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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 우리 교회는 신년이면 신년축복성회를 하고 또 여름에는 장년여름수련회를 해 왔습니다. 코로나 기간에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올해는 아주 특별한 여름수련회입니다. 오크벨리와 교회에서 이원화로 진행하거든요. 순장 모임인 ‘새순이 나르샤’에서 교회에서 수련회를 하자고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작년에 교회에서 본당을 가득 채우며 여름수련회를 했거든요. 그런데 2022년도에 수련회를 끝내고 미리 계약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 계약을 연장하여 작년에는 교회에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걸 해약을 하면 계약금 외에 1억을 위약금으로 물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억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올해는 이원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오크벨리에 참석하는 인원보다 교회에 참석하는 인원이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쉬움 반, 기대 반이죠. 물론 교회에 참석한 인원이 오크벨리에 다 오신다고 하더라도 공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자리, 한 장소에서 함께 은혜받는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요. 그래서 내년에는 교회에서 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원화로 하다 보니까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아쉬움 반, 기대 반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다른 해에도 설교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죠. 그런데 올해는 정말 더 많은 진액을 쏟았거든요.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가 한창 중일 때 저는 ‘요나 업고 튀어’라는 주제를 정해놓고 말씀 속에 있는 보화와 진리를 얼마나 캐고 또 캐냈는지 모릅니다. 내년에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준비해서 어떻게 전달할지 걱정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원화로 하려고 하니까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아쉬움 반, 기대 반의 마음이 큽니다. 현장에 참석을 하시든 교회에서 영상으로 함께 하시든 말씀의 은혜가 참 시원한 생수처럼 쏟아질 것입니다. 현장에 오신 분들이 어찌 수련회에 참석을 안 하시겠습니까마는, 어쩔 수 없이 못 오신 분들도 교회에 꼭 참석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이 글을 쓰는 밤에도 산들바람이 불어와 창가에 산들산들 들어옵니다. 그 바람이 제 마음을 더 긴장과 설렘의 숲길 사이를 걷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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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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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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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무분별한 ‘탄핵’의 부메랑 효과’
- 더불어민주당은 현 정부에서 임명된 방송통신위원장 3명 전원을 탄핵 대상에 올리며 정부 여당과의 공영방송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야당이 8월 1일 공동발의한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소추안은 그의 위원장 임명 하루 만에 시작된 것으로 2일 표결에서 가결했다. 앞서 발의됐던 이동관·김홍일 전 위원장, 이상인 전 위원장(직)은 표결 전 자진해서 사퇴했다. 이로써 방송·통신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방통위는 ‘식물 조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들어 이진숙 위원장을 포함해 탄핵 대상 인사는 14명(18건)으로, 이상민 장관과 방통위원장·방통위 직무대행 등 4명, 검사 9명이었다(검사 2명 자진철회). 이 정도면 ‘습관성 탄핵중독증’이다. 그리고 탄핵의 종착지는 대통령이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헌재로부터 단 한건도 인용받지 못함에도 계속되는 야당의 무분멸한 탄핵시도는 다분히 계산된 정치 공세로 볼 수 밖에 없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당연히 예상되는 법안들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여 지금까지 15번의 거부권을 유도한 것 역시, 이를 미리 염두에 둔 야당의 의도적 도발로 보는 것이 국민적 정서이다. 당연히 국회 입법권을 무시한다는 야당의 주장이 힘을 잃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탄핵은 당사자가 헌법에 준하는 확인된 중대한 범죄를 근거로 입법부가 국민적 심판을 가하는 일종의 헌법적 강제 기능이다. 그러므로 탄핵 시도는 매우 신중하고 진지해야 하며, 마지막 불가피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의 발의한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된 경우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복하는 것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에게 탄핵 만큼 위협적인 수단도 없다. 탄핵은 해당자들을 압박하여 민주당에 불리한 결정이나 조치를 하지 못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탄핵에 대해 그 어떤 공직자도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국민적 동의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야당의 탄핵 시도는 지지자들의 이탈 방지와 결집을 위한 무리한 시도일 뿐이다. 아직 멀리 있는 총선에 지금 국민적 우려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현실적으로 지지층 결집이 필요한 야당에게서는 마치 마약과 같은 내성과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무분별한 대통령의 거부권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지금의 거부권 행사는 마치 야당이 그렇게 하라고 유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뻔히 거부권 행사를 예상하면서도 강행하는 것은 잦은 거부권 행사에 대한 반발심리가 무분별한 탄핵의 부당함을 가려 줄 것이고, 거부권을 집중 공격함으로 탄핵 시도에 대한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탄핵으로 굳이 당사자를 그 자리에서 내쫒지 않더라도, 야당에 불리한 행정, 수사, 판결, 조치하는 공직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직면한 야당으로서는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탄핵 카드는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야당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탄핵에서 돌아온 그들의 가지게 될 반발과 무분별한 탄핵을 바라보는 국민적 정서이다. 