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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관계의 중요성’(요 1:12-13)
-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삶은 곧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삶이 형성되기에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관계의 본질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관계가 행복과 성공과 영원을 결정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이웃과도 소통과 공감에 의한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가 잘 맺어 질 때 수평적 관계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늘 성실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어 나아가면(고후 7:1 ; 요일 1:6) 사람 관계도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묘사했음(시 23편). 그는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의 선장이 되려는 현대인들의 사상은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고 이기적인 신앙의 비극을 택하게 한 결과를 빚어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바라보며 실망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신뢰할 수 없으리만치 변화무쌍하여 예측할 수 상황에서도 온 땅을 다스리시며 스스로 계신 거룩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줄 모릅니다. 맞닿을 수없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자신의 인생과 관계있는 분으로 삼으며 실제로 하나님과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게 만드는 위대한 힘의 근원은 오직 믿음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일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오 생명과 축복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성패의 최대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수 1:5).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신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가면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묵상과 간절한 기도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현세와 내세에서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항상 부족해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물질을, 자녀를, 환경을, 그 어떤 문제를 더 크게 보거나 귀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믿음을 흔들기 위하여 쉬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세상의 파도와 믿음의 시련과 결핍 앞에서 자신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고 나아갈 때 성공된 인생을 사는 첫걸음이 시작되고 풍성함을 맛보며 힘과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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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관계의 중요성’(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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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쩔 수 없는 교회지기
- 댈러스에서 열린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섬기기 위해 참으로 오랜만에 주일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대신 홍윤기 목사님께 주일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주일 저녁에 집사람이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이번 설교에는 목사님이 갓생시리즈를 계속하시되 6.25와 관련된 예화를 삽입하여 영상으로 녹화해 놓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당장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에이, 그래도 그렇지, 내가 홍윤기 목사님께 모든 걸 맡겼는데 어떻게 그걸 번복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자꾸 저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기도해 보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제가 전화를 끊고 기도를 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성령의 깊은 감동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스트레스와 함께 저는 부랴부랴 설교 원고를 준비하였습니다. 제 목적은 메타버스처럼 제가 현장에서 설교하는 것같이 느껴지게 하는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녹화를 할 때에도 현장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영상을 찍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당일 현장에서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모습을 잘 편집하면 좋은 설교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죠.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방송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보는 분들은 영락없이 제가 현장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아니, 현장에 있는 분들도 그렇게 느껴지도록 욕심을 내보았습니다. 그래서 1, 2, 3, 4, 5부 예배 앞과 뒤는 별도로 녹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현장의 모습을 배합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편집하는 과정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감독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시간상 방송과 유튜브로 나갈 3부 예배를 중심으로 영상 편집을 감독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방송실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실시간 유튜브로 주일 1부 예배 설교를 듣다가 편집이 잘못된 걸 발견했습니다. 1부와 3부 설교의 첫 부분이 꼬여버린 것이죠. 그래서 당장 방송실에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니까, 방송실에서도 2부, 3부, 4부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다시 살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부터 신경이 바짝 예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늦은 밤까지 자지 않고 2부, 3부까지 다 모니터링을 하였습니다. 아니, 모든 예배를 다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약을 먹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홍 목사님께 “4부는 더 이상 참여를 못하니 알아서 예배를 잘 인도해 달라”고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든 지 40분도 안 되어서 다시 깼습니다. 그래서 4부 예배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니터링을 하였습니다. 4부 예배 현장에서 말씀에 집중을 하고 잘 듣는 젊은 형제, 자매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억지로 잠을 청하였는데 30~40분 지나서 또 깼습니다. 그래서 5부 예배 설교를 모니터링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방송과 유튜브에 나갈 편집본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이제는 진짜 자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예배 때 설교를 할 이재훈 목사님과 문자를 나누고 다시 약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요? 