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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혼란할수록 가치가 더 중요하죠”
    최근에 병원 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결국 손에 들린 것은 신문이었고, 눈길이 머문 곳은 TV 뉴스였습니다. 화면 속 폭력적인 언행과 장면들은 양 진영 간 극한 대립과 충돌의 결과였습니다. 남북으로 나뉜 현실만으로도 억울한데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극단적인 분열과 충돌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오히려 정치인들이 선동하고 부추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정치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백성 혹은 국민의 안위와 행복, 그리고 공공의 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정치인은 진보 진영이 되었건 보수 진영이 되었건 간에 국민의 행복과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이상과 가치를 펼쳐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자,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그러한 이상과 가치를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탐욕이 앞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은 반드시 자기 우상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기 우상화란, 정치적 이상과 가치보다는 자기 이익을 앞세우며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탐욕을 품게 되면 그 탐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종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가치, 그것을 위한 이상을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 이상이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고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편협한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 소신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가치이며 진리이기 때문이죠. 종교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에서든 리더는 개인적 신념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공동체의선한 이미지메이킹을 고려하고, 그것이 공공의 윤리와 가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지 고민하며 행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그리고 진실과 진리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가짜 뉴스나 거짓 정보를 확산하는 데 앞장서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한동안 안토니오 그람시가 세운 동성애 전략에 곤혹을 치러야 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문화적 헤게모니(cultural hegemony)’ 이론을 주장하며 교육, 미디어, 문화, 예술 분야를 장악하여 기독교와 같은 기존 도덕과 가치를 약화시키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검은 것도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서 희다고 주장하면 결국 사람들은 그것을 희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동성애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안토니오 그람시 못지않게 심각한 괴벨스의 선동 전략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좌파 진영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무너뜨리고 네오막시즘적 사회를 이루려고 하였다면, 괴벨스와 같은 선동 전략은 오늘날 슈퍼 바이러스처럼 우리 사회에 파고들며 정치적 권력을 향한 탐욕의 영웅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공장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이라면 집단적 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달콤하게 유혹하는 손짓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보다는 좌우 이념에 지나치게 편승하면서 어떤 사람을 설정해 두고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를 품어야지, 왜 우리는 수많은 군중과 광장에 중독이 되려고 한단말입니까?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길 어귀와 광장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광장보다는 광야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도 얼마든지 편파적일 수 있고, 때로는 왜곡된 시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저도 광장과 아스팔트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동성애와 이슬람 스쿠크,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막기 위한 공교회적 행보였지요. 저도 연말연시에 건강했더라면 불의를 못 이겨 욱하며 광장으로 다가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뒤꿈치 화상을 통해 저를 꽁꽁 묶어 놓으셨습니다. 문득 어지러운 이 시대에 집단적 상처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폴 리쾨르가 쓴 ‘해석학의 갈등’이라는 책이 생각이 났습니다. 시대를 푸는 해석의 길은 어떤 시스템 혹은 이념이 아닌 유일한 진리(필자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해석)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난감한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지나친 정치적 워딩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어드레싱을 해야죠. 그런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러한 때에 광장보다는 광야를 먼저 선택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의 감동이 임할 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목소리 역시 타락한 정치 혹은 이기적인 목적과 맞물려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자기 우상화와 얽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공교회 지도자가 아닌 사교(私敎)의 리더가 될 수 있지요. 역사를 되짚어 보면, 부패한 정치에는 타락한 종교가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되새겨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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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9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은혜의 약속’(창 2:16~17)