계속된 탄핵은 대상 기관의 집단 반발과 순수성을 의심한 국민적 저항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탄핵의 부메랑 효과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크다. 여야 정치세력이 연대하여 성공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효과는 보수정권의 궤멸과 대적 불가한 진보정권의 탄생을 가져왔다. 반면 한나라당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실패는 그 다음 총선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가져왔다. 그 만큼 탄핵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느 한 축은 거의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이런 경험들이 탄핵을 전가의 보도로 여기는 정치판이 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그 탄핵의 부메랑 효과를 고대하고 있다. 이런 정치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입법 폭주와 이에 맞서는 거부권의 쳇바퀴 돌기, 이런 정치에는 진실이 없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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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택시사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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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프리즘] 임성택 교수의 ‘무분별한 ‘탄핵’의 부메랑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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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영적·종교적으로 더 피폐해진 파리 올림픽
- 지난 26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는 제33회 ‘파리올림픽’이 열렸다. 전 세계 206개국에서 10,500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32개 종목에서 329개 경기가 열리는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이다. 이번 올림픽은 8월 11일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세계인의 축제에서 기독교를 한껏 모독한 장면들이 나와 기독교계를 분노하게 하여, 저질 올림픽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작품이 선보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분장한 뚱뚱한 드래그퀸(여장 남자)을 등장시켰고, 주위에도 비슷한 인물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남자, 여자, 동성애자가 도서관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듯, 한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도 연출하였다. 파리 올림픽은 다양한 성 정체성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포용성을 앞세워 ‘열린올림픽’을 표방하지만, 수 많은 세계인들이 믿는 기독교를 가장 저질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열린 시각인지 묻고자 한다. 전 세계에 25억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이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부정하는 것이 열린 자세인가? 이번 파리 올림픽은 심각하게 기독교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피폐하여, 볼품없는 올림픽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 밖에도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오륜기를 거꾸로 건다든지, 공연에서 프랑스 마지막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가 잘린 모습을 무대에 등장시키고, 헤비메탈 음악과 함께,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를 연상하는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폭력적인 방법이 어찌 평화를 지향하는 올림픽과 매치 된다는 것인가? 거기에다 거의 나체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어 그 장면은 여러 나라에 송출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막식에서 한국을 북한으로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펜싱 부분 금메달리스트인 오상욱 선수를 오상구로 표기하는 등 상식 이하의 모습들이 파리 올림픽에서 드러나고 있다. 세계인의 화합과 만남과 새로운 기록과 승리의 순간을 위해, 그리고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한 모든 선수들을 위로하는 것이 올림픽이다. 또한 세계인들이 스포츠 정신을 통하여, 건강한 삶과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를 더하는 것이 올림픽이다. 그러나 이번 제33회 파리 올림픽처럼 전 세계인 가운데 1/3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를 모독하고, 결과적으로 부정하여,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필요 없다’는 식의 스포츠 행사는 올림픽에 대한 거부감만 커질 뿐이다. 동성애는 우대하고, 기독교는 박대하는가? 파리 올림픽 관계자들과 세계올림픽위원회는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대표적 단체들도 이 점에 대하여 올림픽위원회에 강력히 항의하여, 다시는 이런 악행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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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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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영적·종교적으로 더 피폐해진 파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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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해석이 잘못 되었다