이재훈 목사님이 설교할 때 쯤에 다시 깬 겁니다. 그래서 이재훈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저녁예배가 끝나고 나니까 미국은 환한 아침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댈러스로 가는 비행기에서도 바로 옆자리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한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질러서 잠을 못 잤습니다. 다음날 저녁도 잠을 못 자고 행사를 하고 주일설교를 했으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제가 봐도 두 눈은 충혈 되고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주일설교를 마치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생각해 보니 제가 봐도 저는 어쩔 수 없는 교회지기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설교 녹화만 안하고 왔어도 이 정도까지는 신경을 안 썼을 텐데 점검을 하느라 너무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동행한 김종대, 이철휘, 서정열 장로님께서는 예비역 장군 입장에서 볼 때 “호국보훈의 달에 아직까지 이런 설교는 없었다”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긴 저도 생각해 보니 본문에 충실하면서도 6.25의 사례를 들어서 적용하는 이런 깊은 설교는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또한 해외에서 온라인으로 밤을 지새우며 저녁예배까지 함께 드린 것도 근래에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저는 다시 생각해 봐도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새에덴의 교회지기인것 같습니다. 더구나 저는 귀국하자마자 수요 오전 예배를 드리고 저녁에는 대명 비발디 콘도에 가서 3,500명이 모여든 전국장로회 부부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호텔 특실을 거부하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어쩔 수 없는 교회지기이기 때문이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저도 남은 생애를 어쩔 수 없는 교회지기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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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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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어쩔 수 없는 교회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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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정병준 박사(1963-)
- “호주장로회의 한국선교는 정당한 평가 받지 못해”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상과 한국선교’ 등 저술 서울에서 출생... 미국 프린스턴과 호주 멜버른대학원에서 연구 정병준(鄭丙準)은 1963년 3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줄곧 수도권에서 자랐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사회적 기업가로 알려진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와 또 같은 대학의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M.Div)를 받고, 같은 해 5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를 마친 후, 호주 멜버른신학대학원에서 "이분법을 넘어: 호주 장로교 선교사의 통전적 선교이해와 한국선교에 대한 공헌-1889-1942"이란 제목으로 신학박사 학위(Th.D)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과천교화 협동목사, 부천 하늘소망교회 개쳑 설교목사, 세계선교회 이사, 대한예수교장로회역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예장통합 교단의 서울장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등 학회 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한국교회 분열 현상에 대한 우려와 대안모색에 온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증주의적 에큐메니칼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역사관은 폭이 넓다. 호주 멜보른신학대학원에서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 역시 이같은 사관에서 작성된 글이기도 하다. 그의 전공분야는 한국교회사와 함께 선교역사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그의 주저로는 (1)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한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2) 한권으로 읽는 기독교 역사와 사상(2016), (3) 강신명 목사의 생애와 사상(2016), (4) 무학교회 60년사(2009), (5) 21C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2008 공저), (6) 한국기독교 탐구(2011 공저), (7) 대한예수교장로회 100년사(2015) 등이 있고, 외에도 10여권의 번역서가 있다.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해 향상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2007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출간했는데, 당시 연구소 소장 김흥수 박사가 간행사에서 밝힌 글을 여기에 인용함으로 정병준 박사의 사관을 엿보기로 하겠다. "이 책은 그동안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자들과 구분되며, 연구 방법이나 연구 범위에 있어서도 기존의 연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책은 연구 시기를 호주의 첫 선교사가 내한하누 1889년부터 선교상황의 악화로 호주선교사들이 철수하는 1942년까지의 비교적 긴 시기를 연구하고 있으며, 여섯 선교사들을 연구할 때는 젠다 연구(Gender Study) 관점을 적용하여 여성선교사들의 시각과 소리를 찾아내고 있다. 호주장로교 소속의 존 브라운 박사(Dr. John P. Brown)는 이 논문은 한국과 호주의 범위를 넘어서서 당시의 세계적인 사건들과 사회운동들, 그리고 세계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국제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성찰,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 1921년 뉴욕 국제선교대회,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 등을 통해 광범위한 콘테스트 안에서 호주선교부와 그 선교정책의 발전을 해석하고 있는 점이 두더러진다. 한국에서 미국장로교 선교부의 큰 규모와 광범위한 활동들에 대한 많은 책들이 기록되었다. 또한 미국에서 공부한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미국선교부들이 남긴 기록들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호주선교부의 기록들을 토대로 활동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가르쳤던 왕길지(Dr. Gelson Engel)와 권임함(Rev. Frank Cunningham), 그리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가르쳤던 거얼휴 의사(Dr. Bugh Curroll)와 마라연 의사(Dr. Charles Mclaren)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주로 경남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이 한국교회사 안에서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교회와 경남지역의 그리스도안들에게 커다란 손실이었다. 이런 면에서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의 연구 작업은 이러한 공백을 부분적으로 채워왔다. 이번에 학위 논문을 쓴 정 박사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호주장로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해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p.6 참조). 