    사람의 인생 안에는 알게 모르게 계약, 언약, 혹은 약속의 관계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계약’이라고 하면, 부동산이나 각종 매매와 사업 관련 계약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 말고도 사람과 사람 간에, 사람과 국가 간에, 그리고 사람과 기업 간에 본의 아니게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와 자녀 간에도 부모로서의 자격과 역할, 자녀로서의 자격과 역할이 주어지게 되어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는 책임이 생기게 되며, 자녀는 부모의 말씀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가정 내 질서를 따르는 의무가 주어지게 됩니다. 국가와 개인 간에도 이러한 역할이나 책임이 따라오게 되어 국가는 여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국민에 대해 국가로서의 의무와 구제 방안을 시행하는가 하면, 국민은 납세의 의무라든지, 국방의 의무라든지 이러한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생을 사는 동안, 비록 서류상의 의식적인 결정의 과정이 생략된다 할찌라도 은연중에 각종 계약이나 약속의 관계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병원에서 수술을 할 때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는 경우에도 만약의 경우 본인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각서를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에도 분명한 계약과 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는 약속과 함께 요구가 들어가게 됩니다.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언약으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따라 영생과 죽음이 선포된 ‘선악과 언약’이 있고(창 2:16-17), 다시는 물 심판으로 지상의 생물들이 멸망 당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신 ‘무지개 언약’이 있으며(창 9:8-11),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시내산 언약’(출 19:5-6)이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각 모여 목도하게 된 ‘모압 평지에서의 언약’(신 29-30장)이 있습니다. ‘선악과 언약’의 경우 인간의 행위에 의해 복과 저주가 결정되므로 이를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며, 나머지는 주로 ‘은혜언약’으로 부릅니다. 이런 의미 가운데, 본문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명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의 외출을 앞두고 치명적인 사고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미리 당부해주는, 위험에 대한 경고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부모의 선한 의지와 사랑이 담긴 경고나 메시지를 엄수하는 자녀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고 부모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 연속된 축복의 약속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부모의 사랑과 경고를 무시하며 살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도 이러한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불순종으로 행하다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까지 죄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만이 아니라 모든 후손들까지 죽음에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 사건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하나님과 그 자녀 된 우리와의 관계, 즉 언약의 관계는 지금도 똑같이 적용되며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을 귀히 여기며 충실히 따르고 적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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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이 발로 다시 뛰게 하소서”
    주님,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숨이 가쁠 때마다 심장이 수고하고 폐장이 더 강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지만 두 발이 이토록 수고했고,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두 발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짱짱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매 주일이면 강단에 서서 5번, 6번을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와 각종 집회를 다닐 때에도 원고에 매이지 않고 강단을 뛰면서 뜨거운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저는 두 발 가운데도 발뒤꿈치가 이토록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이따금씩 발뒤꿈치에 각질 같은 것이 벗겨지면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두꺼운 발뒤꿈치에 저온화상을 입고 저는 그 딱딱한 가죽이 얼마나 예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 같은 발꿈치 가죽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좁아서 세계 각지로 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무감각하고 딱딱한 발뒤꿈치 가죽이 얼마나 제게 소중한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입니다. 뒤꿈치 가죽이 있었기에 산행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마음껏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산꼭대기까지 다시 내려가기가 싫어 더 걷고 또 걷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요 몇 주 걷지 못하는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발뒤꿈치의 선물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는지요. 저는 재생치료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집사람의 집요하고도 시니컬한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전에는 집사람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소마취로 허벅지 살갗을 도려내었을 때 마취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고통을 생각해 봤습니다. 봄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속살을 강제로 뜯어 피가 나게 하고, 그 쓰린 속살에 허벅지 살을 붙일 때의 쓰림과 아픔이 저로 하여금 저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마취가 풀릴 때 발뒤꿈치와 허벅지의 아픔과 쓰라림은 영혼의 아림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작은 화상에도 고통을 느낀다면 암 환자들은 어떻게 투병을 하고 있을까요? 또한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괴로워했던 욥은 어떻게 인내했을까요? 아니, 저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고통, 영혼의 아림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저는 원하지 않았지만, 당신께서 저로 하여금 로뎀나무 아래 눕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제 인생에 있어서 겨울 끝자락을 맞을 때는 아니지만 믿음으로는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황홀한 시련도 다 끝나갑니다. 이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이식을 한 부위가 잘 생착이 되어 새살이 차오르고 굳은살로 변해간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주신 힘으로 사명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숨 쉴 수 없는 고난의 뜨거운 바람 내 영혼을 찢으며 불어올 때 광야에 홀로 남겨진 지독한 외로움 속에 깊은 밤 뜨거운 눈물 흘려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가시밭길 맨발로라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생명이기에, 사명이 눈물이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은혜이기에 사명이 축복이기에 외롭고 고독해도 사명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의 심장과 폐장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모든 체중과 모든 무게를 떠받들고 받쳐줄 수 있는 이 두 다리 그리고 발바닥에 주신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다시 한 번 소생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저와 같은 화상을 입지 않도록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부족하지만 저의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고난을 대신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맞을 환란의 방어막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걷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뛰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달려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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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2
