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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꼭 지켜내야 할 것들”
- 지지난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가 났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대한민국 문학계에 큰 경사요 쾌거이지요. 사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좀 들떠야 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라면 본인이 언론에 나와 기자회견도 하고 들뜬 소회를 밝혀야 되지요. 그러나 그녀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향에서 잔치를 하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느냐”며 만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준 것은 즐기라고 하는 게 아니라 더 냉철해지라고 준 것 같다”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왜 그렇게 해야만 했었을까요? 그녀는 애당초 유명 스타가 되기 위해서 글을 쓴 게 아니라 자기만의 문학 세계를 열어가기 위하여 글을 썼기 때문일 겁니다. 영국 가디언지에서도 “매우 중요한 목소리와 놀라운 인간성을 가진 작가”라고 평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자기만의 정체성과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한동안 두문불출해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왔던 문학성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밝고 새로운 문학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힘을 자랑하지 않고 한동안 자기 자신을 조심스럽게 관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들뜨지 않았을까요? 들뜨지 않았으면 인간이 아니겠지요. 자신이 말하기를 “심장 속 불꽃이 타는 곳, 그게 내 소설”이라고 했다면 왜 가슴이 타오르지 않고 뛰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앞으로는 자신이 밝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한 것처럼, 자신의 문학성과 새 문학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은둔을 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 목요일에 공개석상에서 “지난 일주일 특별한 감동이었지만, 이전과 일상이 달라지지 않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또한 수상 소식을 통고받을 때 “믿어지지 않는 현실처럼 느껴졌다”고 했지요. 사실 인문학이란 잃어버린 존재의 질문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지만, 스스로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 대답은 오직 성경만이 해주지요.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이제부터는 한강 작가가 하나님을 만나고 더 밝고 희망찬 작품을 써 주기를 기대도 해 봅니다. 저도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앞으로 이루어야 할 일도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해낸 일들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십수 년 전부터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사로서는 최초로 이슬람의 전략과 문제를 한국교회에 알려서 경각심을 일깨우고 각 교단마다 이슬람 대책 위원회를 생기게 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또한 빌헬름 라이히의 성 혁명에 기반한 동성애 운동의 폐해를 설교와 강연, 오피니언을 통해서 알리고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한동협)의 초대 회장을 맡으며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수 차례 차별금지법 입법화 시도가 있었지만, 최전선에 서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종교인 과세 문제가 대두 되었을 때도 ‘종교소득 과세’가 될 위기에서 ‘종교인 과세’가 될 수 있도록 대처를 하였습니다. 코로나 시국에서도 이미 정부에 예배의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를 지키면서도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일들은 단 한 번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용기와 의협심도 있어야 하지만, 정말 치밀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회처럼, 저도 지금까지 너무 은밀한 영역에서 전략적으로 활동을 했는데 앞으로는 좀 더 선구적이면서도 격이 있는 사역을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걸 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꼭 지켜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의 건강과 목회, 교회와 성도들, 한국교회 생태계, 또한 개인적인 지성, 감성, 영성, 예술과 문학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하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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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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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꼭 지켜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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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한반도의 통일은 북한 주민을 살리는 길이다
- 최근에 정치권의 한 인사가 갑자기 ‘통일을 포기하자’ ‘두 국가 체제를 수용하자’는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헌법을 고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통일부를 정리하자고 하였다. 너무나 뜬금없는 말이며, 무책임한 말이다. 그는 다름 아닌 문재인 정권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1980년대부터 ‘통일운동’을 주창해 온 임종석 전 의원이다. 그가 9·19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한 말인데, 이것은 문재인 정부와 김정은 사이에 맺어진 선언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난해 11월, 이를 전면 폐기한다는 선언으로 그 합의는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그런데 이처럼 아무 쓸모도 없는 선언을 자기들끼리 6주년 행사를 한다면서, 뚱딴지같은 발언이 나온 것이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북한의 주장을 맹신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지난해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우리 헌법 제3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임종석 전 의원은 1980년대 전대협 의장으로 임수경 전 의원을 밀입북시켜 북한에 들어가게 했었고, 2018년에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위하여 수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기다려 왔다. 그런데 이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럴 리는 없지만, 임종석 전 의원의 발언이 매우 위험한 것은 우리가 두 국가 체제로 가게 되면, 북한이 급변 시에 북한의 주민들을 구해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북한 지역의 우리 영토에 대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학생운동을 했었고 1999년에 정계에 입문한 임 전 의원이 통일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북한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정치가로, 국민으로서도, 그가 20대부터 해 왔던 통일운동에 대한 진정성을 모두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임 전 의원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 주자로 보고 있으며, 소위 말하는 386세대의 핵심으로 불린다. 이 세대는 아직도 한국 사회의 주류이다. 지난 제22대 총선에서 386세대로 구별되는 1961년부터 1969년생까지의 국회의원은 전체 300명 가운데 178명이나 된다. 