서울 중심의 역사이해가 경남을 중심한 호주선교 연구에 대한 방해 정병준 박사는 그의 책 서론에서 한국교회사를 논하면서 왜?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며 기술해야 할 구조를 제기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사 연구는 선교역사학자 라투레트(K.S. Latourete) 교수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제 한 후, 1927년에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를 비롯해, 그의 제자 민경배 박사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기술한 민족교회 사관을 선언한 1968년을 기점으로 1979년부터 민족주의적 사관이 과도하게 엘리트 중심이라고 비판하고 나선 한신대학교의 주재용 박사가 민중교회사를 간행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민중(民衆)의 역사관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부 신진 소장파 교회사가인 감신대학교의 이덕주 박사가 시도하는 토착교회의 역사관을 통해 역사를 기록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전통과 함께 토착 종교문화의 특별한 가치를 수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통과 토착문화 사이의 관계를 단절. 배척의 관계가 아니라, 연결. 완성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같은 견해는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을 수용. 해석. 적용하는 토착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에 무게를 두고 기술한다. 또한 이들은 피선교지의 정치. 사회적 상황뿐 아니라 토착종교와 문화적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사회정의와 해방의 문제와 함께 토착종교. 문화전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선교사적(宣敎史的),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민중주의적(民衆主義的) 관점을 넘어서서 한국토착문화를 교회사 연구에 수용하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사 연구에 어떤 접근 방법을 사용하던 간에 한국교회사 연구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보다 철저한 연구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기초를 놓은 일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사건들은 늘 새로운 분석과 해석을 동반한다. 역사는 해석이다 라는 말의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에 앞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 이루어 질 때 분석과 해석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호주장로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아닌가 분석해 본다. 첫째, 국내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가 미국선교사들에 편중되어 있다. 미국선교사들은 카나다와 호주선교사들보다 일찌기 한국에 왔고, 그 인력과 지원도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선교지역 또한 광범위했다. 게다가 한국교회 사가들의 많은 숫자가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들의 역사관과 사용한 역사 자료들도 미국 중심적이었다. 둘째, 서울 중심적인 역사이해가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경상남도(부산을 포함)에서 활동한 호주장로회에 대한 연구를 방해했다. 1950년-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의 민중들은 장기간의 독재로 고통을 겪었고,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발전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경험은 향토사 연구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셋째,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사이에 에큐메니칼 관계의 미성숙이 두 교회 사이에 학문적 교류를 방해하였다. 일제의 억압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한국에서 철수했던 호주선교사들의 일부가 1947년부터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다시 철수했고, 휴전으로 전후에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였다. 이외에도 호주장로회는 한국으로 새로운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미북장로회보다 카나다와 호주장로회 역사 연구 부진의 원인을 그는 이와같이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1977년에 이르러서는 호주장로교회는 감리교와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of Australia)로 발전하였다. 연합교회로 발전한 이후에도 선교사역은 계속되었다. 아쉽게도 이렇게 명맥은 유지되었으나 한국과 호주 두 교회 사이에 신학적. 인적 교류는 이민교회를 제외하고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일로 남아 있다. (정병준, 같은 책 pp.16-18). 호주기독교는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정병준 박사는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이 무엇을(What)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는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을 복음주의 에큐메니칼의 특성을 지닌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그들의 통전적 선교이해와 형성과정을 연구하고, 그들이 1889년부터 1942년 어간 자신들의 신학사상에 근거해서 한국에서 수행한 선교정책과 선교활동을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 후 첫째,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어떻게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기독교에 도달하였는가? 둘째,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은 선교를 위해 그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유산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셋째, 그들의 선교정책과 선교활동 안에서 발견되는 선교사상은 무엇인가? 넷째, 그들은 한국에서 어떠한 종류의 신학적 이분법들을 극복했고, 어떻게 극복했는가? 다섯째, 호주장로회는 한국에서 무슨 결과를 얻었는가?이다. 그래서 그는 연구 시기를 헨리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가 한국선교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일제에 의해 추방된 마지막 5명의 호주선교사들이 멜버른에 귀국하는 싯점을 끝으로 삼고 있다. 이 기간 총 78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섬겼다. 이 시기는 일제의 통치기간(1910-1945)과 호주기독교 해외선교의 전성기와 겹쳐 있지만, 이 시기는 호주장로회의 초기 한국사역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시기로 규정한다. 그는 또 어떻게(How)라는 명제를 제시해 자신의 연구를 진술하고 있다. 