  •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28: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항상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요 14장)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마 1:23) 본문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꿈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여호수아에게도(수 1:5), 다윗이 죽은 후 성전을 건축할 솔로몬에게도(대상 28:20), 이 땅 위에 남아 복음전파 사명을 완수해야 할 제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임종할 때도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창 48: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것은 이미 족장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b)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쫓겨나 광야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주셨습니다.(창 21:2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사람들과도 함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실 때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과 함께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사 4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역대하 13장을 보면, 아비야와 여로보암의 전쟁에서 유대 왕 아비야는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12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은 그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은 사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한 개인에게 임하시면, 성령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이미 예수께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권세가 끝날 때까지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26)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막 13:33)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엡 6:12)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악한 모든 세력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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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다시 생명나무로 하나 되는 교회
    지난 수요일 저녁에 교구를 담당하시는 김범준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김범준 목사님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텍사스에 위치한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에서 성경적 상담 박사과정 코스웍을 마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 교회 출신인 박형욱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잘 알고 또 제가 쓴 ‘생명나무’라는 책을 읽고 정말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위한 생명나무 신학과 성경적 상담 운동"이라는 소논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하나 되는 교회’라는 설교를 하는데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설교는 전교인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도록 주문을 하거나 설명을 한 적도 없는데 본인이 알아서 생명나무 신학과 신앙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구약학자인 벤게메렌의 글까지 인용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사실 어떤 분이 제 생명나무에 대한 설교를 듣고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벤게메렌의 글과 설명을 듣고 “아, 이렇게 통시적으로 성경을 풀어낼 수 있고 통전적 신학을 세울 수가 있구나”하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벤게메렌이 직접 한국에 와서 생명나무 심포지엄을 할 때 “생명나무: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성경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소강석 목사님의 생명나무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과 성도의 교회론적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점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그의 연구와 특별히 목회 사역에서의 적용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생명나무 주제에 대한 신본주의적 접근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아주 적절합니다. 소강석 목사님은 우리 앞에 있는 생명과 사망의 길에 대한 선택의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이 선택의 결단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선택은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국가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물론 김범준 목사님이 아주 노련미가 넘치고 성숙함이 배어나는 설교를 한 것은 아닙니다. 좀 앳되고 순수하고 청순하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가 설교 후에 언급한 대로 본 바탕이 선하고 품성이 아주 착하신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설교도 그렇게 순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 신학을 구원사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일괄 정리를 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나무를 통해 서로 감사하며 복음의 사역에 동참하고, 성령 충만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주의 종과 한마음, 한 뜻이 되어야 생명나무로 하나 될 수 있다고 강조를 하였습니다. 제가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 제가 임직대상자들에게는 무조건 생명나무에 대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게 하려고 합니다. 신정주의 책에 대해서도 읽고 독후감을 내도록 할 작정인데요. 물론 제가 생명나무와 신정주의에 대해서 직강을 할 것입니다. 아무튼 김범준 목사님의 설교는 발꿈치 화상과 싸우고 있는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고무를 시켜 주었습니다. 실은 김 목사님이 베테랑이 아니라 우리 교회 사역을 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세상말로 초짜 되는 분이 어떻게 꼭 제가 설교하는 것처럼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을 간파하고 제가 세운 생명나무 신앙과 신학을 통시적이고 통전적으로 정리해서 현장에 맞게 적용을 잘할 수 있나, 설교 들으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이런 동역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저와 함께하는 모든 동역자들이 다 하나하나가 귀하고 또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이지만 우리 김범준 목사님의 수요일 저녁설교는 참 빼어나고도 독특한 온리 원의 설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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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25-01-26
  • [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도척지견(盜拓之犬)과 중구난방(衆口難防), 어떻게 할까?’
