게 망했고, 광복 조국이 그렇게 분열되었다. 자신의 소신을 펴지 못하고 굴신함으로 생존하는 정치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을 살려줄 줄기를 찾아다니고, 그의 하수인이 되어 지록위마의 삶을 산다. 불쌍하고 딱하지만, 더 분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결정한 것에 우리가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록위마의 무리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의 아픔이다. 어제 고양시 의사당을 떠나오면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소리치기로 했다. 지록위마의 정치인을 몰아내자. 한 사람 힘있는 사람을 위해 참과 거짓도 상관없고, 국익도 국격도 자존심도 상관없이 오직 내 것만을 챙기는 비루한 정치인을 이제는 더 이상 의정 단상에 세워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다윗을 향한 나단의 절규는 생명을 담보한 것이었다. 오늘 이 시대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교회가 나단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정권이 지록위마의 길을 가지 않도록 붙잡고 세우고 함께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 역시 지록위마의 누를 범하면 안될 것이다. 탄핵 정국에서 이를 다시 다짐해 본다.
-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지록위마(指鹿爲馬)가 통하는 슬픈 세상’
-
-
[언론회 논평] 격랑(激浪)정치, 격동(激動)시대, 격견(格見)이 필요
-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 1주일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이전과 이후는 엄청난 격랑(激浪)이 몰아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1주일 사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기 위하여 계엄을 선포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탄핵과 수사의 대상이 되고, 사상 초유로 ‘출국금지’까지 당하고 있다. 또 검찰과 공수처와 경찰은 서로가 경쟁하듯 대통령을 잡겠다고 한다. 그런 막강한 권력들이 다른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수사는 왜 지지부진했을까? 여론 조사 결과,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의 탄핵을 지지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누가 대통령이 될까? 2024년 대학교수 1,086명이 뽑은 올해(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전에 조사됨)의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이다. 이는 ‘권력이나 세력을 함부로 부리고 날뛴다’는 뜻이다.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하여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때 당시 가장 앞장서 대통령 탄핵을 외친 사람이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을 우리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현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 가량 남은 상태에서 한국 정치는 다시 대통령 탄핵의 분위기로 들어갔고, 정말 탄핵이 이뤄진다면, 온갖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수혜자가 될 상황이다. ‘세계 속에 한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짧은 시간에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국가 체제는 급격히 바뀔 것인가? 우리 국민들이 격변의 시기에, 지도자를 잘못 세우면 사회주의로 갈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79년 전 해방을 맞았을 때도 하마터면 사회주의 국가가 될 뻔하였다. 이것을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공부하고 돌아온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주의를 획책하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 영국의 유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허구성을 간파했는데,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은 완벽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유혹에 빠져 종국에는 수많은 사람의 자유를 희생시켜, 노예가 되는 길로 나가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우리나라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필연코 사회주의가 될 것이고, 결국 국민들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공짜’와 ‘무상분배’로 국민들을 유혹한다. 공짜가 정말 공짜일까? 20세기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이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밀튼 프리더먼은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내가 받는 공짜는 누군가의 피눈물의 결정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정의하였다. 오늘의 한국 정치를 보고, 한 원로 언론학자는 ‘반대편의 증오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하여 악마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증오와 혐오를 정당화 한다’고 분석하였다. 상대방을 악마화하지 않고는 권력을 잡기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바른 정치요, 선진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탄핵’ 문제로 인하여 많은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고, 외교와 안보, 국가신인도 등이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오직 ‘탄핵 일방통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막상 탄핵이 이루어져,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고 하여도, 그것이 곧 국가 발전과 국민들의 삶이 행복해질 것인가는 장담하기 어렵다. 자칫하면 ‘노예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노예의 길을 좋아하거나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오직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왔고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 이제 또다시 국민들이 깨어 일어나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올 수도 있다. 그것은 국민들의 주권이며, 바른 선택을 해야 할 의무이며, 또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일말의 희망을 거는 것은, 사법부의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삼권분립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맞춰지기를 바란다. 모 언론이 여론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협되는 문제는 정치권의 극단 대립’이라는 응답이 35%로 가장 높았다.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것은 우리 정치가 정도를 가지 않고 있다는 증명이다. 우리 국민들도 정치의 혐오와 증오가 활활 불타는 화염 속으로 같이 들어가지 말고,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은 마치 전설 속의 불가사리와 같다. 쇠붙이를 먹어야 힘을 얻는 존재라고 한다. 국민들이 마치 쇠붙이를 공급하는 것처럼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정치권도 극한 상황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특정 정파의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며, 하늘의 능력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이 나라에 안정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국민들을 위하여 정치인들에게 권세와 권력을 더 주셨고, 또 그에 따른 심판도 엄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 격동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모든 국민들은 격견(格見-품위와 격에 맞는 의사 표현)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격랑 가운데에는 기독 의원들도 상당수 있다. 그들이 국회에서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기 바란다. 한국교회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국가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앞장 서야 한다.
-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
[언론회 논평] 격랑(激浪)정치, 격동(激動)시대, 격견(格見)이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