즉 문헌연구(文獻硏究)에 근거한 사회역사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선교잡지, 공식보고서, 선교자료, 선교사 일기, 편지, 인터뷰를 통해 얻어진 자료들을 분석해서 선교사들의 사상과 선교정책의 유형과 특성을 일반화 하는 귀납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그러나 증거를 찾아내는 과정은 연구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연역적 과정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역사연구는 엄밀하게 연역과 귀납적 방법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의 연구가 지닌 특징 중 하나는 호주선교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본국 선교본부와 선교사들 사이의 관계, 선교사들의 사회적 계층, 그들의 집단적인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효과적이고, 특별히 이 시도는 그들이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케 해주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들은 선교사 개인과 그들의 사역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류대영 박사 같은 이는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미국종교사의 탈식민지주의 관점에서 그들의 중산층적 성격을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야 말로 한국선교사(史) 연구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공했다고 보여진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선교사에 대한 연구는 그 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세부 단원들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론적 존재론적 접근을 요청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석들이 필요하게 된다. 호주선교사들은 이런 종교문화적인 환경속에서 은둔의 세계 속에 잠들어 있었던 한국에 와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유산을 통해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를 증거하였다. 호주선교사들의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기독교와 한국 경상남도 현장과의 만남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만남의 작용에서 선교사들의 통전적 선교이해가 더욱 깊어졌다고 보여지기도 하다. 정 박사는 그의 글 마지막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호주장로회 선교사역의 열매보다는 호주장로교회의 역사적 뿌리의 신학이 무엇인가에 강조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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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규 목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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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규 박사의 한국교회사가 열전] 정병준 박사(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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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의사가 필요한 것은 환자가 있기 때문이다
- 그동안 정부의 의대생 증원 문제로 촉발된 의료 대란은 더 악화된 새로운 국면을 만나게 되었다. 서울대 의대 산하의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보라매병원, 강남 센터 등 4개 병원의 상당수 의사들이 17일 ‘무기한 집단 휴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병원들에서 휴진에 동참한 의료진은 967명 가운데 54.7%인 529명이다. 그러면서 ‘진료를 미뤄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환자의 외래진료와 수술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한다. 진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미뤄도 되고, 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제때 수술을 받지 못했는데 영향을 받지 아니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말은 이제 서울대 의대 산하의 의사들은 없어도 된다는 것인가? 전공의들의 집단 사표와 의대 교수들의 강의 거부,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 거기에다 의대생 학부모들까지 나서서 서울대 의대 교수들에게 환자가 불편해도 강력한 행동을 하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이는 ‘환자 죽이기’에 나선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정부가 펼치려는 정책에 대하여 당사자들인 의사들도 자기들의 의견을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또 직업 선택의 자유도 있다. 그런데 서울대 의대는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올 한해에만 6,000여 억원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서울대 의대는 사립병원이 아니다. 서울대 병원은 국유재산의 무상 양여, 출연금 지급, 적자 보조 등 다양한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고 있다. 그런데도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무기한 휴진을 해도 되는 것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나면, 그것도 위급한 환자들을 볼모로 자신들의 주장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더 이상 의사라고 말할 수 없다. 이제라도 서울대 의료진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기 바란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장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과 울부짖음 가운데 있는 환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기 바란다. ‘의사 불패’는 정치적 집단 행동을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지키는 의사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환자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의사로서의 소명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의료 대란 가운데에서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의료진이 있다. 그분들에게 새삼스럽게 고마움과 존경을 표한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목소리 큰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목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편할까봐 자신을 희생하여 낮추고, 자기의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내일 18일로 대한의사협회도 대대적인 휴진을 예고하고 있는데, 당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병원이며, 환자곁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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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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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의사가 필요한 것은 환자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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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외국인 연간 비자 발급 35,000명은 지나치다