    옛말에 ‘도척의 개’라는 뜻을 지닌 ‘도척지견’이란 말이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밥 주는 주인에게 무작정 굴종하며 맹종하는 개와 같은 얼뜨기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도척(盜拓)’이란 악명높은 큰 도둑의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도척에게는 졸개가 무려 2천여 명이나 될 정도로 대단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에 걸맞은 도척의 행패는 자심하였다. ‘도척’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유린하고 약탈하는 악마와도 같아서 그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이런 악한인 도척의 집에서 기르는 개는 도척이 어떤 놈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 찌꺼기나 던져주는 주인 도척에게 꼬리를 흔들어 댔을 뿐아니라, 도척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냐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짖어대고 물어뜯기 일쑤였다. 그 개는 도척이 짖어라 하면 짖고, 물어라 하면 물었다. 그 알량한 밥 찌꺼기 한 덩이를 더 얻어먹고자 도척의 눈치를 보면서 꼬리를 흔들면 오로지 충성하는 개, 이 개를 지칭하여 만들어진 말이 ‘도척지견’이다. 이후 이 말은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르는 채 ‘도척’의 개(犬)처럼 앞도 뒤도 가리지 못하고 그저 먹다 남은 밥찌꺼기 한 덩이 던져주는 주군에게 굴종하며 비열하고도 악랄한 개 노릇을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를 빗대어 ‘도척지견’이라 하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국에 이 말이 뼈를 아리는 말처럼 들려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야말로 정치는 사라지고, 어른의 조언과 권면이 천대받고, 권위와 질서가 조롱받는 희한한 세상에서 오직 살아남는 자는 도척의 개와 같은 소인배들 뿐이다. 낮에는 험하게 싸우다가도 저녁에는 서로 만나 길을 모색하던 그 알량한 여의도 정치 풍토도 사라져 버렸다. 특히 막강한 영향력으로 당을 지배하고 있는 민주당은 이 말에 자신을 각성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에는 도척지견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어떻게 민주사회에서 민주정치가 이런 오류와 탈법과 편법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독단의 정치가 진행되는데, 단 한사람도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지금 당 대표의 지지도 하락을 기다리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인가? 단언컨대 도척의 개들이 득세하는 세상에는 미래가 없다. 그렇다고 여당은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맹종할 도척이 없기에 그의 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당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지, 뭘 하겠다는 지 모르겠다. 비대위원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원내대표는 뭘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흐름도 주장도 소신도 안보이는 초라한 초선들의 모습, 모두 설 명절을 핑계삼아 지역구 관리에 여념이 없는 못한 소인배들, 아직 총선이 가마득한데 표밭 관리에만 정신이 없어 살아남기에 몰두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는 이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중구난방이다. 야단법석인 듯한데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이 시끄럽기만 하다. 이런 모습으로 도대체 이 탄핵정국을 어떻게 책임지고 수습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1951년 1월에 2차 대전에서 나치에 대항하여 프랑스를 구한 삼성 장군 랄프 몽클라는 자청하여 중령 계급장을 달고 프랑스군 대대 제1진을 인솔하여 6.25에 참전하였다. 계급보다 자유 우방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신념은 중장을 떼고 중령 계급으로, 미군 대령 프리먼 연대장의 지휘를 받으며 진지를 지켜낸 불세출의 장군이다. 그의 군인정신은 도척지견도 아니며 중구난방도 아닌, 오직 자유의 정의를 위한 군인으로서 계급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6.25 같은 정치 난장판에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왜 랄프 몽클라와 같은 제대로된 정치 인물이 없을까? 그렇게 추한 행동으로 욕을 먹고도 주인의 부스러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못난 도척지견들을 바라보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근심할 뿐이다.
    • 칼럼
    • 임성택시사프리즘
    2025-01-25
  • [언론회 논평]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 소추 기각이 갖는 의미
    방송통신위원회는 국가기관이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주요 업무는 지상파방송 및 종편·보도PP에 대한 방송정책, 방송통신사업자의 금지행위 위반 시 조사·제재, 방송통신 이용자 보호정책 수립·시행, 불법유해정보 유통방지, 방송광고, 방송프로그램 편성 및 평가정책 수립·시행, 미디어 다양성 정책 등에 관한 사항 등을 다루는 중요한 기관이다. 그런데 방송통신위원장이 임명된 지, 이틀 만에 거대 야당에서는 탄핵 소추 가결로 모든 활동을 중지시켰다. 이유는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KBS 이사 등의 선임 건을 의결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에 방송통신위원회에는 통신 위원이 5명이어야 하는데, 다른 위원이 없어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결의한 것인데 이것이 문제가 있다며, 국회에서 야당 주도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것이다. 