- 대법원이 헌법 제20조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에 대하여, 지자체의 행정명령보다 못한 것으로 해석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면, 지난 2020년 9월 당시 광주시의 모 교회에서 성도들이 예배 드린 것을 지자체장이 행정명령을 어겼다며 ‘종교의 자유’를 현격하게 침해한 것을,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당시 광주시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관내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해당 교회는 성도들 30~4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것이 예배 준비를 위한 9명까지의 입장 제한을 어겼다는 것으로, 담임 목사 등에게 벌금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에 해당 교회는 지자체의 행정명령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행정소송을 벌였는데, 1심 재판부는 각하(却下-법원이 심리하지 않고 사건을 끝냄)를 했고, 2심 재판부는 기각(棄却-법원이 판단하는 것을 물리침)을 하였다. 그런데 대법원에서는 교회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하였다. 즉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종교의 자유보다 공익의 목적이 중하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지역 주민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지자체가 행정명령을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여도(물론 이것도 문재인 정권하에서의 행정편의주의라고 본다) 법원의 판결은 달랐어야 했다. 즉 ‘종교의 자유’에 관한 것은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들은 철저하게 정부에서 주문하는 대로 ‘방역수칙’을 지켰고, 나중에 알려졌지만, 교회에서 정기 예배를 통한 코로나 확진자는 없었다. 그런데 교회만 유독 ‘고위험군’으로 지정하여 현장예배(대면예배)를 제한한 것은 형평성, 공정성, 평등성, 비례원칙, 정교분리원칙, 종교의자유 등을 크게 제한한 잘못이다. 헌법에는 여러 가지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가 있다. 그래서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는 어떤 자유가 우선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유의 개념’은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고, 이를 헌법에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유 가운데 ‘종교의 자유’가 으뜸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각급 법원들이 이에 대한 정확한 심리나 판결 대신 각하와 기각을 하고, 대법원마저도 ‘집합 금지로 제한되는 종교의 자유가 공익보다 중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은 과연 우리나라의 대법원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의미나 제대로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지난 2021년 6월 서울행정법원에서는 교회들이 서울시장과 은평구청장이 내린 대면 예배 금지 명령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 결정에서 ‘교회의 대면 예배 전면 금지는 위법하다’는 판결을 한 적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귀한 권리로 인정받아야 할 ‘종교의 자유’를 소송을 맡은 법원들이 서로가 미루고, 떠다밀고, 그것을 끝내 용인해 주는 사법부의 태도는 실망 그 자체이다. 차후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무조건 ‘밀어붙여’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하겠다는 것인가? 법원이 지나치게 정치적이 되고 법의 정신과 정의를 외면하고 그저 두루뭉술하게 그 판단과 결정을 미루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마저도 무시하는 처사로 보인다. 이를 어찌 ‘법치주의 국가’에서 가장 법률적 권위를 가져야 할 법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유사한 사건들이 남아 있는데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볼 것이다. 법관들의 치열한 법리적 해석과 판결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법원은 말 그대로 ‘법 정신’을 명확히 할, 법원 조직의 최고 상급심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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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해석이 잘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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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과심(過審)이 헌법 체계를 마구 뒤흔든다
- 7월 18일 대법원은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이 동성 커플에게 건강 보험상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제36조에서는 혼인을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성립한다고 하였다. 즉 결혼은 남녀, 양성에 의하여 이뤄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동성(남성)끼리 결혼을 하고 동반자로 사는 사람을, 이성간 결혼을 하고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건강보험공단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피고(건강보험공단)가 이성 동반자와 달리 동성 동반자인 원고(남성 동성애 커플)를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원고에게 불이익을 줘 사실상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별하는 것으로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하여 위법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 판결에서 무엇이 평등원칙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나라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헌법 제36조에서 분명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성간 결혼을 한 부부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피부양자로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평등원칙’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 혼인이 될 수 없는 동성 동반자에게 동일한 권리를 주라는 대법원의 판결은 ‘평등의 원칙’을 과심(過審)하는 것이다. 