그중에 더불어민주당은 자그만치 117명에 이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하여 정치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386세대의 이런 행태는 우리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1999년 임 전 의원과 정치계에 함께 입문했던 우상호 전 의원은 최근 그의 책을 통하여 ‘총론으로 보자면 그룹으로서의 386세대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지금도 80년대식 사고에 갇혀 있고, 진정으로 민주화를 위하여 정치권에서 제대로 기여하지도 못하는 불완전한 모습이 아닌가. 40여 년을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는 386세대의 잠꼬대 같은 소리를 정말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의 미래와 바른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것에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혼란만을 가중시키니 말이다. 우리가 통일을 포기하면 북한 주민의 생존과 인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또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주권을 버리는 것이 된다. 그래도 되는가? 그러려면 왜 통일운동을 해 왔는가? 통일은 현실을 외면한 환상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할 사안도 아니다. 북한의 2,000만 주민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행이 이제는 멈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 통일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황당하게도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자의 말에 휘둘리는 정치인의 주장은 공허하게 들리고,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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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한반도의 통일은 북한 주민을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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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출 33:19)
- 성도라면 그 누구나 지나온 날들을 회상할 때 일절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믿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다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엇을 받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대가가 필요 없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돈으로 금은보석으로 권력으로도 이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며 하나님께서 뜻대로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넓고 큰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욥 5:9-11, 9:10-11, 11:7-9, 롬 11:33, 고후 9:14-15). 이를 통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더 넓고 깊으며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의 고마움은 결코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시 116:12-14에서 시인의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우리도 이 시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망각하지 말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가나안 땅까지 오는 한 순간 한 순간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천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끊임없이 계속해서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모든 과정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볼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셨고(요 1:16)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은혜와 평강을 더하여 주셨고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길을 벗어나면 영적으로 질식할 수밖에 없고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가 있어야 사는 존재이오니 하나님의 은혜를 귀한 줄로 알고 마지막까지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합당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을 만나든지 불평하지 마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원하십니까? 일절을 은혜로 여기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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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출 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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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독수리는 참새와 같이 날지 않는다”
- 저는 교회를 다니며 신학교를 가겠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혈혈단신으로 광주신학교에 갔습니다. 저는 광주신학교를 다니면서 1등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습니다. 1등으로 입학을 해서 1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의 상대는 나를 뒤쫓아 오는 동료 신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전남대생들과 경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많이 다니는 서점을 다니며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불타는 소명감에 백암교회를 개척하러 갔습니다. 그때 얼마나 핍박을 받고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한테 벌금을 만 원, 1만 2천 원씩 매겼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망하지 않으니까 부락 주민들은 허구한 날 술을 먹고 150명 200명이 떼를 지어 와서 저에게 멱살을 잡지 않나요, 침을 뱉지 않나요, 천막 예배당에 똥을 싸 놓고 가고, 차임벨 줄을 끊어버리고, 온갖 핍박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이웃 교회 어느 목회자가 우리 동네 이장한테 와서 “저 전도사는 사이비라고, 자격증도 없는 놈이 와서 전도사 하고 있다”고 험담을 하였습니다. 순간 저도 그를 원망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목회자를 상대하지 않고, 당시 광주중앙교회나 서울 영락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경쟁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울로 신학교를 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개혁신학연구원에 와서도 SKY 대학 다니는 사람들과 경쟁을 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종로서적에 가서 SKY 대학생들이 보는 책들을 따라서 보기도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니까 사람은 마음의 크기만큼, 생각의 크기만큼, 믿음의 크기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새도 날개가 커야 높이 납니다. 참새나 제비 같은 경우는 낮게 날면서 곤충이나 잡아먹고 벌레나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참새나 비비새나 제비와 함께 날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건 비가 오건 태풍이 불건 하늘을 날면서 산짐승들을 노립니다. 어쩌면 독수리는 비행기와 경쟁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독수리가 돼야지, 절대로 남이나 헐뜯으며 재잘거리는 참새나 제비는 되지 말아야지. 나는 오늘도 푸른 창공을 나는 독수리가 되어야지.” 오늘 저녁에는 광신대학교 7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우리 교회에서 열립니다. 