그 목적은 MBC의 이사가 야당 추천 인사에서 여당 추천 인사가 많아지게 되므로, 소위 노영방송(勞營放送)으로 불리는 MBC를 자신들의 방송으로 지키기 위한 것이며, 편파적인 언론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MBC의 이사는 9명인데, 문재인 정권에서 당시 여당의 추천 이사는 6명이고, 야당의 추천 이사는 3명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국민의 힘, 여당 몫이 6명으로 바뀐 상황에서,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공영방송의 이사를 임명하자, 거대 야당이 태클을 걸어, 무려 174일 동안 방송통신위원회를 ‘식물 상태’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편파 방송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MBC를 개혁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를 거대 야당이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야당은 이번의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뿐만 아니라, 그 전의 이동관, 김홍일 위원장에 대해서도 탄핵한다고 하여, 그들이 사표를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141개 방송국의 재•허가 문제가 불발되고, 현재 방송 허가도 없이 불법으로 방송하는 곳까지 생겨났다. 그래도 이것이 정상인가? 거대 야당이 문제를 삼은 것은, 방송통신위원회 통신위원 가운데 2명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통신위원회에 이사를 추천하지 않은 것은 야당의 책임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통신위원 정족수가 5명이다. 그런데 야당은 1년 넘게 통신위원을 추천하지 않아, 문제의 소지가 되도록 만들어 놓고, 그리고 위법도 아닌 2명의 통신위원이 결정한 것에 제동을 걸고 나왔던 것이다. 이것은 방송통신위원장의 잘못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번에 헌법재판소에서 이진숙 위원장에 대하여 탄핵 소추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렸지만, 이 사안은 명백히 거대 야당의 정략적인 탄핵 소추임에도 불구하고, 진보 성향의 헌법 재판관들 4명은 탄핵을 ‘인용’했다는 것이다. 헌법으로 모든 것을 판가름내야 하는 헌법재판관마저, 자기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헌법을 달리 해석한다는 것이 놀랍고, 기이하다. 현재 헌법재판관은 8명인데, 그중에 문형배 재판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한 진보 인물이고, 이미선도 같고, 정정미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천했고 중도로 알려진다. 그리고 최근에 임명된 정계선은 더불어민주당이 추천한 재판관으로, 진보이며, 이들이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을 인용하였다. 특히 헌법재판소 소장의 직무 대행을 맡고 있는 문형배 재판관은 진보 판사의 상징과 같은 우리법연구회의 회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현재 거대 야당이 탄핵 소추한 것은 총 29건으로, 4건만이 결정되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 사건을 접수한 날로부터 180일 이내에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안 모 검사와 이 모 검사에 대한 결정은 각각 252일, 270일이 걸렸다. 순 모 검사는 400일이 넘었지만,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가운데 직무를 하지 못하고 있고,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도 174일 만에 결론을 내려 180일 기한을 겨우 면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정치인들에 의하여 심한 ‘갈라치기’가 되어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사법부, 헌법재판소와 같은 법률로 우리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을 책임 있는 기관들은 법률로 균형 잡히고, 법률에 충실한 결정을 내려주어야 한다. 법률은 보수적 측면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법률을 가지고, 이념이나 정치적 시험장으로 삼아서는 국가에 큰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많은 탄핵 심판이 헌법재판소를 통하여 다뤄지게 될 터인데, 헌법 재판관들의 헌법에 의한 충실한 결론을 기다린다. 이번에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기각이 기폭제가 되어, 대통령, 국무총리, 감사원장, 장관, 검사 등에 대한 탄핵 소추 사건이 헌법으로 인하여 올바른 결론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1-25
  • [언론회 논평] 사법부는 정말 ‘국민저항권’을 불러들이려는가?
    지난 19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헌정사상 최초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통령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울서부지법은 대통령을 구속하는 사유를 15자(字)로 적어, 마치 일개 잡범처럼 취급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유나 설명은 전혀 없었다. 참 자기들 편한 대로 하는 사법부의 형태이다. 지난 2023년 거대 야당 대표의 영장 기각을 할 때는 그 사유를 적은 것이 600자가 넘었다. 또 기각하는 사유도 ‘정당의 현직 대표인 점을 감안 했다’고 하였다. 그럼, 국민이 뽑은 대통령은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어서 안 되고, 야당 대표는 괜찮다는 논리인데, 이는 사법부가 신뢰를 잃게 되는 충분한 이유라고 본다. 급기야 대통령을 구속하는데 역할을 한 서울서부지법에는 흥분한 국민들이 난입하여 자신들의 의사 표현을 했다(대부분 20~30대 청년들). 물론, 폭력은 금물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사법부의 편파적인 태도가 국민들에게 크게 실망을 안긴 것으로 사법부의 책임도 크다. 이날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는 영장 담당 판사도 아니고, 당직 판사였다. 현직 대통령에 대하여 영장을 발부하는데, 너무나도 사법부의 진지함이 떨어진다는 점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법원은 형평성이라는 의미를 알고는 있는가를 묻고 싶다. 야당의 대표는 당 대표라 영장을 기각하고, 또다른 대표는 2심에서 실형이 나왔는데도 법정 구속하지 않아서, 총선에 출마하여 국회의원과 당 대표까지 되었다. 그뿐인가? 그의 사건에 대하여 판결을 미루기 위하여 한 판사는 자리도 옮기지 않으면서, 3년 이상을 질질 끌다가 결국 다른 판사에게 넘기는 꼼수도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선거 사범에 대해서는 ‘6•3•3원칙’을 지켜야 한다. 즉 1심까지 6개월, 2심까지 3개월, 그리고 최종심까지 3개월 이내에 모두 마쳐야 하는데, 국회의원 4년 임기가 다 되도록 미적미적하다가 끝나는 사건들도 다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3권분립’이 또렷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은 국민으로부터 선출 받은 권력이다. 