- 정부는 지난 해 9월부터 ‘숙련기능인력 3만 5천명 혁신적 확대방안’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책은 무분별한 이슬람 인구의 유입과 그들에 의한 테러 등 잠재적 위험 요소가 상당하며, 이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국내의 부족한 노동 인력을 늘리기 위하여 외국인에 대한 인력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일견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외국인이 단순 노무 인력으로 왔다가 4년 이상 거주하고, 기업체로부터 추천을 받으면 숙련기능인력 비자(E-7-4)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연간 2,000명 이내였던 것을 이제는 자그만치 20배 가까이 대폭 늘려 35,000명으로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이 이 비자를 받으면 배우자 및 미성년 자녀까지 불러들여 한국 내 체류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외국인들로 넘쳐나게 될 것이고, 특히 이슬람권에서 대거 몰려오는 무슬림으로 인하여 심각한 안보, 치안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유럽의 경우를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유럽은 이미 이슬람으로 인하여 ‘다문화 정책’이 실패하였다고 선포했다. 전 세계에서 이슬람에 의한 테러 사건은 너무나도 끔찍하다. 미국에서는 2001년 9.11 무역센터 공격은 전대미문의 테러로 2,977명이 사망하였고, 25,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02년 10월 발리에서 테러가 발생하여 202명이 사망하고, 209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스페인에서는 2004년 3월 마드리드에서 열차에 폭탄 테러를 가하여 사망 191명, 부상 2,000명의 희생을 내었다. 영국에서는 2005년 7월 런던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있어, 사망 65명, 부상 700명을 내었다. 인도에서는 2008년 11월 뭄바이 호텔 등 6곳에 동시 테러를 가하여 188명이 사망하고 29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프랑스에서는 2015년 1월 주간지 ‘샤를리 에브드’ 본사에 총기를 난사하여 사망 12명, 부상 10명을 기록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파리 시내 6곳을 동시다발적으로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켜 127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2016년 7월에는 니스에서 트럭 테러를 일으켜 사망 86명, 부상 458명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2020년 10월에는 중학교 교사를 참수하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태국에서는 2004년부터 2020년까지 남부의 3개주에서 21,383건의 이슬람에 의한 테러가 발생하여 사망 7,320명, 부상 13,596명을 내었다. 또 군, 경찰, 공무원에 대한 테러도 수차례 있었다. 일본에서도 1991년 7월 무함마드를 비판한 소설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이라가시 히토시 교수가 츠쿠바 대학 내에서 흉기에 목이 찔려 피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2016년 말뫼지역에서 이슬람 청년 수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지역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또 2018년 1월 스톡홀롬 중심부에서는 한 여성이 이슬람 출신 다수의 남성들에 의하여 집단 성폭행을 당하여 국가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독일에서는 2015년 12월 31일 쾰른의 중앙역과 대성당 인근에서 수백 명의 여성들이 집단 성폭행, 성추행, 강도 등 하루에 1,200건의 사고가 났는데, 이슬람 출신 1,000여명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로 밝혀졌다. 영국에서는 1997년부터 2013년 사이에 로더럼 지역에서 발생한 아동 성 학대, 납치, 강간, 성 매매 강요 등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파키스탄 출신 사람들에 의하여 저질러졌다. 이때 1,400명의 소녀들이 피해를 입었다. 또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옥스퍼드 지역에서 발생한 아동 성 학대, 납치, 강간, 성매매 강요 등으로 300여명이 피해를 입었는데, 가해자들은 파키스탄과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이슬람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그러다보니 각국에서는 이슬람을 억제하는 정책과 법률을 제정하기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2021년 2월 ‘프랑스 공화국의 원칙에 대한 존중을 강화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는데, 이슬람 급진주의에 대한 규제를 담고 있다. 독일에서는 2021년 5월 모스크에 유입되는 자금 보고 의무와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국가 예방 프로그램을 확대하도록 하였다. 덴마크는 2018년 범죄율이 높은 지역에 ‘비서구인’ 비율을 제한하는 ‘게토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뿐만이 아니라, 2021년 3월에는 ‘모스크에 대한 외국 자금 조달을 금지하는 법안’을 의회가 승인하였다. 스위스도 2021년 3월 이슬람의 테러방지를 위한 헌법 개정과 각종 범죄에 사용하는 얼굴을 가리는 복장을 공공장소에서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불가리아, 라트비아 등이 ‘부르카 착용 금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이슬람에 의한 테러와 폭력, 강간과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들에 대하여 세계 각국은 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한국은 느닷없이 외국인 노동자를 늘리고, 그들에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비자를 발급해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보인다. 현재 한국 정부가 고용허가제를 선정한 국가는 17개국인데, 그 중에 이슬람 국가는 방글라데시, 키르기스스탄,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 출신은 처음부터 빼든지, 아예 이들에게는 비자를 주지 않는 것과 함께, 철저하게 인력 감시를 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슬람 국가 출신은 3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가 부족한 고용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지금 유럽 국가들이 과거 이슬람 지역에서 고용 인력을 대거 받아들이고, 또 지난 수년 사이에 난민들을 영입한 결과,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변하기 어렵다. 그들이 가진 종교와 정치 일체의 정체성과 종교적 신념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언발을 녹이는 방식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고, 장래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슬람 지역 사람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불법 체류자는 철저히 관리하여, 한국이 이슬람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정부는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이슬람 사람들을 끌어드리는 정책을 펴지 말아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를 갖기 바란다. 정치권에서도 치졸한 자기 범죄 감싸기와 영구히 정권 유지를 위한 일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국민의 행복과 안전, 국가의 장래와 발전을 도모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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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외국인 연간 비자 발급 35,000명은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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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3법 개정으로 언론 장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제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지난 5월 31일, 소위 ‘방송3법개정안’이 입법 발의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9명이 공동 발의하여 올린 ‘방송법일부개정법률안’과 또 같은 날 역시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9명이 공동 발의하여 올린 ‘언론중재및피해구제등에관한법률일부개정안’과 역시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9명이 찬동하여 올린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일부개정법률안’이 동시에 올라온 것이다. 이 법안들은 제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되고 통과된 것이었으나,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폐지된 것이다. 그런데 제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똑같은 법안을 야당 의원들이 대거 올린 것이다. 