독수리의 꿈을 꾸던 가난하고 외로운 신학생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 목회자가 되어 동문 선교사님들을 섬기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해마다 광주에서 선교대회가 열려서 설교를 여러 번 하러 갔지만 올해는 우리 교회에서 하고 싶다고 해서 섬기게 된 것입니다. 저는 50대에 이미 국가조찬기도회 설교를 두 번이나 했고 교단 총회장과 연합기관 대표회장을 했지만, 앞으로 한국교회를 향해 더 많이 섬기려고 합니다. 물론 앞장서서 나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은밀하고 전략적으로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은 지방 신학교에서 독수리의 꿈을 꾸다가 해외로 가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분들을 섬기는 날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가 축사를 하고 교단 총회장(김종혁 목사)이 설교를 하십니다. 우리 모두 독수리의 꿈을 이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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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독수리는 참새와 같이 날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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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창조의 안식일’(창 2:1-3)
- 안식일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날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휴식하신 하나님의 안식은 훗날 모세에게 주신 제4계명인 안식일 제도의 근거가 되었습니다.(신 5:15)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안식”이 두 번 나오고 “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안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시고 이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로 회복이나 휴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가 담긴 것으로 안식일 제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도 신의 안식은 제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안식일 제정과 관계가 있는 것을 출애굽기 31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16-1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날에게 복을 주신 것은 일곱째 날이 유일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피조물에게 복을 주셨지 날 자체에 복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른 특별한 날입니다.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복 받는 길입니다. 거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을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의 분향단에서 첫 번째 향을 피우던 중 금지된 불을 사용해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거룩한 불이 아닌 속된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즉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해치는 일은 큰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것은 그날에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아 주님과 함께 안식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날에는 나그네도 과부도 고아도 집안에 있는 육축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출 20:8-11)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죽어 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 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마 12: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날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셨듯이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예배는 무척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나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시 40:5-8) 예배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의 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8장을 보면, 개구리 떼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삶은 죄를 회개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지 않았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죄를 짓고 살다가 회개 없이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면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예배는 합당한 예배, 즉 합리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요 4:23) 즉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발을 금하고, 오락을 금하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고 거룩하게 지키면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58:13-14)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즐거운 삶이 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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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창조의 안식일’(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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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셈, 함, 야벳
- 이번 주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은 국민일보 10월 1일 자에 게재되었던 소강석 목사의 성경 인물 시로 대체합니다. <작가 주> 셈, 함, 야벳 왜 그랬을까 포도주에 만취하여 벌거벗을 정도로 그를 혼미케 하였던 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가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고뇌인가 겉옷을 벗어 고개를 돌린 채 사실을 덮어 복의 문을 열었던 셈과 야벳 담요 한 장 덮어주지 못할망정 사실을 까발려서 오고 오는 세대에 저주의 문을 연 함 그대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는가 흉악하고 증오스러운 사실의 날카로운 칼날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고개를 돌려 겉옷으로 허물을 가려주는 따스한 침묵인가. 詩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해설 : 김종회 교수(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셈과 함과 야벳은 노아의 세 아들들이다.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을 정도로 혼미하여 잠들었다. 시인은 방주 사건 이후 살아남은 자의 슬픔 또는 고뇌로 그를 이해했다. 문제는 이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들의 태도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나신을 겉옷으로 덮고 함은 이를 ‘까발렸다.’ 노아가 깨어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두 아들을 축복하고 한 아들의 후손을 그 종으로 지명했다. 이 엄중한 경험칙은 오늘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또 세속적 삶에서나 매한가지다. 시인은 이 아들들의 두 가지 태도를 두고 ‘날카로운 칼날’과 ‘따스한 침묵’의 양자로 구분하여 묘사했다. 성경의 고색창연한 문면에서 만나는 여러 일화와 그 교훈이 지금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도 여전히 상존함을 적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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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셈, 함, 야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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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고전 11:1)