아무리 대법관이라고 하여도 우리 법의 가장 근간이 되는 헌법(憲法)을 무시하면 온당한 판결을 할 수 없게 된다. 법관이 법률을 외면하면 그것은 사법부의 권한을 벗어나는 것이며 오심(誤審)의 원인이 된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건강보험공단의 조치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 행위이며, 그 침해의 정도가 중하다’고 했다. 그럼 최고 법원이 헌법을 무시한 결정을 내릴 때, 국가 전체적으로 오는 혼란과 법의 체계가 무너지는 위험은 누가 책임지는 것인가? 오히려 소수 의견을 낸 4명의 대법관들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들은 ‘국민건강보험법에서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배우자는 이성 간의 결합을 본질로 하는 혼인을 전제로 하는데, 동성 간의 결합에는 혼인 관계의 실질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헌법에 맞는 판단이 아닌가! 실체적 하자가 없는 것을 ‘평등 원칙’을 들먹여서 선명한 헌법에 덧칠을 해 버리면,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가 되는 것을 모르는가? 개인의 행복이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헌법의 규정과 혼인의 가치를 벗어난 사람들을 위한 ‘차별 논리’로 법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이것은 대법원의 심각한 모순이 되며 그 권위와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심각한 과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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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과심(過審)이 헌법 체계를 마구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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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전인적 재충전의 기회”
-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원 없이 쓰임 받았습니다. 저는 10대 후반 소년 때부터 쓰임 받았거든요. 하나님 앞에 부름받아 교회를 나가고 예수님을 영접한 날부터 저는 교회에서 활동하고 자는 것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이런 표현을 하기는 뭐 하지만, 고3 때도 학교에 있는 것보다 교회에 있는 게 더 즐거웠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교회에서 활동하고 교회 가서 잤습니다. 그러다 신학교를 간다고 집에서 쫓겨난 후 20대 때는 진짜 풍운아의 삶을 살았습니다. 백암교회를 개척할 때 모진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한 나무로 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식년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한 10여 년 전 탈진 증상이 왔습니다.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수액을 한두 번 맞아서는 효과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김용선 장로님이 약을 지어주면서 “좀 쉬어주어야 합니다. 약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쉬니까 또 고비를 넘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새순이 나르샤, 전반기 교역자 워크숍, 킹덤맨, 피어라 봄까지 연이어서 주관을 하고 진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도 교계연합을 위해 얼마나 많은 비공개 모임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요즘 다시 탈진을 느낍니다. 지난 화요일에 오산리기도원에서 열린 OCCK성회에서 중화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2천여 명 모이는데 어떻게 설교를 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올라가니까 또 그냥 팔팔 날았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고 내려오니까 다시 허기가 졌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허기지고 탈진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김용선 장로님이 한약을 지어 오셨습니다. 또 목요일에는 다건연세내과에 가서 수액도 맞았습니다. 수액을 맞으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옛날 오색그린야드에서 교역자 워크숍을 할 때 쉬시려고 오신 몇몇 목사님들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 쉬엄쉬엄하세요. 우리처럼 쉬어 가면서 하세요. 우리가 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쉬러 온 것입니다. 목사님도 언젠가는 지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산행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낮에는 덥고 찌는 날씨였지만 산에 오르니까 역시 산 공기는 달랐습니다. “산 공기와 도심의 공기가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시멘트를 밟지 않고 흙을 밟으니까 이렇게 온몸이 가벼울 수가 없어. 산 공기를 마시니까 이렇게 가슴이 시원하고 상쾌할 수가 없어. 왜 이렇게 좋은 산행을 몇 주 동안 못했단 말인가.” 내 마음 흙이 되어, 바람이 되어 이 상쾌함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수련회를 위해서라도 한 주 쉬려고 했는데, 또 외부일정이 있네요. 그러나 장년여름수련회에 가면 마음껏 은혜를 누리고, 산 공기를 마시며, 전인적 재충전의 기회가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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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전인적 재충전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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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 현대는 불만족의 시대라고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만족하다는 소리를 듣기가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한 삶을 누리는 것 같으나 실상은 모두가 불만의 포로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거나 곡해함으로서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피조물입니다(창 1:27). 