입법 발의 이유로는 ‘공적 책임을 위해서 각 방송사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운영을 통해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방송사의 이사들을 현재 9~11명인 것을 자기편이 되는 인사들로 각각 21명으로 늘이는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이 법안은 학계, 시청자, 방송계 종사자, 단체 등에 이사 추천권을 대폭적으로 주자는 것인데, 그들이 결국은 친야권 인사들로 채워져, 사실상은 더불어민주당이 방송을 영구히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말로는 방송사의 공적 책임 구현과 독립성, 정치적 중립과 합리적 운영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언론장악이라는 악마 같은 디테일을 숨겨놓았다’는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이 상당히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원(이하 방문진) 이사진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방문진은 MBC 사장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올해 8월이면 방문진 이사진의 임기 만료가 된다. 현재 방문진 이사는 2021년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임명한 사람들인데, 방문진 이사 구성은 대략 여당 추천 6명과 야당 추천 3명으로 구성되므로, 이번에 여당 몫의 이사진이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본다. 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현재 방송통신위원장을 탄핵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데, 거대 야당이 탄핵을 소추하면 막을 방법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장이 탄핵소추되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직무가 정지되고, 방통위의 전반적인 활동이 중단되어, MBC 사장의 교체를 막겠다는 심산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언론중재및피해구제.....’에 관한 법률 개정 내용도 언론의 보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정정 보도와 반론 보도를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을 3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고, 언론 보도로 인한 인격권이 침해된 경우, 손해액의 3배라는 징벌적 조항을 넣고 있다. 물론 언론의 악의적 보도에 의한 피해를 구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를 지나치게 하다 보면 언론에 엄청난 압박을 주게 되는 것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이 법안이 발의되었을 때에도 국내는 물론, 유엔과 국제언론인협회 등에서 ‘자유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들 법안’이라고 맹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야당은 같은 편으로 여겼던 언론에 강한 압력을 넣으려는 것일까? 한 마디로 비리 정치인을 언론 보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언론 노조 등 막강한 권력들이 야당과 맥을 같이 해 왔는데, 그마저도 언론의 비판과 보도 기능에 더 단단한 족쇄를 채우려는 것은 아닌가. 이래서는 안 된다. 야당은 소위 ‘방송3법’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원하는만큼의 권력 유지와 제한을 두려고 하는데, 이는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그야말로 무제한의 권력을 누리는 정치권을 변화시키고, 견제하는 세력이 있어야 함을 원한다. 그것이 언론인데, 입법 권력을 가진 초거대 야당이 힘의 논리로 ‘방송법’을 바꾸려는 것은 횡포이다. 아무리 정치 권력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정권을 유지해 보려고 해도, 국민들은 얼마든지 정권을 갈아치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자신들이 빠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은 더불어민주당이 서슬퍼렇게 보여도, 결국 국민들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제22대 국회도 개원되고, 국민의 대표로 세움 받은 국회의원들이 이제는 대결과 파행과 악법을 만드는 일들을 중지하고, 정말 국민들을 위한 ‘민생법안’을 만드는데 주력하기 바란다. 우리 국민들은 ‘한풀이’하듯 엉뚱한데 힘을 소진하는 국회를 응원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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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3법 개정으로 언론 장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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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가정의 소중함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래서인지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이 있다. 가정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남음이 없다. 가정은 우리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이며, 국가를 형성하는 근간이 된다. 사람들은 가정을 통하여 사랑을 알고, 혈연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가족끼리 서로 돕고 이타심을 배우는 곳이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면 국가 전체가 병들게 된다. 뿐만이 아니라, 가정은 자녀를 낳고 길러 사회와 국가에 소중한 인력자원을 배출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소중함은 누구라도 지켜야 한다. 성경에서도 가장 먼저 가정이 이루어졌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 의한 가정이 이루어졌고, 그들을 통하여 인류가 생겨나고,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다. 이런 가정을 허물려는 시도와 세력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의 말씀대로 가정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는데, 이를 근본적으로 깨트리고 허무는 동성애를 위한 온갖 제도와 법률이 만들어지려고 한다. 동성애의 존재나 그들의 실체를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을 위해 건강한 가정과 국민들을 역차별하면서까지 보호하거나, 반대 의견을 강력하게 처별하려는 행위는 매우 악한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 어느 재벌의 이혼 소송이 있었는데, 언론에서는 ‘1조 3,800억짜리 이혼’이라며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 내용에 보면 항소심 선고에서 담당 판사가 ‘부정행위에 대해 전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재벌총수를 질타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혼인의 순결과 가정의 소중함, 일부일처제의 질서를 깨는 것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 근간이 되는 가정들이 지켜질 수 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본능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 가정의 가치를 지키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에 이혼 당사자가 된 재벌 기업인은 우리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지도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느낄 때에도 부끄러움이나 반성이 없었다면, 사회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모두 지도자는 아니다. 적어도 국민들이 볼 때에 모든 욕심을 자제하고 모범이 될 때, 사람들을 그를 인정하고 존경할만한 지도자로 여기는 것이다. 한 지도자의 도덕성이 결국은 그 기업의 운영과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가치는 재화나 물질로도 계산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국민들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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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가정의 소중함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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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팬데믹 조약’을 세계보건기구와 맺는 것은 위험하다