-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된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절; 빌 3:17)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절대로 교만이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자신의 신앙의 삶의 전체를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행위나 실천은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본받는 것은 육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고 날마다 죽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 죽지 않으면 본받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심중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고자 소원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을 보이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순종 온유와 희생과 겸손 섬김 용서에서 모범이 되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 세상을 본받아도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본받으려는 신자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유행과 관습과 쾌락을 따르고 명예 영광심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에녹은 사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 5:24). 노아 시대 역시 가인의 후손들의 악한 행실이 계속되고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창 6:5) 노아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할아버지 므두셀라로부터 증조할아버지 에녹에 대한 신앙교육을 받았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싹 트기 시작했고 증조할아버지 에녹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멸망당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땅엣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본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본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순종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깨뜨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성과 아집이 깨어지고 부스러져야 합니다.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합니다. 옥합의 딱딱한 껍질이 깨어질 때 향기를 발한 것처럼 육성과 고집이 깨어질 때 영적인 향기를 발하게 되고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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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고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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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의 걸작품 지구
- 저는 요 몇 주 동안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책들을 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와 절대 섭리를 알지 못하는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지구는 은하계와 초은하계에서 볼 때 점 하나에 불과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크기로 볼 때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의 환경과 세계로 볼 때는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김동찬 박사님이 쓴 ‘천문학적 관점에서 본 창조론’이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그는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지금은 미국 국립 전파천문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석학 중의 석학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구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천문학적으로 볼 때 지구에는 10가지 정도의 중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태양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서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기 때문에 지구에는 물이 존재하고 생물들이 살기에 적당한 온도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전축이 적당히 기울어져서 사계절이 존재하고 극심한 기상 이변이 없는 온화한 기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로 기울어지지 않고 90도로 기울어져 있다면 지구촌에는 극심한 더위와 추위만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구는 적당한 자전과 공전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24시간으로 낮과 밤이 12시간씩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8시간 내외로 일을 하고 8시간 정도는 여가생활을 하며 8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할 수 있게 아주 이상적인 시간 체제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는 너무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는 적당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구가 지금보다 반으로 작아진다면 지구의 질량은 8분의 1로 줄어들 것이고 지표면의 중력도 반으로 줄어들고 만다고 합니다. 공기가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뿐일까요? 지구에는 해로운 자외선을 걸러내는 방패막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는 우주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외선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걸러지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세포가 파괴되고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거대한 자기 방패막인 밴앨런 복사대(Van Allen radiation belt)라는 자기권을 형성하여 온갖 우주의 해로운 자외선을 막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외적으로 지구에는 큰 달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달이 조석 현상을 일으키고 밀물과 썰물을 발생시킵니다. 이 밀물과 썰물 때문에 플랑크톤과 산소를 공급하여 어류들이 살 수 있게 합니다. 특별히 지구는 진공청소기인 목성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가 지구는 판구조론에 의한 자동 온도 조절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적당한 크기의 에너지원인 태양을 가지고 있고 은하계의 중심으로부터 최적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를 통해 진화론을 철저히 부인하고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창세기에 근거하여 지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천명합니다. 이런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있어 주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김동찬 박사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과학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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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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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의 걸작품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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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걷는 한 절망이 없다