그러나 사법부는 국민으로부터 선출 받지 않은 권력이다. 따라서 선출 받지 못한 권력이 선출 받은 권력을 심판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공정성, 객관성, 법의 원칙에 충실해야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사법부가 공정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니, 국민들이 실망하고 흥분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영장 심사와 수사하는 사법부와 공수처의 불법적, 편파적인 태도는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대통령을 체포할 때도, ‘내란죄’에 대하여 수사할 자격도 없는 공수처가 체포영장을 서울중앙지법이 아닌 서울서부지법에 청구하여 ‘영장 쇼핑’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혐의도 ‘내란 우두머리 및 직권남용’으로 확신범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유일한 판단과 권한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지만, 이로 인하여 국회에서 ‘탄핵’을 받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형사소송법으로 대통령을 더 단단히 옭아매려는 것은 지나치다는 법률 전문가들의 주장이 많다. 굳이 현직 대통령을 구속 수사한다는 그 발상 자체가 그동안 별반 실적도 없었던 공수처가 ‘법의 과잉’과 ‘권력남용’을 보여 준 것이다. 거기다가 공수처는 대통령을 공관에서 체포할 때, 공수처 수사관들이 군사보호시설인 대통령 관저 출입에 있어 그곳을 경비하는 군부대의 출입 승인을 요구하다 안 되니, 관인을 가져오도록 강요하고 자기들이 만든 공문에 관인을 직접 찍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동의를 받아 공문에 간인(間印)과 날인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거대 야당은 마구잡이로 총 29건의 탄핵안을 발의했는데, 대부분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중대하게 위배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탄핵안을 마치 시골장의 싸구려 물건 팔듯 남발하였다. 더군다나 헌법 제65조 2항에 의하면, 대통령 탄핵소추 가결엔 국회 재적 3분의 2(200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대통령 탄핵 후에, 대통령 권한대행에게는 헌법재판관 등을 임명하라(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권한)고 압력을 넣으면서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작 국무총리를 탄핵할 때에는 장관(총리)의 기준에 맞춰 탄핵을 결정하였다. 이를 야당 출신이며, 그 야당 편에 서 있는 국회의장이 월권으로 미리 통과선을 명시하고(거대 당만으로도 가능하도록) 투표에 들어가는 후안무치도 서슴지 않았다. 법을 다루는 사법부의 ‘갑질’과 법을 만드는 입법부의 자기들에게 필요한 대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는 것은 우리 사법 체계와 ‘법치주의’를 무색케 한다. 언론들은 지금의 상태를 87년 민주화 이후 최대의 민주주의 위기라고 하는데, 그 민주주의를 지키고, 법을 지켜야 하는 막강한 권력들의 타락이 국민들로 하여금 울분과 절망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의 혼란은 사법부의 이념과 정파에 따른, 흔들림과 쏠림 때문으로 본다. 심지어 대통령의 탄핵 문제를 결정할 헌법재판소에서는 ‘국민만 바라 보겠다’고 하였다. 헌법만 바라보고 판결해야 하는데, 왜 이런 말이 나올까? 척도(尺度)를 재는 자는 정확해야 한다. 잣대가 구부러지거나 짧거나 길면 잣대의 역할은 무용지물이 된다. 사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국민의 저항권을 유발시킨다. 미국 독립선언문과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은 ‘불의가 법이 될 때 국민의 저항은 의무가 된다’고 하였다. 부디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사법부가 정치화, 이념화, 편가르기, 화석화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한 이유에 대하여, 외부의 주권과 손잡은 반국가 세력의 반국가 행위가 있고, 자유민주의의를 붕괴하는 부정선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그런 부패와 부정과 대한민국을 허물려는 반국가세력의 척결을 원한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뜨겁다. 최근 여론에 나타난 민심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당시는 10%대까지 내려갔으나 지금은 50%를 넘고 있다. 또 탄핵 찬성이 처음에는 75.7%까지 올라갔으나, 지금은 50%로 떨어져 탄핵을 반대하는 47%와 비슷해져 있다. 특히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을 한 자리 수로 보여 주었던 20~30대가 46%까지 올라갔다. 지금 국민들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외부 세력의 국가 침탈 현상과 야당의 정치적 폭거와 함께, 이번에 탄핵 정국에서 드러난 온갖 불법과 부정을 바로잡고, 이것을 물리칠 지도자를 진정으로 찾고 있다. 이제 모든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는데,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정치권이나, 권력을 바라보지 말고, 혹은 자신의 이념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헌법에 담겨 있는 대로, 우리나라에서 헌법의 정신과 권리가 지켜지고, 정당하게 실현되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한다. 만약에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미약(微弱)하게 되면, 우리나라의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며, 모든 주권의 주체가 되는 ‘국민들의 저항권’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판단만이 국가의 안정과 정의의 나라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렇게 국가가 어려울 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도와 양심의 소리로 국가가 바로 세워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공의가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정체성이 무너지면, 그것은 곧 기독교를 탄압하고 부정하는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을 알아야 한다.