- 우리는 지난 2020년부터 약 3년 반동안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었다. 이 질병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자연 발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전문가에 의해서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팬데믹 현상이 다시 왔을 때,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WHO(세계보건기구)와 이에 가입된 국가들이 ‘팬데믹 조약’(pandemic treaty)을 맺는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 회원국은 194개국인데, 이들과 조약을 맺어 세계보건기구가 해당 국가나 정부보다 보건정책의 통제권을 우선적으로 갖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개별 국가의 방역정책 결정권은 박탈된다. 또 백신 여권(旅券)과 같은 것으로 세계 기구에 의해 세계인의 활동이 통제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언론도 이에 반하는 보도를 할 수 없는 등, 그야말로 국가의 주권이 고스란히 침해당하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코로나19때 접종한 백신들은 안전했는가? 긴급하게 제약회사들이 특혜를 받아 백신을 만들어 세계인들이 접종했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백신을 만드는 방식은 mRNA로, 스파이크 단백질 유전정보 자체를 집어넣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안정성을 장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미국 CDC(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가 2018년에는 코로나19백신에 대하여 ‘면역을 생성하게 한다’고 했다가, 2021년에는 ‘면역을 보호한다’로 바꾼 것에서도 백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19와 같은 심각한 질병이 번졌을 때, 그에 대한 대처도 중요하지만, 백신 처방이 적절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또 이런 팬데믹을 일으킨 질병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사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 백신으로 질병을 얻거나 혹은 장애를 얻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인 것으로 알려진다. 거기에다 팬데믹 상황이 인위적인 것이라는 소문도 사실에 근접하고 있다. 지난 4월 16일, 미국 청문회에서는 과학잡지 발행인 홀든 소프 박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이론을 무시한 것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으나, 유독 코로나 백신을 만든 회사들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다. 코로나 백신을 만든 회사들은 존슨앤존슨, 아스트라제네카, 노바백스, 화이자, 사노피, 모더나, 시노백 등이 있다. 그중에 화이자 같은 경우는 2021년 백신 관련 매출이 335억 유로(한화 38조 6,500억원)이고, 바이오엔테크 백신 매출은 159억 유로(한화 21조원)에 이르며, 모더나의 2021년 매출 목표가 192억 유로(한화 22조원)가 될 정도였다. 한국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하여 환자 치료비, 진단검사비, 감염관리비 등으로 7조 6천억원을 사용하였다. 또 코로나19백신 구입비만도 7조원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 전 세계가 부담한 경제적 수치를 합하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앞으로도 팬데믹을 가져올 가상의 질병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질병X’(Disease X)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5월 27일부터 6월 1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세계보건총회(the World Health Assembly)에서는 세계보건기구의 ‘팬데믹 조약’에 대한 것을 다룬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팬데믹 조약이 세계보건기구와 각 국가들 사이에 이뤄질 경우, 각국의 주권이 침해를 당하는 것은 피할 길이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국, 일본, 캐나다, 영국, 호주, 슬로바키아 등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입장이 없다. 지난 4월 WHO에서는 앞으로 변종 독감 바이러스(H5N1)가 올 수 있는데, 이때 인간의 치사율은 52%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가 앞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팬데믹’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만약에 인위적인 것으로 질병을 퍼트려 이에 따라 백신들을 만들어 내야 하고, 제약 회사들이 백신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를 통해 세계를 통제하려는 세력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강한 의구심이 든다. 코로나19 당시에 한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것은 교회이다. 당시 문재인 정권은 2020년 7월부터 모든 교회에 대하여 소위 ‘비대면 예배’를 강제화하여, 그로 인해서 수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도 그로 인한 피해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19 때에 한국 정부가 무조건적으로, 반기독교적으로 예배 중단을 강행했던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 정부가 보건으로 막강한 힘을 얻게 될 세계보건기구와 함부로 ‘팬데믹 조약’을 맺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도 강제로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빼앗아갈 사안들에 대하여 안일한 인식을 버려야 한다. 이에 대하여 한국의 연합 단체들과 그에 속한 교단들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비해야 한다. 지난 2020년에 중국 우한으로부터 닥쳐왔던 코로나19 앞에서, 한국교회는 귀중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를 앞에 두고서도 우왕좌왕했던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 교계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부의 예배 제한과 금지에 대하여 무책임한 발언들을 쏟아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국가와 국제 사회의 ‘질병 X’를 다루는 문제에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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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팬데믹 조약’을 세계보건기구와 맺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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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5). 며칠 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귀한 믿음을 남기시고 가셨다네” 이 말이 저에게는 퍽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들어 부모님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요셉은 큰 권력과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이나, 땅이나, 재물에 대하여 자손들에게 말하는 대신에 가나안 땅으로 그의 해골을 가져갈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체를 귀중히 여겨서 한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은 잠시 머무를 곳이며, 그들이 반드시 가야할 곳은 가나안 땅이다.”