전 3:11에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만 흙으로 빚어진 물질적인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지식이나 재물로 그 공백을 메꾸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행복은 바람과 같아서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잡았다 생각하지만 빈손입니다. 그래서 전 1:14절에서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제일주의로 물질을 추구하면서 물질로 행복을 사겠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물질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딤전 6:10). 세상은 자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지 않고 더 가져야 한다고 아우성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자족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족이란 자기만족이 아니라 부단히 싸워서 이겨야 하는 즉 자기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임. 자족은 스스로의 체념에서 오는 자기 비하나 자기 포기가 아니라 어떤 도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는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서도 결단코 실망과 낙담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족하는 생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경험을 통하여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불평이나 불만은 배우지 말고 자족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남의 것을 보고 비교하지 말고, 내 입장과 환경을 바라보며 만족합시다. 세상에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지는 것이 있고, 배워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능적인 것은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단히 본능적인 욕구들로부터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십니다(시 23:1, 약 1:17). 세상의 만족,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의해 자기의 행불행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내 자신을 굴복시킬 때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13절)는 말씀은 ‘세상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지 있지 않고, ‘자족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믿음을 지키며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데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자족은 능력주시는 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생활 속에 처할지라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면서 영적 부요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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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자족 신앙’(빌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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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다음 세대의 리더가 될 누군가를 위하여”
- 얼마 전 월간목회 발행인이신 박종구 목사님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고 김창인 목사님 추모집을 내는데 추천사를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요청을 받고 한참 망설였습니다. 제가 김창인 목사님 밑에서 부목사를 해본 적도 없고 또 가까이에서 모셔본 적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저 딱 한 번 뵌 것은 그분이 천국 가시기 전에 휠체어를 타고 계실 때 인사를 드린 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긴 망설임 끝에 이런 추천사를 조심스럽게 썼습니다. “저는 김창인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한 번도 모셔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딱 한 번 천국 가시기 전에 휠체어를 타셨을 때 인사를 드린 적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목회 사상과 영성, 설교관이 제 안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옛날에 CBS 라디오 강단을 통해서 그분의 설교를 접했습니다. 맑고 청명하고 때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시다가 찬양을 부르시고, 청중을 향하여 조용하고 거룩한 울림으로 파문을 일으키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정말 청교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영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성장에 눈을 뜨셔서 수십 년의 미래를 보시고 강남으로 교회를 이전하여 우리 교단의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 성장시키셨습니다. 오늘날 저도 설교를 하는 걸 보면 그분의 설교 혼과 정신이 스며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저도 설교를 하다가 찬양도 하고 또 간증을 합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한 번도 부목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목사님이 저술하신 기독교 예식서를 아마 수십 번을 더 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의 결혼주례, 성찬예식은 다 목사님의 저술을 기본으로 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을 좀 가까이 모시고 사역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큰 영광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비록 방송과 활자를 통해서 만났지만, 그분의 스피릿과 영성이 제 안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멀리서 존경해왔던 목사님은 떠나셨지만, 그분의 목회 영성은 아직 제 안에 잠들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모시지도 못한 제가 추모집의 추천사를 쓴다는 것이 송구해서 진짜 무릎 꿇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행여 이 추천사가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한국교회의 큰 거목이요 거성이신 고 김창인 목사님의 추모집 발간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목사님이 남기고 가신 깊고 맑은 목회 사상과 영성이 한국교회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의 가슴에 향기롭게 새겨지기를 소망합니다.” 