    • 칼럼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1-22
  • [언론회 논평] 입틀막, 폰틀막, 여론틀막 독재임을 모르는가?
    최근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국회에서 소위 ‘국민소통위원회 산하 허위조작감시단’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당 의원 여러 명이 나와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들이 대표적인 (우파)유튜브들을 고발했는데, 단순히 유튜브만이 아니라, 거기에 동조하고 그 생산된 허위 조작 정보를 유통 시킨 개인과 책임자까지도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한다고 하였다. 또 카카오톡을 통하여 내란 선동과 관련된 가짜 뉴스를 퍼나르는 것으로, 충분히 내란 선전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의원은 내란 공범 폭동과 관련된 선전 선동에 대해서는 일절 예외를 두지 않고 철저하게, 집요하게 쫓아가서 고발하고, 그 고발 과정을 법적으로 철저하게 따져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얼핏 들으면 이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거대 제1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인지, 경찰 수사관들이 나와서 범죄자를 쫓는 기자회견을 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집요하게 쫓아가서 고발하겠다는 사람들은, 우리 국민으로서 카카오톡은 전 국민 5000만 명이 사용하는 커뮤니티인데, 그들의 방법과 수단으로 통제하겠다는 선포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들을 찾아서 자신들의 권력과 힘으로 엄단하겠다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극대화하고, 헌법에 보장된 양심과 표현의 자유마저 뭉개버린다는 대국민 선전포고와 같다. 이것은 단순히,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2021년 12월 경북의 모 대학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소위 말하는 ‘인터넷 검열감시법’을 찬성한 바 있다. 사실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100% 진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세계 최하위 수준의 기존 언론들을 신뢰할 수 있느냐? 그러다 보니 수많은 개인 유튜브가 생겨났고, 국민들은 심각하게 편향되고 왜곡되어 믿을 수 없는 언론들보다, 차라리 자유스럽게 현장의 소식을 알려주는 유튜브를 많이 보게 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진보 정치권이 기존의 언론들을 장악했다면, 유튜브는 우파를 상징하는 커뮤니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튜브 내용들이 카카오톡을 통하여 많이 전파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민주당은 철저하게 유튜브, 카카오톡을 ‘가짜 뉴스’라는 프레임을 씌워 통제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더불어민주당은 소위 말하는 ‘가짜 뉴스’ 척결을 위해 노력해 왔는가를 묻고 싶다. 자신들의 진영에서 생산한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함구하면서, 자신들이 볼 때, 유•불리를 따져서, 불리하다고 느낀 것은 철저하게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발상이 결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허물려는 책동으로 보인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전 국민이 사용하는 커뮤니티를 정치적 힘과 권력으로 찍어 눌러서 성공한 경우가 있는가? 현재 이런 식으로 통제하는 나라로는 대표적으로 중국이라고 본다. 중국은 지난 2017년 말 교회를 단속하여 선교사들을 대대적으로 추방하였고, 2018년에는 ‘종교사무조례’를 만들어 종교를 중국화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리고 2022년에는 온라인 교회 금지령을 내렸다. 지금 민주당이 하고 있는 모습은 중국이 하고 있는 것을 답습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커뮤니티를 박해하면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교회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 인구 분포상, 커뮤니티의 활동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전에도 문재인 정부하에서 교회를 크게 핍박한 일이 있었다. 당시 국무총리이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이었던 정세균 씨는 당시에 코로나 확진자 절반이 교회에서 나온다는 ‘가짜 뉴스’를 가지고, 교회가 엄청난 비난을 받게 만들었고, 그것으로 예배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많은(1만개) 교회가 폐쇄되는 사례를 만들었다. 더불어민주당이 거대 야당의 의회 독재로 커뮤니티를 통한 박해를 하려는 것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국민은 헌법에 보장된 양심, 표현, 신앙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카카오톡을 탄압한다고 국민들이 당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더불어민주당이 그렇게도 커뮤니티 탄압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 국민 5천만 명을 모두 처벌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거대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말고, 권력만 가지고 협박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빼앗으려 하지 말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국민을 무시해서 성공한 정당도, 정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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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1-22
  • [언론회 논평] 여론조사기관까지 고발하여 입을 막겠다는 야당