- 정말 올해만큼 더운 여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 생에 몇 년 동안 흘려야 할 땀을 올여름에 다 쏟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열대야 기후를 지닌 나라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회 때문에 가더라도 아예 에어컨을 틀어 놓고 호텔에서 방콕 하다가 돌아오죠. 그런데 올여름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정말이지 에어컨을 틀어 놓고 뭔 일을 해도 땀이 났습니다. 여름수련회 전후로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으면 제가 탈진을 겪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쉬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먼저는 기도와 성경 연구죠. 그런데 그 외에 멈추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산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산책이지 정말 산에 오르면 숨이 가쁠 뿐만 아니라 땀이 소낙비 내리듯이 흘러내립니다. 산을 오르다가 멈추어서 땀을 닦고 또 걸어가면 또 흐르고 또 땀을 닦고 어떨 때는 아예 벤치에 앉아서 땀이 다 식은 후에 또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50m, 100m만 걸어가면 또 땀이 줄줄줄 흘러내립니다. 그래서 동남아에 가서는 방콕을 하지만 여기서는 제가 방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산책은 저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산책은 꼭 해야 하지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금요일입니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오늘부터 비가 온 후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과연 그 말이 얼마나 맞을지 아직도 참 믿어지지가 않지만요. 10월이 가까이 오는데도 이런 찜통더위가 말이나 된단 말입니까? 그래도 저는 끊임없이 산책을 했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계속 산책을 하였습니다. 프랑스말로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도시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고 서서히 걷는 산책을 ‘플라느리(flanerie)’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플라느리를 즐기는 사람을 ‘플라뇌르(flaneur)’라고 합니다. 저 역시 플라뇌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산책을 하면서도 숨이 가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주여”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산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참 처량한 것 같았습니다. 아직 가을이 먼 것 같은데도 한 달 전부터 귀뚜라미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뚜라미가 한 달 전부터 노래했는데 언제 가을이 올까요. 언젠가는 오겠죠. 가을이 올 걸 생각하니까 찜통더위에 산책을 하는 것보다 단풍 옷을 입은 나무 사이를 걸을 생각에 맘이 설렙니다. 정말 가을이 오긴 오겠죠. 자크 레다가 말한 것처럼 “걷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걷는 자에게 절망이 없다면 오르는 자이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가을보다 더 좋은 계절이 있네요. 그 계절은 바로 ‘너라는 계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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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걷는 한 절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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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올바른 비판’(마 7:1-2)
- 사람이 살면서 남의 말을 빼면 별로 말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살면서 남 이야기 안하고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겁니다. 그런데 남의 말도 좋은 뜻으로 하기 보다는 비판하고 안 좋게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쉽게 남을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병폐를 바로 잡기 위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서 모든 비판을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7)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사실과 거짓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가 재판장 격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오래한 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허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심판하곤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일 많이 짓는 죄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잘못된 죄입니다. 흔히 우리 인간은 내 잘못은 못 보고 남의 잘못만 찾아내는 수가 많습니다(마 7:3-4 ; 롬 2:1). 우리는 남이 잘못할 때 비판하기에 앞서 내게는 저런 잘못이 없나 살펴보고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0:21). 남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삶은 반드시 자기도 가혹하게 비판을 받게 되고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처럼 심는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도 비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억울한 욕을 받으셨지만 같이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판단해주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했습니다(벧전 2:23). 모든 옳고 그른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시기에 우리가 조급하게 남을 비판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겠습니다(시 37:7-8). 아무래도 우리가 교만해질 때 다른 사람을 날카롭게 비판하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내 입에서 너무 날카로운 비판이 나올 때 내 영적 상태가 병들거나 잘못되지 않았나? 깊이 반성해 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갈 6:1). 비판하는 즐거움은 깊은 내면의 더 큰 즐거움을 빼앗아 간다는 서양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집어든 사람들처럼 남의 허물을 향해 돌을 집어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으려면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약 2:13).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하셨습니다(벧전 4:8). 우리는 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실수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흠밖에 없음.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거나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살피며 올바른 판단으로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고 건강한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화평을 이루는 일꾼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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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올바른 비판’(마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