저 또한 제가 알지 못하는 어느 누군가에게 조용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고 한 권, 한 권 찍는 책 그리고 유튜브와 방송으로 전해지는 한 편의 설교를 더 성실하게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제가 죽은 이후에도 지인들에 의해서 저의 추모집이 출간된다면, 제가 김창인 목사님을 생각하듯,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런 날을 위해서라도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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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다음 세대의 리더가 될 누군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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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평화 뒤에 도사린 전쟁을 살펴야 한다
- 제22대 국회가 시작되면서 다수당에 의하여 ‘입법독주’ ‘입법독재’ ‘입법횡포’를 우려했는데, 그런 염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17인은 ‘국가정보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대표발의: 이기헌, 공동발의: 윤건영, 박해철, 박민규, 김남근, 김성회, 복기왕, 김원이, 박상혁, 이용우, 강준현, 조계원, 박홍근, 박희승, 김 현, 윤종군, 안태현 의원) 이들은 지난 7월 2일 국가정보원에 관련된 법률개정안을 제출했는데(의안번호: 1323호)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가히 기가 막힌다. 이들의 소속 국가는 어느 나라인지, 누구를 위하여 국민의 대표가 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정보원이 내란죄, 외환죄, 국가보안법위반죄, 군사기밀보호법위반죄 등 안보범죄에 관한 정보업무 수행을 위해 다른 국가기관에 대해 사실 조회, 확인, 자료 제출 등의 권한을 삭제한다’는 것과 ‘국가정보원이 안보 업무에 관련된 정보업무 수행을 위한 현장조사, 문서열람, 시료채취, 자료제출 요구와 진술요청 등 방식의 조사권을 삭제한다’는 것이다. 또 ‘국가정보원이 취득한 정보를 대공수사권을 가진 수사기관에게 범죄 정보를 제공할 것과, 국가정보원이 수집한 정보를 신원조회를 위하여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크게 축소 시켜 정치적 개입과 정략적 이용을 막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대한민국의 안보와 보안, 그리고 국가 중앙 행정 기관의 존립을 위한 것이 맞는지 의아스럽다. 지금 전 세계는 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그중에 정보(情報)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 자산이며, 국가를 지키는데 필요한 수단이 된다. 국가에도 필요하고 정확한 정보가 없이는, 국가 간 교류와 통상, 외교와 심지어 전쟁에서의 위험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020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공수사권’을 박탈하여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손발을 자르더니, 이제는 아예 국가를 위한 정보 수집과 그에 따른 수사권을 모두 박탈하여 목까지 치겠다는 것인가? 그러려면 왜 막대한 국민의 세금에서 국가정보원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가? 한낱 권력자들의 이용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인가? 더불어민주당 방식대로 한다면 우리나라는 모든 정보에서 밀려 고도의 정보 수집이 어렵게 되고,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할 간첩 활동이나 중요한 기밀의 유출 등을 획책하는 세력들을 붙잡을 수 없게 된다. 혹시라도 정보기관에 의하여 국민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이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손익 계산에 의한, 국가의 보안과 방첩 기능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보 수집과 활용의 용도는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대공수사권’을 빼앗더니, 이제는 대부분의 중요한 권한과 역할마저 박탈하여 유명무실한 국가 정보기관으로 추락시키려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구를 이롭게 하려는가? 파수꾼이 없는 병영(兵營)은 이미 적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겠다는 실책이다. 국가정보원의 역할과 책임은 어떠한 적의 도발과 음모로부터 방비하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최일선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재량을 주어야 한다. 국민과 국가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행정기관은 불필요하지만, 그 행정기관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가로막고 나서는 행위야말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아야 한다. 평화는 내가 힘이 있어야 상대편이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는 것이며, 지피지기(知彼知己)일 때, 우리의 안위는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들은 이를 모를까? 목욕물을 버리겠다며 아이까지 버리려는가? 사실 제22대 국회는 정식으로 아직 개원식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구잡이식으로 ‘입법폭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국민들은 ‘악법’과 ‘떼법’과 ‘국가망할법’을 양산하려는 국회의원들을 잘 감시해야 한다. 이제는 밖으로부터 도전해 오는 세력뿐만 아니라, 안에서부터 국가를 허물려는 세력들에게서도 국가를 지켜내는데,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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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평화 뒤에 도사린 전쟁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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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공산폭동을 진압하여 공적 받은 사람의 서훈을 박탈?