    최근에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이 가결되어 직무가 정지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또 공수처에서는 무리하게 대통령을 체포하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여론 조사기관과 일부 언론들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을 조사한 것들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야당을 중심한 국회에 의한 탄핵이 결정된 후인 2024년 12월 둘째 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최저 11%까지 떨어졌다. 그랬던 것이 탄핵 결정 이후 여러 가지 일들이 전개되면서, 오히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급격히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0~30대의 변화가 뚜렷하다고 한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40%가 넘고 있어, 정가(政家)는 물론 국민들도 놀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에서는 여론조사기관을 고발하겠다고 하여 또 다른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야당은 여론 조사 기관들이 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즉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실명을 사용하여 여론 조사를 한 것이 잘못이란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을 때도 그런 반응을 보였었나? 야당은 겉으로는 여론 조사 기관에 대하여 압력을 넣으면서, 사실은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이 높아진 것에 대한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또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내고, 야당 대표의 여러 가지 범죄 혐의가 판결되기 전에, 대선(大選)을 치뤄야 한다는 강박증과 함께 여론은 뜻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있다는 조급함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론 조사 결과는 한 번의 조사로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친 결과이기에 야당의 주장처럼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민심에 대한 부정이다. 지난 1월 5일과 6일 사이에 전국의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KPI뉴스가 리서치뷰에 의뢰한 조사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36.9%로 나타났다. 역시 같은 날 같은 방식으로 아시아투데이가 한국여론평판연구소(KOPRA)에 의뢰하여 조사한 결과에서는 대통령 지지율이 40%까지 나왔다. 그리고 1월 2일 더퍼블릭과 파이낸스투데이의 공동 의뢰로 여론조사공정(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34.3%를 차지한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29일부터 30일에 조사된 다른 기관의 조사에서도 대통령의 지지율은 36.1%를 차지한다. 그리고 데일리안이 여론조사공정(주)에 의뢰하여 지난 1월 6~7일 사이에 조사한 것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42.4%까지 올라갔다. 이런 지지율은 지난해 3월 이후 근 10개월만에 가장 높은 지지율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 국민들은 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할 때만 해도, 놀라고 당황스러웠었는데, 이제는 이를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보인다. 그것은 대통령이 중간에 (이 나라의 불법 세력들에 대항하여) ‘국민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야당의 끊임없는 집착에 가까운 탄핵 강수(强手)를 보면서 입법 독주와 독재, 야당 대표에 대한 비호감이 더욱 크게 늘어나고, 무엇보다도 보수 대통령들의 연속 탄핵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들이 결집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의 탄핵 인용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여론 조사가 왜곡 되었다’ ‘응답률이 낮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런 기준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야당에 유리하고, 대통령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 결과에 대한 것은 문제 삼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매서운 겨울 추위에도 대통령 관저를 지키겠다는 국민들의 함성이 국가를 지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 야당은 대통령의 탄핵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탄핵’의 핵심이 되는 ‘내란죄’를 빼려고 하였다. 일단 탄핵시키기 위해 ‘내란죄’로 몰고 여론과 전문가들의 의견이 달라지니 빼려고 한 것이다. 이제 국민들은 정치권의 그런 얄팍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거대한 내전(內戰)을 치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세력, 자유대한민국 대 대한민국을 허물려는 반국가 세력, 법치주의 대 일극(一極)체제와 독재정권을 세우려는 세력 간의 싸움이다. 치열한 이념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대한민국은 서 있다.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해지고 있는가? 국회에서 야당 의원은 ‘대통령 수갑 채우고 나올 때까지 몇 날 며칠 가슴에 총을 맞더라도, 관을 들고 나오겠다는 결기를 보여주라’고 공수처장에게 주문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의원도 ‘대통령은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선동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퀄리티(quality-본질적 수준)가 한참 떨어지는, 어느 시대 국회의원인가? 이제는 국민들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왔다. 여론이 조금 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음을 알고, 반국가 세력을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에 득세하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 북한 공산당에 의한 6.25전쟁의 암흑 속에서,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일에도 앞장서서, 이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해 왔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국가를 잃으면 우리 삶의 터전도, 신앙의 발판도 무너진다. 세계 선교를 위한 교두보도 사라지게 된다. 우리 속담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을 아직도 모르는 국민들이 있는가? 지금은 해방정국과 비슷하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국민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 우리는 아픔 속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현실의 세계를 보면서,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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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202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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