라는 점이었습니다. 430년 후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 당시 요셉의 시체를 취하였습니다(출13:19). 그리고 40년 동안 운구하면서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수24:32). 요셉이 형님들에게 팔려 나갔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신앙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3년 후, 그는 신앙 외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자녀들에게 상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겠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매우 잘 경외한 왕이었습니다(대하17:6). 그러나 그가 자녀를 신앙으로 잘 양육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들 여호람의 아내를 맞이하는데 이세벨을 모친으로, 아합을 부친으로 둔 아달랴를 택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여호사밧 왕의 손자 아하시야왕이 예후에 의하여 죽자 아달랴는 왕의 씨를 거의 전멸하다시피 합니다(왕하11:1). 여호사밧왕은 여호람 외에도 생전에 여섯명의 아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롭게 하여 장자인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금은 보화와 유다의 성읍들을 많이 물려주어 그들사이에 다툼이 없도록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왕인 여호람이 동생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는 동생들이 차지한 성읍들과 금은보화가 탐이났던 모양입니다. 여호사밧이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지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못한 결과입니다(대하21:1~4). 자녀들에게 무엇을 상속하시려고 애쓰십니까? 집입니까?직업입니까? 금은 보화입니까? 하나님 경외하기를 심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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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강성률 목사의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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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께 영광, 성도들에게 감사”
- 몇 주 전에 우리 교회 평개원(평신도사역개발원)간사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거의 준전도사급입니다. 월급을 받지 않으면서 매일 출근하여 사역을 하고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모임이 끝나고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아주 작고 초라한 모습의 내가 담임목사님의 축복이 흘러가는 사역에 함께 동역할 수 있다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버하지 말고 목사님이 은혜로 이루어놓으신 사역의 길에 누가 되지 않는 사명자가 되게 해달라고 눈물로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담임목사님을 영적 롤모델로 더 존경하고 도전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하략)” “목사님의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는 선포가 평개원 각 사람에게 촉촉한 단비처럼 내렸습니다. 새에덴의 새부흥을 이끌며 대체 불가한 린치핀이 되라는 목사님의 말씀은 성령의 불처럼 우리에게 뜨겁게 임했습니다. 목 놓아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세계 장자교회의 역할을 하는 새에덴교회를 만나게 됐는지... 존경하고 사랑하는 목사님을 만나 이 귀한 사역에 쓰임 받게 됐는지... 하나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하략)” 저는 이런 문자를 받고 너무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평개원 뿐이겠습니까? 거의 모든 교구가 다 이렇게 헌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요일까지 계속 헌신기도를 하고 또 심방을 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이런 심방만 하는 게 아니라 격달로 한 번씩 ‘사랑이를 위한 심방’을 합니다. 정말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찾아가서 구제비를 드리고 기도를 해 드리는 심방입니다. 메디컬처치의 이재훈 목사님께서 동행하셔서 함께 기도하고 의료봉사도 해 주십니다. 그런데 아직 남아 있는 일이 있는데, 6월 23일 주일저녁에 열리는 보훈음악회입니다. 지상작전사령부의 군악대가 직접 와서 연주를 할 뿐만 아니라 가수 남진, 김의영, 정미애, 테너 박주옥, 소프라노 서선영, 국악가수 오선지 등 최고의 출연진들이 나와서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가요와 가곡, 판소리 등을 열창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최고의 보훈음악회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 교회 행사가 정말 잔잔한 파도의 영향력을 확장시켜가고 있습니다. 18년째 이어온 참전용사 초청행사 소식을 모든 일간지들이 도배를 하다시피 하고 또 TV조선 뉴스퍼레이드까지 출연하여 인터뷰를 했지 않습니까? 혹자에 의하면 지상파 방송 50분 다큐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교회연합신문의 차진태 기자는 ‘새에덴교회 향한 사회적 관심에 한국교회 신뢰도 동반 상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 18년을 이어온 새에덴교회의 진심이 만들어 낸 가장 최고의 가치가 있으니, 바로 '신뢰의 회복'이다. 빠르게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의 처참한 현실과 사람들의 외면 속에 새에덴교회는 교회 본연의 공익적 사명을 200% 수행함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다시 되돌아보게끔 했다. (중략) 오늘날 위기를 부르짖는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신뢰의 부재'로 귀결된다. 더이상 교회의 경건함을 믿지 않고, 목회자의 도덕에 기대치 않는 현실은 교회와 목회자 스스로가 만들어 낸 오늘날 한국교회의 냉철한 단면이다. 더욱이 좌우, 빨강과 파랑에 극도로 함몰된 일부 교회의 모습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정치 집단으로 까지 비춰졌다. 그런 상황에 언론들을 사로잡은 새에덴교회의 소식은 국민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전도의 문을 여는 확실한 반전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새에덴교회를 향한 사회적 관심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기독교 이미지 상승효과와 광고효과를 동반한다.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를 휩쓴 가수 싸이의 연말 뉴욕스퀘어 공연이 문화 강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듯, 새에덴교회의 보은행사는 한국교회 전체의 이미지 재고로 이어지고 있다. (중략) 18년째 이어오고 있는 참전용사들에 대한 새에덴교회의 헌신이 무너져가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저는 이 기사를 보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한 명의 기자뿐만 아니라 많은 언론 매체가 정말 도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걸 수많은 국민이 봤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자긍심 있는 마음으로 출국을 했고 미국에 가서 눈물겨운 보훈행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일저녁에는 정말 어느 교회,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 보훈음악회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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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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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하나님께 영광, 성도들에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