- 지난 6월 18일 조국혁신당을 비롯하여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614)을 발의하였다. 발의한 의원은 조국혁신당의 정춘생, 차규근, 신장식, 조국, 이해민, 김재원, 서왕진, 김선민, 강경숙, 황운하, 김준형, 박은정과 더불어민주당의 민병덕, 박지원, 김한규 의원이 입법 발의에 참여하였다. 이 법은 지난 2000년 1월 12일 공포되었다. 그런데 이 법률안을 개정하는 이유는 뭔가? 하나는 제주4·3사건의 왜곡·폄훼·허위 사실 유포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다는 것, 또 하나는 이를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홍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4조의 2항에서 ‘제주4·3사건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상훈을 받은 사람의 서훈(敍勳)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4월 3일 소요 사태와 이를 진압하기 위한 1954년 9월 21일까지의 제주도에서 발생한 공산 조직의 소요·파업·폭동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사건을 다루는 것을 말한다. 이 사태는 왜 일어났는가? 핵심적인 공산주의자 김달삼과 이덕구와 잘 훈련된 외부 인사들에 의하여 일어난 소요(騷擾) 때문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제주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방해할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식에 약 30,000여명이 참석했는데, 그 중에 남로당 계열 17,000여명이 소요를 일으키므로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3월 9일에는 제주도 직장인 95%에 해당하는 4만여명이 파업하는 등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제주4·3사건은 명백히 남로당, 좌익, 북한에서 내려보낸 공산당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 보고서에서도 제주도민 70%가 좌익이거나 동조자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도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4·3은 공산폭동’임을 인정했다. 물론 이때 당시에 억울하게 죽은 선량한 도민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 폭동이 절정에 이를 때, 제주도 인민군 규모가 4,0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니, 무법 지대가 되고, 그 사이에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도 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민들의 희생은 모두 진압군에 의한 것이 아님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선량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편으로 국가의 안위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진압에 나섰던 군인과 경찰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법률을 개정하여 그런 공로가 있는 분들의 공적과 서훈을 박탈하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제주4·3사건을 위한다며, 다른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실제와 실체를 밝히는데, 처벌을 일삼아 양심적, 공정한 목소리에 재갈을 물려서도 안 될 것이다. 제21대 국회에서 3,000개 이상의 법률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도대체 국민들은 그러한 법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국민들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직 ‘입법 독재’ ‘입법 독주’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법이라면, 그 자체로도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그런데 제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법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권욕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의 권력 남용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이를 잘 살펴야 한다. 제주4·3사건이 분명히 공산 세력에 의하여 시작된 반정부 활동이었는데, 이때 진압한 군·경의 명예를 흔들고 그들의 활동을 때려잡기 위한 법률안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또 역사적 실체를 가리거나 편향적인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한 ‘입법 놀이’가 되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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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공산폭동을 진압하여 공적 받은 사람의 서훈을 박탈?